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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作蘭 < 不二禪蘭>--지본수묵 55 * 31센티
1. 不作蘭의 題記 <1> 유마 불이선이란 維摩經 不二法門品에 있는 이야기이다.모든 보살이 禪悅에 들어가는 상황을 설명하는데 최후에 유마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이에 모든 보살들은 말과 글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법이라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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蘭 畵論
1. 不欺心蘭圖의 題記
士寫蘭 亦當 自不欺心 一瞥葉一點瓣 內省不구可以示人 十目所見 十手所指 其嚴乎 雖此小藝 必自誠意正心中來 始得爲下手宗旨 書示佑兒
2. 商佑에게 보낸 畵論 편지 與佑兒 蘭法亦如隸近 必有文字香書卷氣 然後可得 此蘭法 最忌畵法 若有畵法 一筆不作可也 如趙熙龍輩 學作吾蘭而終未免畵法一路 此其胸中 無文字氣故也 今此多紙送來 汝尙不知蘭境趣味 有是多紙之求寫 殊可憤筍寫蘭 不得過三四紙 神氣之相진 境遇之相融 書畵同然而寫蘭尤甚 何由多得也 若如畵工輩 隨應法爲之 雖一筆千紙可也 如此作不作可也 是以畵蘭 吾不肯多作 是汝所嘗見也 今以略干紙寫去 無以盡了來紙 須領其妙可耳 寫蘭必三轉爲妙 今見汝所作 一抽筆卽止 須於三轉處 用工爲佳 凡近日寫蘭者 皆不知此三轉之妙 妄加塗抹耳
아들 상우(商佑)에게 난초 치는 법은 역시 예서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은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또 난법은 그림그리는 법을 가장 꺼리니 만약 화법이 있다면 한 붓도 대지 않는 것이 좋다.조희룡 같은 사람들이 내 난초그림을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 속에 문자기가 없는 까닭이다. 지금 이렇게 많은 종이를 보내왔으니 너는 아직도 난초치는 경지와 취미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이처럼 많은 종이에 그려달라고 하지만 특별히 싹을 토해내서 난초를 그릴 수 있는 것은 서너장의 종이를 지나칠 수 없다.신기가 모여들고 경우가 무르익어야 하는 것은 서화가 모두 같으나 난초가 더욱 심하거늘 어찌 많이 얻을 수 있겠느냐? 만약 화공들과 같이 화법에 따라서 치기로 한다면 비록 한 붓 가지고서라도 천장의 종이에 친다고 해도 가능할 것이다.이와 같이 치려면 치지 않는 좋다.이 때문에 난초를 치는데 있어서는 나는 많이 치는 것을 즐겨하지 아니하니 이 것은 너도 일찌기 보던 바이다.이제 약간의 종이에 그려보내고 보낸 종이에 죄다 그리지는 않았다. 모름지기 그 묘법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난을 치는데는 반드시 삼전으로 묘법을 삼아야하는데 이제 네가 난 친 것을 보니 붓을 한번 쭉 뽑고 곧 끝내 버렸구나. 꼭 삼전하는 것을 힘써 익혔으면 좋겠다. 대체로 요사이 난을 친다는 사람들이 모두 이 삼전의 묘법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찍어바르고 있을 뿐이니라
3,君子文情帖에 題함 寫蘭 當先左筆一式 左筆爛熟 右筆隨順 叉損卦先難後易之義也 君子於一擧手之間 不以苟然 以此左筆一劃 可以引而伸之於損上益下之大義 旁通消息 變化不窮 無往不然 此所以 君子下筆 動輒寓戒 不爾何貴乎君子之筆 此鳳眼象眼 通行之規 非此無以爲蘭 雖此小道 非規不成 況進而大於是者乎 是以一葉一瓣 自欺不得 又不可以欺人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是以寫蘭下手 當自無自欺始 趙子固寫蘭 筆筆向左 蘇齋老人 屢稱之 난을 치는데는 마땅히 왼 쪽으로 치는 한 법식을 익혀야한다. 왼 쪽으로 치는 것이 익숙하게되면 오른 쪽으로 치는 것은 따라가게 된다. 군자는 손 한번 드는 사이에도 구차스러워서는 아니되는 것이니 이 왼쪽으로 치는 한 획으로서 가히 이끌어 "윗 것을 덜고 아랫 것을 보태는 것"을 대의로 하되 곁으로 여러 가지 소식에 통달하면 변화가 무궁하여 가는 곳마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가 붓을 대면 움직일 때마다 문득 계율에 들어맞는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군자의 필적을 귀하게 여기겠는가? 이 봉안이니 상안이니하여 통행하는 규칙은 이 것이 아니면 난을 칠 수 없으니 비록 이것이 작은 법도이긴 하지만 지키지 않으면 이룰 수 가 없다. 하물며 나아가서 이보다 더 큰 법도가 어디있겠는가? 이로서 한 줄기의 잎,한 장의 꽃 잎이라도 스스로 속이면 얻을 수가 없으며 또 그 것으로서 남을 속일 수도 없으니 열 사람의 눈이 보고 열 사람의 손이 가리키니 엄격한 것 아닌가? 이로서 난초를 치는데 손을 대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조자고가 난을 침에 붓마다 왼쪽으로 향하였으니 소재〈 翁方綱>노인이 여러 번 칭찬하였다. 君子文情帖은 추사의 화론이다.
4.畵論
추사의 여러 묵란도와 畵論 중에서 중요한 화론이 들어있는 글로 중복되지 아니하게 선택하여 예시하였는데, 위의 그림과 편지에서 볼 수 있듯이 추사가 강조하는 畵論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心境 측면에서 문자향과 서권기를 주장하였다. 소동파가 만권의 책을 읽은 후에야 구양순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는 고사에서 서권기는 많은 책을 읽어야 은연중에 서권기가 흘러 나오고 문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문자에서 나오는 향기가 몸에서 우러나온다는 의미이다.이는 굳건한 필력을 가지고 솔직한 심정으로 글씨,그 중에서도 특히 예서 쓰듯이 난을 치라는 것으로서 조선의 손꼽히는 화가 조희룡의 난에대하여 서권기가 없고 그림의 기법이 들어있으므로 한 획도 배우지 말라고 아들에게 말한 것에서도 그가 이 부분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둘째 방법론에서 오로지 三轉 1가지를 강조하면서도 君子文情帖에서는 左出葉과 鳳眼,破鳳眼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 법이 없으면 이미 난이 아니라고 하였다. 모든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이고 모든 법칙을 털어버린 후, 텅 빈 마음으로 내키는 대로 란을 치라고 여러차례 강조하면서도 최소한의 기법은 지킬 것을 아울러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추사는 30여년간 난을 즐겼는데 옛 名人의 경지에 오른다는 것이 몹시 어려움을 뒤늦게야 깨우쳤다고 하였다. 그의 여러 편지글과 각종 화론에 해당하는 題跋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고도의 정신세계를 구현하므로서 모양에 개의치않고 心境을 구현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20여년간 난을 치지 않았다. 수 많은 세월 동안 농축해두었던 표현이길래 자신이 스스로 화제로 적은 "20년만의 우연한 외출" 부작란은 그렇게 솔직한 모습으로 우리를 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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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秋史 金正喜(1786~1856)의 생애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 본관 경주. 자 元春. 호 阮堂·秋史·禮堂·詩庵·果坡·老果. 예산 출생. 23세인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世子侍講院說書·충청우도암행어사·成均館大司成·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24세 때 燕京에 가서 당대의 巨儒 阮元·翁方綱·曹江 등과 교유, 經學·金石學·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예술은 시·서·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미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淸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54세인 40년(헌종 6) 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48년 풀려나왔고, 65세인 51년(철종 2) 헌종의 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학문에서는 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黃草嶺에 있는 신라 진흥왕 巡狩碑를 考釋하고, 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혔다. 또한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廣州 奉恩寺에서 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문집에 《阮堂集》, 저서에 《金石過眼錄》 《阮堂尺牘》 등이 있고, 작품에 《墨竹圖》 《墨蘭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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維摩經
鳩摩羅什이 번역한 대승불교 경전. 정확한 명칭은 《維摩詰所說經》이며 줄여서 《유마힐경》 《유마경》이라 한다. 유마힐은 주인공인 거사로서 리차비족의 수도인 베살리에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부호라고 하나 실존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경은 3회 14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유마거사가 병으로 앓아 눕자 부처는 지혜 제일인 사리불을 비롯하여 가섭·수보리 등을 병문안 가게 권하나 그들 모두 유마거사의 높은 법력이 두려워 문병가기를 꺼린다. 결국 문수보살이 가게 되는데 유마거사와의 대화에서 문수보살은 대승의 깊은 교리인 不二법문을 유마거사의 침묵을 통해 깨우치게 된다는 내용이다. 또한 유마가 본래 병이 없지만 중생들이 병을 앓기에 보살도 병을 앓는다고 설명하여 중생들과 동심일체가 된 보살의 경지를 나타내었으며, 유마거사 가족들의 소재를 묻자 지혜가 아버지이고 방편이 어머니라고 하여 유마거사가 이미 대승보살의 최상의 경지에 도달하였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경전 성립 당시의 재가불자들의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이 경에 대한 한역은 7가지가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3가지로 支謙 역의 《유마힐경》 2권, 구마라습 역의 《유마힐소설경》 3권, 玄裝 역의 《說無垢稱經》 6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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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신 작품은 다산시문집 제3권 시(詩)에 들어 있습니다.
시의 제목은 특별하게 없고 다음과 같은 해설이 붙어 있습니다. 가을밤 죽란사 모임에서 시 한 수가 지어질 때마다 남고(南皐)가 날 위해 낭송을 했는데 그 목소리가 맑고도 애절하여 사람을 눈물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장난삼아 절구(絶句)를 읊어본 것이지 원래 시를 꼭 쓰려는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뜻이 거칠고 졸작들이 많다. 원래는 19수였는데 지금 다 지워 버리고 10수만을 남겼다
검양강 북쪽에 갈바람이 일더니만 / 黔陽江北動秋風 망해루 서쪽으로 올 기러기 내려왔네 / 望海樓西來早鴻 돌아가는 배를 타고 동협으로 가지 말라 / 莫上歸舟走東峽 오색구름 짙은 곳에 왕궁이 있느니라 / 五雲深處有王宮 벽오동 가지에 갈바람이 불어오니 / 秋風吹入碧梧枝 서북 하늘에 뜬 구름이 조각조각 옮겨가네 / 西北浮雲片片移 제발이지 진길료1)를 울며 있게 하지 말라 / 愼莫啼留秦吉了 단산에 늙은 봉이 너무나도 슬프단다 / 丹山老鳳不勝悲 쌍쌍이 날다가는 제각기도 나는 제비 / 雙燕雙飛復各飛 단청해 둔 들보를 가을이면 떠난다네 / 淸秋故與畫梁違 금년에는 분홍실을 발에 매 두지 않았으니 / 今年不用紅絲繫 봄바람에 올지 말지 그 누가 알겠는가 / 誰識春風歸未歸 미음 동쪽 언저리에 강물은 활등 같고 / 渼陰東畔水如彎 수도 없는 청산이요 그리고 또 벽산이지 / 無限靑山與碧山 지금도 생각나네 마당촌 버들 아래서 / 尙憶馬當村柳外 낚싯배에 몸을 싣고 푸른 물결 타던 일이 / 釣舟搖曳綠波間 용문산 북쪽 월계 서쪽에 / 龍門山北粤溪西 두 서너 마지기 척박한 밭이 있고 / 却有石田三兩畦 무궁화 울타리에 초가집도 그대로인데 / 茅屋槿籬閒自在 가을이면 나뭇잎이 바윗길에 가득하다네 / 秋來木葉滿巖蹊 복희 신농 떠난 후로 세속이 야박하여 / 羲農去矣俗云淆 아침이면 돕던 사이가 저녁에 벌써 노발대발 / 朝作魚呴暮虎虓 술독 앞에서 뻔질나게 크게 쓴 글자들이 / 樽前大筆淋漓字 결국은 유생의 절교2)로 변해 버리지 / 道是劉生廣絶交 삼각산 중봉 이름 백운대인데 / 三角中峯號白雲 하늘의 생황 소리가 달 속에서 들려온다네 / 九天笙樂月中聞 그 옛날 갈바람에 남고와 갔을 때는 / 秋風憶與南皐去 의기가 등등하여 온 세상을 흔들 만했지 / 逸氣凌凌駕入垠 그 옛날 봄바람에 예주에서 배를 타고 / 春風憶上蕊州船 꽃과 버들 속에서 홀로 자기도 했었는데 / 獨宿江花江柳邊 그때는 남고와 짝이 되지 못했기에 / 不與南皐作仙侶 황려성 밖에서 쓸쓸함을 느꼈다네 / 黃驪郭外思凄然 백로와 갈매기는 원래가 단짝이라 / 瘦鷺輕鷗本自雙 창강 찾아가는 것이 십 년 두고 꿈이라네 / 十年歸夢在滄江 무슨 일로 물이 잦고 서리도 내렸건만 / 如何水落霜淸後 성남의 찢어진 창만 지키고 있다던가 / 猶守城南破竹牕 서리 속의 묏부리들 깎아지른 옥이런가 / 霜天華嶽玉嶙峋 말끔한 그 기운이 사백 년 내내라네 / 淑氣澄明四百春 푸른산 깊은 곳을 찾아가지 말지어다 / 休向碧山深處去 한양 사람 이내 된들 무엇이 어떠리 / 何如長作漢陽人 1) 진길료 : 새 이름.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능력이 있는 새로 일명 구관조(九官鳥)라고도 함. 2) 유생의 절교 : 금방 사귀었다가 금방 절교하는 변덕. 북제(北齊)의 유적(劉逖)이 조정(祖珽)과 교의가 긴밀하고 조정의 딸을 자기 동생 아내로 맞기까지 하였는데, 뒤에 조정이 조언심(趙彦深) 등을 몰아내려 할 때 유적과 동모한 일이 제대로 안 맞자 조정은 그를 오해하여 유적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유적이 자기 아우를 보내 이혼까지 하는데 이르렀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