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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시세계

solpee 2010. 10. 27. 18:46

추사 김정희의 시세계

심경호(沈慶昊)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1. 머리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시는 대상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속에 긴장과 이완의 두 국면을 담았다. 그렇기에 그의 시는 유례없이 고도한 정신성을 담고 있고, 지적 결벽성을 드러내고 있다.

추사는 대상에 구속되기보다는 대상과 주체와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흥회(興會)를 중시했다. 이 예술적 경험은 선종의 돈오와 유사하다. 추사는 그것을 신통유희(神通遊戱)라고도 하고 유희삼매(遊戱三昧)라고도 했다. 추사는 서예의 예를 들어 흥회의 가치를 이렇게 말했다.

옛 사람들의 서예는 우연하게 쓰고 싶을 때에 쓴 것이 상품이었다. 글씨를 쓸 때에는 산 북쪽에 살고 있던 왕자유가 눈이 내린 밤에 배에 앉아 친구를 찾아가는 것처럼 흥이 나면 갔다가 흥을 다 하면 돌아오는 것과 같아야 한다. 그러므로 쓰고 안 쓰는 것은 흥회를 따라야 한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조금도 없어야만 서예의 정취가 천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될 수 있다. 지금 서예를 하려는 사람들은 산 북쪽에 눈이 내리고 안 내린 것도 상관하지 않고 억지로 왕자유를 대안도의 집에 보내려고 하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추사는 왕자유(王子猷) 즉 왕휘지(王徽之)가 달빛이 흰눈을 비추는 밤에 벗 대규(戴逵, 字 安道)가 불현듯 생각나서 배를 내어 그를 찾아가다가 흥이 다하자 그냥 돌아왔다는 고사를 인용했다. 이것은 목적을 배제한 순수한 흥취의 우발성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추사는 운구(雲句) 승려에게 시(詩)‧화(畵)‧선(禪)의 원융섭수(圓融攝收)를 말하면서 신통유희(神通遊戱)를 강조했다.

그림의 이치란 선(禪)에 통한다. 왕유(王維)는 그림 삼매에 들었고 장약허(張若虛), 노능가(盧楞伽, 六祖 慧能), 거연(巨然), 관휴(貫休) 등은 다 신통으로 자유자재하게 유희하여[신통유희(神通遊戱)] 그림을 그렸다. 그림 비결에서 길이 끊어진 듯하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물이 흐르듯 하면서도 흐르지 않는 것이 선(禪)의 뜻의 오묘한 경지이다. '흐르는 물 다한 곳에 이르러 고요히 앉아 구름 이는 때를 본다'고 했던 왕유의 시 한 구절에 있어서는 경계와 정신이 융합한 경지이다. 시의 이치, 그림의 이치, 선의 이치가 각각 서로 원융섭수(圓融攝收)한다. ?화엄경?의 거창 방대한 큰 누각 같은 경지도 한번 손가락을 튕기는 찰나의 선의 경지에서 나왔고, 해인삼매(海印三昧, 삼라만상이 바다에 도장 찍히듯이 비친 모양)의 그림자가 나타남도 그림이 이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없다.

선(禪)은 논리적 사유와 이지적 인식에서 초월한 주관적이며 직각적인 감득을 뜻한다. 추사는 시와 화도 그러한 주관적이며 직각적 감득을 토대로 이루어지며, 그 경지가 곧‘신통유희’라고 본 것이다.

화엄누각은 큰 연꽃에 싸여서 숨겨져 있는 미진수(微塵數)의 세계 곧 화엄세계를 말한다. 추사는 삼매의 경지에 들어가면 화엄세계도 탄지(彈指)의 순간에 나타난다고 했다. 그것은 곧 돈오의 신비한 체험이요 흥회의 찰나적 경험이다. 그것은 개인의 일회적 경험이다. 그렇기에 추사는“법(法)은 사람마다 전수 받을 수 있지만 정신과 흥회는 사람마다 스스로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추사는 또 친우 권돈인(權敦仁)의 시를 평하면서 유희삼매(遊戱三昧)를 강조했다

체(體)가 상(相)을 좇아 변하거나 경(境)이 물(物)로 인하여 변천하지 않고, 글자마다 화엄법계로부터 나온 것이 바로 동파(東坡)가 일생동안 유희삼매(遊戱三昧)를 수용한 곳입니다. 곱고 윤택한 기운이 빙첨(氷簷)과 설벽(雪壁)에 충만하니, 야마천(夜摩天)과 도리천(忉利天)에서 맛보는 살진 고기와 하얀 옥액(玉液)의 맛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추사는‘體가 相을 좇아 변하거나 境이 物로 인하여 변천하지 않는 것(不以體逐相變, 境因物遷)’을 ‘유희삼매’라고 한다. 소동파는 “군자는 물(物)에 의(意)를 붙여야 하지, 물(物)에 의(意)가 구류(拘留)되어서는 안 된다(君子可以寓意於物, 而不可以留意於物)”고 하고, 물(物)의 안에서가 아니라 ‘물(物)의 밖에서 놀아야 한다(逰於物之外)’고 주장했다. 세상과 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린 초연한 삶의 자세, 그리고 외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 대상과 자유롭게 유희하는 정신를 말한 것이다.

추사도 대상물에 구속되지 않는 주체적 자유, 기예에 대한 완전한 장악을 추구했다. 이 경지는 곧, 선험적인 유교 윤리나 무거운 책임의식으로부터 해방된 완전한 자유를 지향한 것을 말한다.

「제묵암고(題黙菴稿)」에서 추사는 서주선사(舒州禪師)의 말을 인용해서 인간의 내적 자유를 강조했다.

세속에는 두 가지 병이 있으니 하나는 나귀를 타고도 나귀를 찾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나귀를 타고 내리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나귀인 줄을 알면서도 내리려고 하지 않는 것은 제일 고치기 어려운 병이다.

?고존숙어록(古尊宿語彔)?에 보면 서주선사 청원(淸遠)은 “이미 나귀를 얻은 줄을 알면서도 타기만 하면 내리려고 하지 않는 이런 병은 고치기가 제일 어렵다(卽識得驢了, 騎了不肯下, 此一病最難醫)”고 했다. 나귀는 부처(혹은 佛性)를 가리킨다. 서주선사는 나귀의 등에 실려 다니면서 주체의 자유로운 의지를 상실한 상태를 비판한 것이다. 추사는 그 말에 공감했다.

2. 추사의 시학(詩學)

추사는 시에서 당풍과 송풍을 종합하는 것은 물론, 명나라와 청나라의 다양한 문예사조를 종합하고자 했다.

우선 명나라 문학사조에서는 성령론(性靈論)을 따르되 격조설(格調說)도 겸하려고 했다. 시인이 자신의 성령에 따라 자유로이 문학 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성령론이다. 「제이재동남시후(題彝齋東南二詩後)」에서 추사는‘격조로 성령을 조절함[格調裁整性靈]’으로써 성령파의 단점인 음(淫)․방(放)․귀(鬼)․괴(怪)를 극복해야 진정한 시도(詩道)라고 말했다.

한편 추사는 청나라의 시학 가운데 옹방강(翁方綱)의 기리설(肌理說)을 토대로 왕사정(王士禎)의 신운론(神韻論)을 수용했다. 왕사정의 신운론은 예술적 경지의 추상적 국면을 강조한 데에 반해 옹방강의 기리설은 사실적 국면을 강조했다. 추사는 그 둘을 종합하고자 했다.

그런데 추사가 가장 중시한 시론은 역시 성령론이다. 추사는 「제이재동남시후(題彝齋東南二詩後)」에서 추사는 시는 빈천이나 부귀와 같은 사회적 처지와 관계없다고 했다.

구양수의 논에서, “시는 가난해야 공교로워진다”고 했다. 이는 단지 빈천의 궁을 말한 것이다. 부귀하면서 궁함에 이르러야 그 궁을 궁이라 말할 수 있으며, 그 궁에서 공교로워지는 것은 또한 빈천의 궁으로써 공교로워지는 것과 다르다. 빈천의 가난함으로써 공교로워지는 것은 그리 기이하게 여길 수가 없다. 그러나 부귀한 자라해서 잘 짓는 자가 없겠는가만 부귀하면서도 잘 짓는 자는 또 궁을 후에 다시 겪으면 공교로워지니, 이는 빈천의 궁으로는 능히 못할 바이다. 아! 동남의 이시가 이로서 공교로워진 것이다. 그러나 성령과 격조는 구비된 후에야 시도가 좋아진다. ?주역?에 이르기를 “나아가고 물러나며 얻고 잃음에 있어서 그 바름을 잃지 않는다”고 했다. 그 바름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시도를 들어 말한다면 반드시 격조로서 성령을 제정하여 지나치고 제멋대로이며 교활하고 기이한 것을 면하면 그러한 후에 비단 시도만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 바름을 잃지 않게 된다. 하물며 나아가도 물러서고 얻고 잃음에 있어서야! 아! 지금 동남의 이시는 성령과 격조를 모두 구비하였다. 아! 나아가도 좋아지고 물러가도 좋아지고 얻을 때도 좋아지고 잃을 때도 좋아지니 그 바름을 잃지 않으며 부귀한 가운데 궁하여져서 공교로워진 것이 빈천으로 궁하여 좋아지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구양수는‘시는 생활이 궁벽함에 처해서야 비로소 공교해진다(詩窮而後工)’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즉 구양수는 「매성유시집서(梅聖愈詩集序)」에서,“선비가 뜻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세상을 펴보지 못하게 되면 주로 산천에 스스로 방랑시켜 겉으로는 蟲魚草木․風雲鳥獸의 모습을 보며 그 기괴한 것을 짓게 되고, 속으로는 우울하고 감개한 심정이 가득 쌓여서 원망하고 풍자하는 데서 발흥되어 귀양 간 신하나 과부의 한탄을 말하고, 사람의 심정으론 말하기 어려운 것을 써내게 된다. 대개 궁벽할수록 시는 더욱 공교해진다. 따라서 시가 사람을 궁벽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궁벽하게 되면 그런 후에 시가 공교해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추사는 시의 공교로움은 빈천이나 부귀와 같은 사회적 처지와 관계없으며, 매 상황마다 성령의 바름을 얻으면 공교로워진다고 보았다. 이때 추사는 ?주역? 건괘(乾卦)의 「문언전」에서 상구(上九) 효사를 풀이하여 “항(亢)이라는 것은 나아감을 알고 물러섬을 알지 못하며, 흥함을 알고 망함을 알지 못하고, 얻음만 알고 잃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오로지 성인만이 나아가고 물러나는 일과 흥하고 망하는 것을 알고, 그 바름을 잃지 아니한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인이 아니겠는가!(亢之爲言也, 知進而不知退, 知存而不知亡, 知得而不知喪, 其唯聖人乎. 知進退存亡, 而不失其正者. 其唯聖人乎)”라고 한 말을 환기시켰다.

동시에 추사는 시에서 학습과 수양을 중시했다. 곧, 「제단전관악산시(題丹廛冠嶽山詩)」에서 추사는 중인 시인인 이단전(李丹佃)의 시에 대해 논평하면서,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 부지런히 지식을 쌓아야 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수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악산」 시의 네 번째 구인 ‘몇 천 년을 한결같이 푸르렀다’는 극히 웅장하고 기이해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고, 또 혹은 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두 번째 구인 ‘바위와 소나무가 서로 엇물렸구려’는 겉으로 보기에 부드럽게 쓰면서 지나가서 한 번에 대수롭지 않게 접속해 온 것 같은데 이는 가슴속에 5천권의 책이 들어 있지 않고 붓 아래 금강저가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지을 수가 없다. 천연스럽게 모이고 머물러 비록 작자라도 또한 스스로 알지 못하는데 어찌 평범한 지식과 속된 체관으로 능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옛사람의 묘한 곳은 이 한 경지에 있으니 옛날의 대가는 지금 사람들과 다른 것이다. 지금의 너는 눈을 원숙히 하지 않고, 익숙한 경지에 있지 않으면서도 능히 이 한 가지 경지를 얻었다. 옛사람들은 5천권과 금강저가 있어 오히려 사람의 힘으로 이에 도달하는데 이는 즉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서 저도 모르게 고인과 합해졌으니, 비하자면 조창의 노행자가 지은 보살명경의 게와 같고, 오조가 마음속으로 결정해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굴순(屈眴)을 전하는 것과 같다.

추사는 난초 그림에 쓴 시(「題蘭」)에서, 묵란(墨蘭) 치는 일이 바로 난초의 천성과 자신의 천성을 동시에 드러내는 일이라고 했다. 결국 시를 짓는 일도 천성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

난화 안 그린 지 스무 해

우연히 천성을 쏟아냈네.

문 닫고 들어앉아 찾고 또 찾으니

이것이 바로 유마거사 불이선.

不作蘭畵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

閉門覓覓尋尋處, 此是維摩不二禪.

?유마경?의 「불이법문품(不二法門品)」에 보면, 보살들이 선열에 드는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였지만 유마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주관과 객관의 분열을 초월한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에 도달하라고 가르치기 위해 이런 일화를 소개한 것이다. 추사는 난초 치는 것을 근본무분별지에 도달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추사는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의 그림에 또 다음과 같은 말을 적었다.

若有人强要爲口實又當以毘耶無言謝之. 曼香.

이 구에 대해서는 흔히 “만약 누군가가 강요한다면, 또 구실을 만들고 비야리성(毘耶離城)에 있던 유마의 말없는 대답으로 거절하겠다. 만향”으로 풀이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풀이해야 할 것이다.

만약 누군가 (난 그림을 그려달라고 )강요하여 (이것을) 구실로 삼는다면, 또한 마땅히 비야리성 유마의 무언으로 사절하리라.

그림 좌측 하단에 왼쪽부터 오른쪽으로는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 不可有二”라고 적었다. “처음에 달준을 위해 그렸으니 단지 하나일 수 있지, 둘일 수가 없다”는 뜻이다. 추사는 귀양을 가서 달준이라는 청년을 만나 시동처럼 데리고 있었는데, 이 그림을 우연히 달준에게 그려준 듯하다. 하지만 마지막에 “吳小山見而豪奪可笑”라고 했으니, 소산 오규일(吳圭一)이 탐이 나 달준에게서 억지로 빼앗아가기에 우습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추사는 이러한 그림이 하나일 수밖에 없으며 둘일 수 없다고 했다. 물론 그것은 그림 오른쪽 여백에 “以草隸奇字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라고 적었듯이, “초서와 예서의 기자(奇字)의 법으로 그렸으니, 세인들이 어찌 알며 어찌 좋아하랴”라는 뜻에서 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는 추사는 ‘偶然寫出性中天’은 일회성에 그친다는 것, 흥회는 언제나 유일무이하다는 점에서 근거해서 그와 같이 말한 것이다.

3. 추사의 영물우의(詠物寓意)

추사가 국화를 노래한 시 가운데 「사국(謝菊)」이 있다. 국화에게 감사한다는 뜻이다.

하루아침에 벼락부자 너무나 기쁘나니

핀 꽃들 하나하나가 황금 구슬이로다.

가장 외롭고 담백한 곳은 화려한 얼굴이니

봄 마음 고치지 않고 가을 추위 버티누나.

暴富一朝大歡喜(폭부일조대환희), 發花箇箇黃金毬(발화개개황금구).

最孤澹處穠華相(최고담처농화상), 不改春心抗素秋(불개춘심항소추).

국화의 노란 꽃을 황금 구슬에 비유하고 국화의 고담한 맛은 오히려 흐드러진 꽃의 상(相)에 드러나 있다고 했다. 세간 사람들의 통념을 뒤집는 발견이니, 추사의 깨달음의 경지가 잘 드러나 있다.

「중양황국(重陽黃菊)」에서는 황국을 초지선(初地禪)에 비유했다.

황국이 몽우리는 초지선

비바람 울타리에 정연(靜緣)을 맡겼구나.

시인을 공양하여 최후까지 기다리니

백억의 온갖 꽃 속에 널 먼저 꼽으리라.

黃菊蓓蕾初地禪(황국배뢰초지선) 風雨籬邊託靜緣(풍우리변탁정연)

供養詩人須末後(공양시인수말후) 襍花百億任渠先(잡화백억임거선):

초지(初地)는 수행 십계 중의 제1 계위(階位)다. 대승보살의 십지에서 보면 초지는 환희지(歡喜地)를 말한다. 추사는 황국이 비바람 치는 울타리에 오히려 정연(靜緣)을 부쳤다고 했다. 정연(靜緣)은 정인(靜因)의 도(道)이니, 마음이 허정(虛靜)을 견지해서 사물의 이치에 순응하는 것을 말한다. 황국의 몽우리는 마음이 외적 환경의 속박에서 벗어나 허정 상태를 취하는 환희의 경지를 비유한다.

추사는 「수선화(水仙花)」 시를 지어, 수선화를 해탈한 신선에 비유했다.

한 점 찬 마음처럼 늘어진 둥근 꽃이여

그윽하고 맑은 품성, 냉철하고 준수한 경지로다

매화꽃 고상해도 오히려 뜰을 떠나지 못하거늘

맑은 물에서 진실로 해탈한 신선을 보네.

一點冬心朶朶圓(일점동심타타원), 品於幽澹冷雋邊(품어유담냉준변).

梅高猶未離庭砌(매고유미리정체), 淸水眞看解脫仙(청수진간해탈선).

19세기 조선에서는 수선화와 파초를 재배하는 붐이 일어났다. 본래 수선화는 중국의 강남에서 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순조 12년인 1812년, 시인 자하 신위가 연경에 사신 갔다가 겨울에 돌아오면서 가지고 왔으며, 이것이 우리나라에 수선화가 들어온 시초라고 한다. 이후 중국산 수선화의 구근을 서로 나누는 일이 문인들의 운사(韻事)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추사는 제주에서 나는 수선화를 처음으로 발견해서 이 「수선화」 시를 남겼다.

서양에서 수선화의 꽃말은 ‘자만’이라고 한다. 하지만 동양에서의 꽃말은 능파선자(凌波仙子)이니, 물 위를 걷는 선녀라는 뜻이다. 원래는 조식(曹植)이 「낙신부(洛神賦)」에서 낙신을 묘사하여 쓴 말인데, 북송의 황정견(黃庭堅)은 그 말로 수선화를 비유하였다. 낙신은 낙수의 신인데, 곧 복비(宓妃)를 말한다. 위(魏)나라 조조의 아들 조식은 낙수를 건너면서 자신이 사모하였으나 형 조비에게 빼앗겼던 미인 견씨(甄氏)를 그리워하여 복비를 그녀에 빗대어 「낙신부」를 지었다. 그리고 그 시 속에서 낙신의 자태를“물결 위로 사뿐사뿐 걸어가니 비단 버선에서 먼지가 난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실은 견씨의 자태를 빗댄 것이었다고 한다. 황정견은 수선화에 능파선자라는 꽃말을 붙이고,“산번화는 수선화의 아우요, 매화는 수선화의 형이다[山礬是弟梅是兄].”라고 규정하였다. 우리 문인들이 수선화를 존중하게 된 것은 황정견의 영향이 크다.

조선 선조 때 문인 차천로는 황정견의 이 「수선화」 시를 보고도 무슨 꽃인지 몰랐다가, 일본에 가서 수선화의 실물을 처음으로 보았다고 회상하였다. 그는 “풀은 10월에 처음 나고 잎은 가란(假蘭) 같은데, 키가 두어 자나 되었다. 11월에 꽃이 활짝 피는데 흰 빛이다. 12월에 꽃이 떨어지고, 1월에 줄기가 마르고, 2월에는 말라 죽는다. 중에게 이 풀의 이름을 물었더니,‘수선화’라 하였다.”라고 ?오산설림초고?에 적어 두었다. 그 뒤 조선 문인들은 명나라 말기 원굉도(袁宏道)의 ?병사(甁史)?를 보고,“수선은 품격이 매우 청초하다. 직녀성(織女星)의 다리인 옥청(玉淸)이다. 한 포기에 잎이 많은 것을 진수선(眞水仙)이라 하고, 외쪽 잎이 나는 것을 수선이라 하고, 꽃잎이 많은 것을 옥영롱(玉玲瓏)이라 한다.”라는 설명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병사’란 병에 꽂은 꽃들에 대한 기록이란 뜻이다.

조선 문인들의 호기심을 그토록 유발하였던 황정견의 「수선화」 시는 다음과 같다.

능파선자 버선 위에 티끌이 일어나니凌波仙子生塵襪

물 위를 사뿐사뿐 희미한 달빛 아래 걷누나.水上盈盈步微月

누가 이처럼 애끓게 하는 혼을 불러내어是誰招此斷腸魂

찬 꽃으로 피워내어 시름겹게 만드는가.種作寒花寄愁絶

향기 머금은 흰 몸이 눈부시게 아름다우니含香體素欲傾城

산번화는 아우요 매화는 형이라네山樊是第梅是兄

앉아서 대하려니 꽃 때문에 번뇌하여坐對眞成被花惱

문을 나와 웃노라니 강물이 비껴 흐르누나.出門一笑大江橫

황정견의 시는 수선화의 아리따운 자태와 뇌쇄적 풍모를 표현해 냈다.

하지만 추사는 수선화의 아리따운 자태보다도 수선화의 해탈의 경지에 더욱 주목했다. 그것은 그대로 추사의 ‘발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추사는 자연의 꽃이 아니라 「병화(甁花)」도 사랑했다.

잘 꽂아 놓았나니, 모두가 이름 난 꽃

오백 년 도자기도 비색을 자랑하네

향기와 윤택함이 쉽사리 바뀌지 않으니

세간의 비바람이 어찌 해치리오

安排畫意盡名花(안배화의진명화) 五百年瓷秘色誇(오백년자비색과)

香澤不敎容易改(향택불교용이개) 世間風雨詎相加(세간풍우거상가)

병화는 인공의 것이라고 배척하기 쉽지만, 병화는 오히려 세간의 풍우로부터 보호를 받아서 향기와 윤택함이 쉬이 바뀌지 않을 수 있다. 마치 진공의 공간과도 같은 정밀(靜謐)한 세계에 살아가는 고고한 정신 경계를 스스로 칭송한 시이다.

4. 추사의 사경기흥(寫景起思)

뜰에 난 풀을 읊은 「정초(庭草)」는 자연과의 친화를 꿈꾸고 자연의 생기(生氣)를 사랑하는 추사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하나 하나 신 자국 어제 지난 자국인데

무성한 풀들 다시 자라나 섬돌 위 뜰을 덮었구나

기봉은 봄바람이 가장 교묘하여

붉은 색 발라 놓고 지나가자 또 푸른 점을 찍는구나.

一一屐痕昨見經(일일극흔작견경) 蒙茸旋復被階庭(몽용선부피계정)

機鋒最有春風巧(기봉최유춘풍교) 纔抹紅過又點靑(재말홍과우점청)

북송의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는 창 앞의 풀을 뽑지 않고 그냥 두었다. 어떤 사람이 물으니, 그는 “저 풀이 살고 싶어하는 마음은 나와 똑같다[與自家意思一般]”고 말했다고 한다.

추사는 「실제(失題)」의 제2수에서 농가의 평화스런 정경을 묘사했다.

꽃들은 시냇가 집에 어른거리고

아침 해와 조각 노을이 붉은데

숲 속의 새들이 쪼는 꽃잎이

이따금 술잔에 떨어지네.

群芳照澗戶, 朝日片霞紅. 林禽啄花藻, 時時落酒中.

자연 산수의 아름다움은 삶의 공리성을 떠난 순수한 미이다. 그것을 극단에까지 추구한 사람이 추사라고 할 수 있다.

「촌사(村舍)」는 정적 경물 묘사가 뛰어나며 색조 이미지가 선명하다.

서너 송이 맨드라미는 장독대 동쪽에 우쑥하고

새파란 호박 넝쿨은 외양간을 타고 오른다.

마을 속 서너 집에서 꽃 일을 찾아보니

한 장 크기 해바라기가 붉구나.

數朶鷄冠醬瓿東(수타계관장부동) 南瓜蔓碧上牛宮(남과만벽상우궁)

三家村裏徵花事(삼가촌리징화사) 開到戎葵一丈紅(개도융규일장홍)

일장홍(一丈紅)은 응규의 별명이기도 하다.

한편, 「산사(山寺)」 시에서 추사는 홍진과의 결별을 단호하게 말했다.

비낀 봉우리 연이은 산령이 하나하나 진경이니

종전에는 잘못하여 열 길 홍진 속에 있었구나.

감실의 불상은 사람보고 얘기 하려는 듯 하고

산새는 새끼 데리고 날아와 반기는 듯이 하네.

홈대의 맑은 물로 차를 끓여 마시고

화분의 담담한 봄꽃을 공양하나니

콧물 닦는 그 공부를 그 누가 터득했나.

온 골짜기 솔바람에 한바탕 기지개 편다.

側峯橫嶺箇中眞(측봉횡령개중진) 枉却從前十丈塵(왕각종전십장진)

龕佛見人如欲語(감불견인여욕어) 山禽挾子自來親(산금협자자래친)

點烹筧竹冷冷水(점팽견죽냉냉수) 供養盆花澹澹春(공양분화담담춘)

拭涕工夫誰得了(식체공부수득료) 松風萬壑一嚬申(송풍만학일빈신)

식체공부(拭涕工夫)는 당나라 고승 나찬(懶瓚)의 고사에서 가져 온 말로, 속인의 뜻에 맞추는 공부를 뜻한다. 나찬은 형산(衡山)에 거처하며 잔암(殘巖)의 석굴 속에서 게을리 지냈다. 덕종(徳宗)이 사람을 보내 조칙을 내려 부르자, 추위에 콧물이 가슴까지 내려왔다. 사자가 웃으면서 콧물을 닦으라고 권하자, 나찬은 “내가 어찌 공부가 있어서, 속인 때문에 콧물을 닦는단 말이요(我豈能有工夫爲俗人拭涕耶)?”라고 했다. 끝내 그를 불러올 수가 없었다고 한다.

고전번역원 번역본은 ‘松風萬壑一嚬申’을 ‘만 골짝 솔바람에 한번 길게 한숨 쉬네’로 풀이하고, 빈신(嚬申)에 대해 이백 「명고가(鳴皐歌)」의 “寡鶴淸唳 飢鼯嚬申”을 끌어와 ‘얼굴을 찌푸리며 고통하는 소리임’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하지만 一嚬申은 一嚬伸과 같으며, 그것은 흠신(欠伸)한다는 말이다. 백거이(白居易)의 「불출문(不出門)」 시에 “食飽更拂床, 睡覺一嚬伸”이라 했고, 육유(陸遊)의 「讀書罷小酌偶賦」 시에 “黃卷展殘三太息, 綠樽酌罷一嚬伸”이라 했다.

추사의 이 시는 마흔 아홉(1084년)의 소동파가 남방 불교의 성지였던 여산십구봉(廬山十九峰)으로 서림사를 찾아갔다가 남긴 시(「題西林壁」)의 뜻을 발전시킨 것이다. 소동파는 장소와 각도에 따라 여산의 모습이 바뀌는 현상을 보고, 지각과 경험에 의존하는 인간의 어떠한 인식도 결코 사물의 본질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다는 철학적 주제를 생각하였다. 그는, 본질을 올바로 파악하려면 주관을 벗어나야 한다는 선(禪)의 발상을 다음 시로 표현하였다.

가로로 보면 산맥, 가까이 보면 솟은 봉우리

높낮이 원근이 위치 따라 다르다.

여산 진면목을 모르는 것은

이 몸이 이 산 안에 있기 때문.

橫看成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이 몸이 이 산 안에 있다’는 것은 자기의 주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뜻한다. 이 이후로 선가(禪家)에서는 인식주관이 도달할 수 없는 참된 본질을 ‘여산의 진면목(眞面目)’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추사는 이 시어를 의식하면서, “비낀 봉우리 연이은 산령이 하나하나 진경이니, 종전에는 잘못하여 열 길 홍진 속이었네”라고 하여, 지난날 홍진 속에서 진면목을 찾지 못했던 자신을 가련해 했다.

「과우즉사(果寓卽事)」 시는 추사가 늘그막의 우울한 심경을 경물에 감정이입해 보였다.

뜰에 복사꽃이 운다

어찌 가랑비 때문이리.

주인이 오랫동안 병들어 있어

봄바람에 웃을 수 없어서라네.

庭畔桃花泣(정반도화읍) 胡爲細雨中(호위세우중)

主人沈病久(주인침병구) 不敢笑春風(불감소춘풍)

추사는 정적인 경물만 좋아한 것이 아니다. 변환이 많고 역동적인 자연도 사랑했다. 「남굴(南窟)」 시는 그러한 정신경계를 드러낸 대표적인 시이다.

남굴에 천년 숨은 괴물은 연서(燃犀)가 두려워 탄식하고

신령한 바람은 을씨년스레 어두운 개울로 불어온다.

일탄지에 용과 뱀들 모두 돌로 바뀌고

등잔 불빛은 자색 무지개를 만드네.

千秋幽怪歎燃犀(천추유괴탄연서) 肅肅靈風吹暗溪(숙숙영풍취암계)

彈指龍蛇皆化石(탄지용사개화석) 燈光猶作紫虹霓(등광유작자홍예)

?진서(晉書)? 「온교전(溫嶠傳)」에 보면 온교가 무창(武昌)을 돌아 우저기(牛潴磯)에 이르니 물이 매우 깊은데, 세인들이 그 속에는 괴물이 많다고 했다. 그가 물소 뿔에 불을 붙여 비추니 물속의 괴물이 나와서 불을 끄는데, 수레를 타기도 했고 붉은 옷을 입은 것도 있었다. 그날 밤 꿈에 괴물이 ‘그대와 나는 유명(幽明)이 다른데, 무슨 마음으로 비추었는가?’ 하였다. 온교는 진(鎭)에 이르러서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추사는 온교의 고사와는 거꾸로, 유괴(幽怪)를 극복하고 용사(龍蛇)를 모두 돌로 만들고 등잔불을 무지개로 만드는 이체험을 한 것이다.

「취우(驟雨)」는 강렬한 이미지의 세계를 구축한 시다.

나무마다 훈풍에 잎사귀들이 가지런히 눕더니

서쪽 봉우리들부터 검어와서 흑우가 쏟아지매

쑥보다도 더 푸른 작은 개구리들

억새 끝으로 뛰어올라 까치울 듯 울어대누나

樹樹薰風葉欲齊(수수훈풍엽욕제) 正濃黑雨數峰西(정농흑우수봉서)

小蛙一種靑於艾(소와일종청어애) 跳上萑梢效鵲啼(도상추초효작제)

「설야우음(雪夜偶吟)」 시는 겨울의 농밀한 심경을 경물에 가탁해서 그려냈다.

녹황색 술, 푸른 등불, 낡은 집 안

옥영롱 수선화가 피었는데

심상한 눈발이 마음에 영향 주어

시의 경계 몽롱하고 그림 경계도 마찬가지.

酒綠燈靑老屋中(주록등청노옥중) 水仙花發玉玲瓏(수선화발옥영롱)

尋常雪意多關涉(심상설의다관섭) 詩境空濛畫境同(시경공몽화경동)

5. 추사의 희작 수창(酬唱)과 증답(贈答)

추사는 사람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지구(知舊)들에게 틈만 나면 시로 서찰을 대신했다. 추사는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는 희작(戱作)을 부쳐 따스한 정을 보여주고는 했다. 여기서 추사가 서찰을 대신해서 남에게 보낸 희작시 서너 편을 예로 들기로 한다. 조희룡은 추사의 몇몇 작품을 따로 기록하면서 “戱筆에 지나지 않지만 모두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이를 수 없는 경지에 있다.(不過戱筆, 而皆在他人思不到處)”고 하였다. 조희룡이 추사의 유희적 시세계에 어떤 매력을 느꼈음을 볼 수 있다.

과종(踝腫)이 난 우담 승려에게 보낸 「희제시우담(戲題示優曇)」은 다음과 같다.

비야[유마]의 병 보여준 그림을 말살하니

부처의 부스럼과 조사의 병이 한결같이 도로(都盧) 때문이지.

?법화경?의 약초조차 도리어 둔열하니

약 아는 자 캐 오지 않아서가 아니겠나

抹却毗邪示疾圖(말각비사시질도) 佛瘡祖病一都盧(불창조병일도로)

法華藥草還鈍劣(법화약초환둔열) 不是藥者採來無(불시약자채래무)

도로는 서역(西域)의 나라 이름. 그곳의 사람은 몸이 가벼워 나무를 잘 올랐다. 나무에 올라 기예를 펼치는 것을 도로기(都盧伎)라 했다. 불교의 조사들이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를 주장하므로 이렇게 말한 것인 듯하다.

한편 추사는 초의에게 이런 희작시(「戲贈草衣 竝序」)를 주었다.

매괴를 해당이라 덮어 씌어 전해오고

우미인이 노소년으로 잘못 전해왔네.

또렷또렷한 잡화(雜花)의 진실된 의미는

소초(疏鈔)의 얽히고설킨 걸 먼저 깨뜨려야 알지.

玫瑰仍冒海棠傳, 虞美人訛老少年.

的的襍花眞實義, 且於疏鈔破牽纏.

추사는 초의선사가 ?군방보(群芳譜)?를 엮은 것을 두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襍花’는 ‘여러 꽃’이란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잡화경(雜花經)’ 즉 ?화엄경(華嚴經)?의 뜻을 지닌다. 꽃들의 이름도 헷갈려 있듯이, ?화엄경?도 ‘소초(疏鈔)’ 때문에 진실한 뜻이 가려져 잇으니, ?화엄경?을 제대로 해석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을 말한 것이다.

「희증오대산창렬(戲贈吳大山昌烈)」는 홍소를 자아낸다. 오창렬은 역관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마도 의원이었던 듯하다.

기백(岐伯)‧황제(黃帝)의 의학책은 한 글자도 안 보고

남의 술, 돼지, 국수를 그냥 먹어 대다니

앞으로 지옥에 빨리 가고 싶은가보군

버젓이 말을 타고 또 나귀를 타다니.

未窺一字岐軒書(미규일자기헌서) 白喫人間酒麵猪(백끽인간주면저)

慾速他年地獄罰(욕속타년지옥벌) 陽陽跨馬又騎驢(양양과마우기려)

추사는 일상의 인간관계를 해학적으로 다루기를 좋아했다. 「우중에 오군을 만류하여 희증하다(雨中留吳君戲贈)」라는 제목의 시도 그 한 예다. 당시 추사는 서울 금청교(禁淸橋)와 종침교(琮沈橋, 琮琛橋) 사이에 거처했던 듯하다.

큰 더위에 손님을 붙들면 손님마다 가려드니

눈치 빠른 천공(天公)이 날 위해 비를 내리네.

종침교 가는 진흙이 질퍽질퍽하여

그댄 못 떠나니 마음 홀로 괴로울테지.

외론 맘 쓴맛 다하면 단맛이 따르리니

그대는 매사를 주인 말만 듣게나.

주인은 어물어물해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망아지 묶고 날개 자르는 건 잘 알고 있지.

긴박한 일이 있어서랴, 성벽이 이러하니

이 성벽이 몽우리 맺혀 뱃속 고질병이 되었구나.

호흡으로 마음 구멍 통하자 해도 안 되는데

어찌 針과 藥으로 간의 문턱엔들 이를쏜가.

게다가 또 한 병이 있어 낫기 더욱 어려우니

오행 중 토(土)가 하나 모자란 것이네.

일 만나면 깜박깜박 맹세도 잊어지니

분권이나 치부(致簿)야 염두에 두겠는가.

그대 나를 만난 것도 운수소관이라

낭패스럽게도 세상 따라 부앙하지 못하네.

종놈들은 교활하여 눈치가 빠르니

자네 입이 백 개라도 어쩔 수 없을 걸세.

부장의 집까지도 마침내 해 미치리니

이 말 들으면 그대와 한 족보에 오른 걸 후회하리.

그대는 편히 앉아 부채나 흔들게나

까마귀 머리 희면 내 그댈 풀어줌세.

大熱留人人欲去, 會事天公爲下雨.

琮沈橋邊泥滑滑, 君行不得心獨苦.

心獨苦盡甘隨來, 請君每事只聽主.

主人糊塗百無解, 但解縶駒與鎩羽.

非有關緊癖如此, 此癖結癥成積聚.

無以呴噓通心覈, 安能鍼藥到肝戶.

又有一病尤難醫, 五行之中獨欠土.

遇事忽忽歃如忘, 不在分券與執簿.

君之値我亦數存, 郞當不得仰與俯.

星奴巧黠善覘意, 君雖百口難爲所.

部將之家遂延害, 聞此應悔君同譜.

君且安坐但搖扇, 烏頭白時吾當許.

추사는 사람 잡아두는 버릇 때문에 오군을 붙잡아 매어, 오군은 마치 망아지, 날개 꺾인 새, 죄수와 같이 얽어매어져 있다. 추사는 자신이 가해자라 자인하면서도 피해자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놀리고 있다. 마지막 구에서는 “그대는 편히 앉아 부채나 흔들게나, 까마귀 머리 희면 내 그댈 풀어줌세”라고 하여, 진(秦)나라 왕이 연나라 태자 단(丹)을 볼모로 억류하면서 했던 말을 이용했다.

또 추사는 자신의 성벽을 고질병으로 치환하여 표현하면서, “게다가 또 한 병이 있어 낫기 더욱 어려우니, 오행 중 오직 土가 모자란 것이네”라고 했는데, ‘欠土’는 ‘坎’자를 破字한 것이다. 자신이 감지(坎止)의 처지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琮沈橋邊泥滑滑, 君行不得心獨苦’에서는 ‘니활활’이라는 금언(禽言)을 이용했다. 영물시의 우언시 가운데는 새 울음을 인간의 유의미한 언어로 해석하는 시 양식도 있다. 그것을 금언시(禽言詩)라고 한다. 북송의 매요신(梅堯臣)이 두견새, 제호새, 산새, 알락대가리 등 네 종류의 새 울음을 소재로 사금언시(四禽言詩)를 창작한 이래, 소식(蘇軾)은 오금언시(五禽言詩)를 짓는 등 연작으로 짓는 전통이 형성되었다. 매요신의 금언시 가운데 「알락대가리(竹鷄)」의 울음소리는 니활활(泥滑滑, 진흙길이 미끄럽네), 고죽강(苦竹岡, 오르기 괴로워라 참대 언덕아)라는 식으로 들린다고 한다. 이 새는 떠돌아다니면서 비를 괴로워하는 의미를 담기고 하고, 농사를 걱정하여 비가 멎기를 기다리는 의미를 담기도 한다.

泥滑滑 니활활(진흙길이 미끄럽네)

苦竹岡 고죽강(오르기 괴로워라 참대 언덕아)

雨蕭蕭 비는 쏴아쏴아

馬上郞 말 탄 사람아

馬蹄凌兢雨又急 말 밥굽 뒤뚱뒤뚱, 비는 또 세차나니

此鳥爲君應斷腸 이 새가 그대 때문에 애간장 끊어지겠네.

다음은 조공례란 인물에게 바둑알을 주며 써준 희작시(「戲贈趙公禮」)도 있다.

아우 손에 놀던 이 바둑알을

아낌없이 그대에게 넘겨주노라.

전설을 내 들으니 늙은 용이

태 떨어뜨리길 과일씨처럼 해서

이것이 변화해서 바둑알 되니

과거보는 사람에겐 꺼리는 거라네.

흰 것은 예백이 될 징조라면

검은 것은 먹을 마실 형상.

그 형상이 너무도 좋지 않아서

장거[오징어] 같은 고기도 아니 먹거든

청운에 높이 오를 그대의 솜씨

낭잠으로 오랫동안 비실대다니.

온갖 일이 쉽사리 마를 이루고

여섯 가지 꿈 가운데 혹 악몽이 되어라.

이게 모두 바둑이 시켜서 된 것

이득 손실 스스로 가릴 터이지.

또 다시 갑자기 나이 줄어져

젊은 놈이 침해하고 배척하누나.

피해가 마침내 이와 같으니

그대를 위해 한번 탄식하노라.

阿仲手中棊, 贈君無吝色. 我聞老龍子, 墮胎如果核.

此棊之化成, 擧子所忌剋. 白者兆曳白, 黑者象飮黑.

其象甚不吉, 如章擧不食. 怪君靑雲手, 郞潛久偪仄.

百事易成魔, 六夢或爲噩. 皆是棊所使, 得失應自擇.

又復忽减年, 少者成侵斥. 其害乃如此, 爲君一太息

예백은 과거보던 시대에 고권(考卷)을 등사하면서 엽(葉)을 건너뛰는 것을 말하고, 먹을 마실 형상은 먹물이 튀어 묻는 것을 말한다. 낭잠은 한(漢) 나라 때 도위(都尉) 안사(顔駟)가 문(文)ㆍ경(景)ㆍ무(武) 세 조정을 거치면서 머리가 희도록 낭서(郞署)에 침체되어 있었으므로 나온 말이다. ]여섯 가지 꿈은 ?주례(周禮)? 춘관(春官) 점몽(占夢)에 나오는 여섯가지 꿈으로, 정몽(正夢), 악몽(噩夢), 사몽(思夢), 오몽(寤夢), 희몽(喜夢), 구몽(懼夢)을 말한다. 조공례는 바둑을 잘 두었는데, 80세가 넘어서야 진사가 되었다. 추사는 그가 미관말직에 머물렀던 것은 바둑알의 액운 탓이라고 장난스레 말했다.

추사는 종 달준을 위해서도 희작을 주었다. 「희제하여 달준에게 주다(戲題贈達峻)」이다.

돼지우리 소 외양 가에 발 개고 앉아盤坐牛宮豚柵邊

유달리 큰 쑥대머리가 책을 짓누르네.蓬頭特大壓陳篇

천황씨 일만 팔천자天皇一萬八千字

개구리처럼 울길 삼년이던가 이년이던가.蛙呌三年或二年

달준이 ‘天皇一萬八千字’즉 ?십팔사략?을 개구리처럼 왝왝 대면서 두해, 서너 해 읽었지만, 문리를 틔우지 못하고 여전히 커다란 머리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채 여전히 씨름하고 있는 모습을 재미있게 묘사했다.

추사는 아침 저녁으로 남들이 글씨와 그림을 청하는데 시달리자, 그것을 학질을 앓은 것에 비유하면서 초의에게 약을 구해달라고 우스갯말을 했다. 「아침에 한 사람에게 시달리고 저녁에 한 사람에게 시달리고 나니 마치 학질을 앓은 듯했다. 장난삼아 초의 상인에게 올린다(朝爲一人所困嬲 暮爲一人所困嬲 如經瘧然 戲贈草衣上人)」라는 제목이다.

학질 귀신도 하루씩 건너 괴롭히는데鬼瘧猶爲隔日難

아침에 겪고 저녁되자 또 한열이 교차하네.朝經暮又熱交寒

스님은 醫王의 손을 아끼시나 보군山僧似惜醫王手

觀音의 救苦丹을 빌려주지 않다니. 不借觀音救苦丹

글씨나 그림을 요구하는 이들을 학질귀신에 비유하고, 그것을 멈추게 할 약을 스님이 보내주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듯한 말투다.

「寄而已广張混 竝序」도 재미있다.

온조성 꼭대기에 봄은 한량없어溫祚城頭春無限,

꽃 사이에서 술 마시고 꽃 사이에서 조누나.花間飮酒花間眠.

꽃 하나에 시 하나, 그 시가 만에 또 만이니一花一詩詩萬萬,

화신이 필경에는 시신에게 잡혀 묶이리라.花神遂爲詩神纏.

추사는 봄꽃이 흐드러진 풍경을 시로 하나하나 묘사하리란 것을 花神이 詩神에게 붙잡힌다는 경발한 표현으로 나타냈다.

「戲奉浿城李少尹」에서는 시 한편에 동일자를 여러 번 반복하여 장난스레 지었다.

죽부를 팔에 차고 죽지노래 불러 대며肘嚲竹符唱竹枝,

죽 소리만 듣고 거문고 줄 소리는 듣질 않네亦要聽竹不聽絲.

종래 참태수 몸의 부적이거늘由來饞守通身符,

하물며 호기 등등 취해 넘어질 때임에랴況復騰騰醉倒時.

[自註: 오늘이 바로 죽취일(竹醉日)임.]

제3구에서는 蘇軾이 흉중에 천묘의 대나무를 갖기를 원하는 욕심 많은 태수라고 놀리는 내용의 시를 써서 文同에게 보냈는데, 마침 부인과 함께 죽순을 포식한 문동이 그 시를 읽고 밥알이 튀어나오도록 웃었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참태수 부적이란 바로‘竹’을 뜻한다. 또한 마지막 구에서는 평양기생 죽향(竹香)이가 술에 취한 이소윤을 부축하는 모습을 덧붙였다.

「荒年禁酒 村少皆買餠看花去 今日風甚 獨坐無聊 泥筆率題 偏屬風餠」는 희필의 걸작이다.

소년이란 본래 닥치는 생각이 모자라少年元不費商量

비오건 바람 불건 개의치 않네. 雨雨風風大毋傷

떡을 사고 꽃을 보니 도리어 구족이라買餠看花還具足

雲門에 禪이 파하자 公羊으로 또 가는군.雲門禪罷又公羊

마지막 구의 공양은 ?춘추공양전?의 공양이니, 유가를 상징한다. 그러나 鍾繇가 ?좌씨춘추?를 좋아하고 ?춘추공양전?을 좋아하지 않아서 좌씨는 대관이라 하고 공양은 떡파는 사람이라 말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곧, 공양은 떡집을 뜻한다. 소년들에겐 공부는 공염불이요 떡으로 배를 불리기나 한다는 것을 장난스레 말한 것이다.

6. 추사의 고증적(考證的) 시풍

강화도의 마니산은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에 위치하며, 일찍이 단군이 참성단을 쌓고 나라와 백성의 앞날을 빌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한 전설이 하나의 서사적 구성체로 완결되어 전하지 않는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고려 때에도 천자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인 교사(郊祀)를 이곳에서 행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이 지역은 진작부터 우리 민족에게 성지(聖地)로 인식되어 왔음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추사는 단군의 참성단 제사나 고려의 교천 사실은 확실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는 정조 때 왕명으로 정족산성으로 실록(實錄)을 모셔오러 갔다가, 마니산 꼭대기에 올라 「실록을 모셔오라는 명을 받들고 강화사고에 가서 마니산 절정에 오르다(奉陪來實錄之命往江華史庫登摩尼絶頂)」라는 제목으로 다섯 수의 시를 지었는데, 마지막 수에서는

고려시대 교천(郊天)은 사실을 알 길 없고

단군의 옛날 일도 무어라 말하기 어렵다.

스님은 부처님 공덕이 대해의 무량의라 말하지만

내가 받은 큰 은혜에 비하면 오히려 적고말고.

麗代郊天未究原, 檀君舊史最難言.

僧言大海無量義, 較少微臣被大恩.

라고 실록을 모셔가게 된 벅찬 감격을 토로하되, 민족의 상고사에 대하여는 아무래도 지나치게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석노시(石砮詩)」는 청해(靑海)의 토성에서 발굴되는 석부(石斧)․석족(石鏃)에 대한 고증(考證)을 행하면서 그 학적 관심을 운문으로 읊었다. 시에 金正喜의 自註가 있어, “석부(石斧)ㆍ석족(石鏃)이 매양 청해(靑海)의 토성에서 나오는데 토인(土人)들이 토성을 숙신(肅愼)의 고적으로 여기기에 이 시를 짓는다.”라고 하였다.

형ㆍ양의 옛 직공(職貢)엔 다 노(砮)를 바쳤으니

우의 때에 돌로 무기 만든 일이 있었던가

숙신이라 석노는 대개 우와 연관인데

우의 노는 마침내 중국에 전함 없네

거말이나 좌과는 곳곳에서 얻었으되

악작이랑 양고석은 못 보았도다

공자의 세상에도 역시 이건 없었으니

수리 노를 띠고 와도 사람들이 몰랐다네

이 일은 황당하여 가장 믿기 어렵구나

노를 띠고 어떻게 먼 데를 날아오리

개마산 남쪽이라 일천 리 지역에는

낙랑인지 진번인지 알 수 없고

산천의 도(圖)와 기(記)에도 증빙이 다 없는데

전설을 또 받아들여 숙신씨라 일컫누나

무릇 돌도끼와 돌촉들을

청해의 만곡에서 오다가다 얻는다네

부는 아마도 보형과는 다르지만

촉은 분명 어복[활집]에서 나온 것 같군

돌 성질 금강과 맞설 만큼 예리하고

돌무늬 일고 일어나 오랜 녹빛이 무리졌네

삼백 매가 있어 혹은 직공에 채웠는데

직공에 채웠을 뿐 실제로 쓴 것은 아니었지.

발해 임금 대씨나 윤 시중[윤관(尹瓘]을 보더라도

이 도끼 이 촉으로 전공 거둔 일 없었네

가소롭다 그 당시 오아속이라던가

꿩깃 화살로 어설프게 아이 장난처럼 했다니.

이 돌도끼와 돌촉이 단연코 숙신 것이라면

동이가 대궁에 능하단 게 더욱 상상되네

토성의 유적은 비록 정하기 어렵지만

이 孤證[돌도끼, 돌촉] 있으니 强通할 수는 있네

돌은 아무 말없고 또 아무 표시 없는데

야뢰산 빛만 속절없이 안개만 자욱하다

도끼 끝에 무어라 쓴 글씨도 보기 괜챦고

긴 화살촉 끝에는 홍혈색을 띄고 있네

그래도 나으니, 조천했다는 기린석이

강물빛이 비단같아 주몽과 연관짓는 것보다는.

荊梁舊貢皆貢砮, 禹時以石爲兵無.

肅愼石砮蓋仍禹, 禹砮遂無傳中土.

距末左戈處處得, 未睹愕作羊告石.

孔子之世亦無之, 有隼帶砮人不知.

此事荒渺最難證, 帶砮何以飛遠爲.

蓋馬山南一千里, 樂浪眞番互非是.

山川圖記摠無徵, 又沿稱之肅愼氏.

大抵石斧並石鏃, 尋常得於靑海曲.

斧乃似是異黼形, 鏃若分明出魚服.

石性銛利當金剛, 石紋作作暈古綠.

有三百枚或充貢, 充貢而已非作用.

渤海大氏尹侍中, 未聞此斧此鏃收戰功.

可笑當時烏雅束, 雉羽葫蘆兒戲同.

此斧此鏃斷爲肅愼物, 更想東夷能大弓.

土城舊蹟殊未定, 得此孤訂猶强通.

石不自言又不款, 耶賴山色空濛濛.

長爪疾書亦不錯, 長平箭頭古血紅.

勝似朝天麒麟石, 江光如練訛朱蒙.

추사는 우선 고전과 ?박고도(博古圖)? 등에서 砮에 관한 기록을 조사하여, 그 사용의 사례를 조사한 뒤, 숙신의 砮에 관한 사실을 조사하였다. 제27구 이하에서는 孤證을 증거로 强通하는데 조심하는 考證之學의 방법론(하나만의 증거는 증거가 아니라는 것이 고증지학의 기본 태도이다)을 말하고, 사적 증거를 토대로 상고사를 다시 서술해야 한다는 주장이 드러나 있다.

기린굴과 조천석은 평양의 부벽루(浮碧樓) 아래에 있다고 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동명왕(東明王)이 기린마를 타고 이 굴로 들어가 땅속으로부터 조천석으로 나와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기린석을 두고 그 주위에 햇볓이 비치면 강빛이 비단같다고 하여 朱蒙의 고사와 연결시킴은 訛謬라고 보면서, 석부․석촉의 실물은 그것밖에 남아 있지 않은 孤證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실물로 숙신의 토성을 考證하는 데 强通할 수 있어, 토성을 숙신 토성이라 지목하는 것은 한결 근거 있다고 하였다.

7. 마무리

추사는 예술에서 대상에 속박되지 않는 직관(直觀)과 흥회(興會)를 중시했다. 肌理說과 神韻論 등 청나라의 예술이론에 공감하면서 詩書畵와 禪의 일치를 주장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추사는 정감이 풍부한 시인이었다. 제주도로 귀양 가 있을 때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한 달이나 늦게 듣고는 슬픔 속에서 시(「悼亡」)를 지었다. 그는 슬픔을 말로 표현할 수 없기에 그저 다음 생에 부부가 바꿔 태어나서 내가 죽고 그대가 살아남으면 지금 내 슬픔을 알리라 했다.

어쩌면 달 노파 데리고 가서 염라전에 애원하여

내세에는 남편과 아내, 처지 바꿔 태어나

나 죽고 그대 천리 밖에 살아남아

이 마음 이 마음 슬픔을 그대가 알게 하리.

那將月姥訟冥司(나장월모송명사) 來世夫妻易地爲(내세부처역지위)

我死君生千里外(아사군생천리외) 使君知我此心悲(사군지아차심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