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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東坡의 張良의 留侯論 중에서-崔天凱

solpee 2010. 6. 17. 06:25

추이톈카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외교통상부 천영우 제2차관에게 선물한 액자. “천하에 큰 용기가 있는 자는 갑자기 어떤 일을 당해도 놀라지 않으며, 까닭 없이 해를 당해도 화를 내지 않는다. 이는 그의 마음에 품은 바가 크고, 뜻이 심히 원대하기 때문이다”라는 소동파의 시를 담아 천안함 사건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수진

소동파는 “인간의 감정으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 있을 때 평범한 사람은 치욕을 당하면 칼을 빼들고 몸을 던져 싸우지만, 이는 용감하다고 할 수 없다(人情有所不能忍者 匹夫見辱 拔劍而起 挺身而鬪 此不足爲勇也)”고 운을 뗀 뒤 추이 부부장이 쓴 시구를 이어갔다.

과거에도 중국은 당시나 송시 등을 이용해 속내를 전달하는 ‘한시 외교’를 구사해왔다. 2004년 2월 베이징에서 열린 2차 6자회담에서 리자오싱(李肇星) 당시 중국 외교부장은 “이 엄숙한 짧은 순간에(這一凝重的瞬間) 우리가 평화·우호를 주제로 한 교향곡을 써 연주하기를 기원하네(我虔敬地祝福 把和平與友誼的交響譜成)”라는 요지의 자작 한시를 만찬 석상에서 낭송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선물을 전달받은 천 차관은 “추이 부부장이 원래 소동파의 ‘유후론’을 좋아해 좌우명으로 삼아온 끝에 오랜 친구인 내게 선물한 것으로 안다”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留侯論 - 蘇軾

한나라 건국 공신 유후 장량에 대해 논술함 - 송나라 소동파


古之所謂豪傑之士者,必有過人之節。人情有所不能忍者,匹夫見辱,拔劍而起,挺身而鬥,此不足為勇也。天下有大勇者,卒然臨之而不驚,無故加之而不怒。此其所挾持者甚大,而其志甚遠也。

 

호걸이란 범인보다 뛰어난 면이 있기 마련이다. 필부가 욕을 당하여 칼을 빼어들고 싸우는 것은 진정한 용기가 아니다. 큰 용기를 가진 자는 급박한 일에 처하여도 놀라지 않고 이유없이 욕을 당해도 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품은 포부가 크고 뜻이 심히 원대하기 때문이다.

夫子房受書於圯上之老人也,其事甚怪;然亦安知其非秦之世,有隱君子者出而試之。觀其所以微見其意者,皆聖賢相與警戒之義;而世不察,以為鬼物,亦已過矣。且其意不在書。

 

장자방이 황석공에게서 책을 받은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은군자가 출현하여 그를 시험한 것이다. 황석공의 참 의도는 책을 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當韓之亡,秦之方盛也,以刀鋸鼎鑊待天下之士。其平居無罪夷滅者,不可勝數。雖有賁、育,無所復施。夫持法太急者,其鋒不可犯,而其末可乘。子房不忍忿忿之心,以匹夫之力,而逞於一擊之間;當此之時,子房之不死者,其間不能容髮,蓋亦已危矣。千金之子,不死於盜賊,何者?其身之可愛,而盜賊之不足以死也。子房以蓋世之材,不為伊尹、太公之謀,而特出於荊軻、聶政之計,以僥倖於不死,此圯上老人之所為深惜者也。是故倨傲鮮腆而深折之。彼其能有所忍也,然後可以就大事,故曰「孺子可教」也。

 

진나라 말기에 장자방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필부와 같은 힘으로 진시황을 저격하려 하였다. 장자방이 세상을 덮을 만한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이윤이나 강태공 같이 지모를 쓰지 않고 형가나 섭정 같이 자객 행세를 했다가 위기에 처하였다. 황석공은 이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일부러 거만한 자세로 무례한 일(다리 밑에 신발을 떨어뜨리고 주워오게 함)을 시켜 장량의 욱하는 성질을 꺽어 주려 했다. 장량이 분노를 참아냈기에 마침내 황석공이 '너는 가르칠만하구나'라고 말했던 것이다.

楚莊王伐鄭,鄭伯肉袒牽羊以逆;莊王曰:「其君能下人,必能信用其民矣。」遂捨之。句踐之困於會稽,而歸臣妾於吳者,三年而不倦。且夫有報人之志,而不能下人者,是匹夫之剛也。夫老人者,以為子房才有餘,而憂其度量之不足,故深折其少年剛銳之氣,使之忍小忿而就大謀。何則?非有生平之素,卒然相遇於草野之間,而命以僕妾之役,油然而不怪者,此固秦皇之所不能驚,而項籍之所不能怒也。

 

황석공은 장자방에게 넉넉한 재주가 있지만 그의 도량이 부족함을 알고 청년 장자방의 과격한 성격을 꺾어서 작은 분노를 참아서 큰 계획을 성취할 수 있게 하려 했다.

觀夫高祖之所以勝,而項籍之所以敗者,在能忍與不能忍之間而已矣。項籍唯不能忍,是以百戰百勝,而輕用其鋒;高祖忍之,養其全鋒,以待其弊,此子房教之也。當淮陰破齊而欲自王,高祖發怒,見於詞色。由此觀之,猶有剛強不忍之氣,非子房其誰全之?

 

한 고조 유방이 승리한 이유나 서초패왕 항우가 패한 이유는 바로 이 인내력의 유무에 있는 것이다. 회음후 한신이 제나라를 정복하고 스스로 제왕을 칭하려 할 때 한고조 유방은 크게 분노하였지만 장자방의 간언을 받아들여 인내하였다.

太史公疑子房以為魁梧奇偉,而其狀貌乃如婦人女子,不稱其志氣。而愚以為,此其所以為子房歟!

 

사기(史記)의 저자 태사공 사마천은 장자방의 모습이 씩씩한 사내답지 않고 여성스러워 보임을 의아해 했을 뿐 장자방의 기개를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부드러움, 인내심)이야말로 장자방의 장자방다움이 아니겠는가?

 

문자예술의 과거와 현재보기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 편액 <잔서완석루>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 편액 <판전>

 

                                    소전 손재형 편액 <동방제일선원>

 

                                   일중 김충현 용문사 편액 <지장전>

 

 

                                    초정 권창륜 현판 <영남대로>

 

                                학정 이돈흥 대흥사 현판 <청운당>

 

                                   소헌 정도준 경복궁 현판 <흥례문>

 

                                  효봉 여태명 간판 <전주역사박물관>

 

                                        송민 이주형 타이틀 <추노>

                            

 

                                      도정 권상호 제자 <국보문학>

 

                             가은 최루시아 포스터 <서예세상 회원전>

 

                                        석인 강수호 상호 <버섯마당>

 

                                    지원 박양준 화장품 상품명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