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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pee 2011. 5. 11. 07:24

‘우리詩’ 4월호를 읽고 내 마음에 맞는 시 7편을 골라

지난 3월말 제주학생문화원 전시실에서 있었던

동양란 전시회에서 찍은 난 사진과 함께 올린다. 



 

♧ 아내의 새 - 홍해리


한평생 나는 아내의 새장이었다

아내는 조롱 속에서 평생을 노래했다

아니, 울었다

깃털은 윤기를 잃고 하나 둘 빠져나갔다

삭신은 늘 쑤시고

아파 울음꽃을 피운다

이제 새장도 낡아 삐그덕대는 사립이

그냥, 열린다

아내는 창공으로 날아갈 힘이 부친다

기력이 쇠잔한 새는

조롱조롱 새장 안을 서성일 따름

붉게 지는 노을을 울고 있다

담방담방 물 위를 뛰어가는 돌처럼

온몸으로 물수제비뜨듯

신선한 아침을 노래하던 새는

겨울밤 깊은 잠을 비단실로 깁고 있다

노래도 재우고

울음도 잠재울

서서한 눈발이 한 생生을 휘갑치고 있다.



 

♧ 어떠리 - 김정화

    

오늘 낮에는 내내

마음 벗고 거울 속에 들어가

섬처럼 떠 있었다


어떠리

창 밖에 봄비 오고

봄비 속에 흰 목련꽃 혼자 잔들


어떠리

뜰을 나온 목련꽃

분별없이 부는 바람에 불려간들


어떠리

꿈과 여자의

두 꽃도 함께 죽어간들


이별 없는 만남은

영원의 것, 저 아득한 하늘의 것


짧은 손 하나로는

내 한세상에 떠나고 흐르는 것을


다 붙들 수 없으려니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진실

너만이 내 사랑인 것을


오늘 낮에는 내내

마음 벗고 거울 속에 들어가

세상 옷 모두 벗고

섬처럼 떠 있었다.



 

♧ 빈집 3 - 양승준


아내가 돈 벌러 나간 사이

나는 늦은 아침을 먹고

내 방에 들어가 책을 읽거나 시를 쓴다

만인의 사표(師表)는커녕

일인의 사표도 될 수 없어

학교를 뛰쳐나온 지

어느덧 육 개월,

그걸 깨닫기까지 장장

서른 두 해가 소요되었음을

부끄럽지만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내가 벌어오는 돈과

내가 만드는 시,

아내의 눈물이 빚어낸 돈과

나의 외로움이 빚어낸 시,

나를 대신하여 가장(家長)이 된

아내의 슬픔은

이 겨울 어둠보다 깊을진대

깨달음을 빙자한 나는

온종일 방구석에 틀어박혀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걸까

한 그릇의 밥도 될 수 없고

아내의 눈물조차 보듬을 수 없는 내 시,

오늘도 나는 빈집에서

저녁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 나무 - 한소운


나는 한 가지 체위만을 고집한다


내 살아온 이력

근본 없이는 똑바로 설 수 없기에

산그늘보다 더 깊은 뿌리 하나쯤 내리고

고요히 선정에 들 때면

깊은 하늘 날던 새들도

가만 내 어깨로 내려와

시詩나부랭 시詩나부랭 문장을 만들다

구름 한 장 북 찢어 버리고

포로로 하늘 속으로 날아간 오후

여러 가지 체위법을 논하는 시인들은

아직도 난해한 설說을 풀어 놓지만

나는 죽어도 무릎 꿇지 않는

예나 지금이나 한 가지 체위만을 고집한다



 

♧ 날아오르는 봄 - 정미정


산벚나무 가슴께에 날아든 때까치 한 쌍

모처럼 옆구리 훈훈해진 늙은 벚나무

신접살림 때까치 둥지를

은근슬쩍 훔쳐보다

자꾸 점잖지 못한 웃음을 흘리는 기라

허연 침을 산 아래까지 튀기는 기라

먹먹한 눈 씻어가며

철공소 용접봉에 튕겨 오르는 불꽃인 양

자지러지는 울음을 듣노라면

실실 새는 연분홍 웃음

빗장 풀리며 가슴 방방하게 바람 드는 기라

먼 데까지 은근한 향기를 뿌리는 기라

 

산 아랫동네

올해도 자식걱정이라 엉거주춤 뒷짐 진 배나무들

때까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에

아랫도리 불끈 단단한 힘이 솟는 거라

어깨 죽지 풀풀 새 털이 나는 거라

벚꽃 은근한 향기 보얗게 돋은

사월이 꽉 찰 즈음

양 죽지의 하얀 깃털 활짝 편 배나무들

움츠리고 있던 목을 길게 빼고

드디어

생전처음 날아오르는 거라

일제히 날아보는 거라



 

♧ 길 - 김필영


 그냥 엎드려 있다. 땅속에 얼굴을 묻고 엎드려 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등뿐, 그 누가 짓밟고 지나갈지라도 뭍으로 온 고래처럼 쓸개 없는 나는 자존심 따위는 없다. 비 오면 그대로 비를 맞고 바람 불면 바람을 맞는다. 나의 첫 어머니는 가난한 맨발이었다. 아버지가 바뀔 때마다 배를 곯던 짚신이었다가 고무신이었다가 마침내 불도저다. 그 옛날 꽃가마에 눈물 흘리며 시집가던 아씨를 기다리던 나의 구부러진 등, 질주를 좋아하던 사람들, 등뼈를 깎아내리고 뜨거운 콜타르를 입혔다. 바라볼 수 없는 내 눈은 삼색 신호등 무시하고 가는 사람들은 고통을 얻어 간다. 나를 통해 만난 모든 사람들 서로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내 등이 뭉개질지라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응어러진 마음 약속을 접어두고 멀리 떠나갈 때 홀로 쓰러져 운다. 눈물샘이 없어 눈물조차 흘릴 수 없어 그냥, 엎드려 속으로 운다. 등이 젖는다. 온몸이 젖어온다.



 

♧ 바디랭귀지 - 최영철


느닷없이 내리는 부슬비 맞으며 셔틀버스 기다리는데

저만치 우산 받치고 선 외국인

자기 우산 속으로 들어오라며 손짓이다

이런 봄비쯤이야, 설레설레 괜찮다고 손 흔들었더니

요즘 비 맞을 거 못 된다고 살랑살랑 또 손짓이다

우산 속에 나란히 서서 가로수 아래 풀잎을 보고 있는데

다급하게 쫒아 들어온 체면 없는 비를 마다않고

풀잎들은 서로 자리를 내어주느라 설레설레 살랑살랑 물결친다

버스가 오고 서로 먼저 타라고 손을 내밀고

버스가 서고 서로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몇 정거장 지나 다른 나라에 왔는데도 비는 내렸다

풀잎은 어서 오라고 손을 흔들고

그러지 않아도 지금 간다며 비는 미끄럼을 탔다

여기 목마른 곳 간지러운 곳 있다고 풀잎은 몸을 비틀고

안다고 다 안다고 비는 거기에 정확히 파고들었다

문 열어달라고 댕댕댕 비는 풀잎의 심장을 두드리고

벌써 다 열어놓았다고 풀잎은 비를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