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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詩

solpee 2010. 5. 17. 06:07

詩話,`행복한 시읽기` 
                     - 정 민(한양대 국문과 교수)
             
                                                         

1. 한시 비평과 詩話


어느 시대고 많은 작품이 생산되면 으례 이의 옥석을 구분하려는 비평의 욕구가 뒤따르게 마련이다. 범람하는 작가와 작품의 홍수 속에서 악화와 양화를 구별해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문학이 펼쳐질 수 있게 하기 위해 비평 활동이 전개된다. 그런데 이 악화니 양화니 하는 개념이나 문학의 바람직한 전개 방향이란 것이 고정불변일 수 없다는 데서 시대마다, 또 평자마다 개성이 드러나고 견해가 갈리게 된다.


오늘날 시단에 비평이 존재하듯, 과거에도 한시를 중심으로 한 비평활동은 꾸준히 펼쳐져 왔다. 과거의 비평활동은 크게 選集類의 간행을 통한 방법과, 詩話의 저술을 통한 방법이 있었다. 전자가 규모가 크고 간접적이라면, 후자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문학사의 움직임이 활발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저술되고 있다.


시화란 문자 그대로 시와 관계된 이야기이다. 명칭이 모호하듯, 그 다루고 있는 범위 또한 총체적이고 광범위하다. 우리나라에서 시화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고려 중기 이후이다. 《파한집》 《보한집》 《백운소설》 《역옹패설》등의 표제가 말하고 있듯, 형성기 시화는 시에 대한 전문적이고 비평적 안목의 제시이기 보다는 한가한 여가에 시와 관계된 읽을만한 이야기 거리를 모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조선 시대로 접어들면서 점차 전문적 양상을 띄게 되어, 작품에 대한 구체적 품평이나 한 작가의 작품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이해, 또는 詩作에 대한 이론적 견해 표명 등으로 심화되는 양상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중기 이후에는 역대의 시화를 한데 묶어 총서로 간행하는 시도가 생길 정도로 성황을 보게 되었다. 숙종 때 홍만종이 펴낸 《시화총림》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홍만종은 《시화총림》에서 역대의 저술 중 시화만을 따로 추려 모두 24종 900칙에 가까운 방대한 내용을 집대성하였다. 이는 《동인시화》와 같은 독립된 저술은 모두 제외한 것이었다. 이밖에도 이와 유사한 類編書 들이 구한말까지 계속 간행되어, 현재 수십 백종에 달하는 시화가 전해지고 있다.  


시화는 말하자면 `행복한 시읽기`의 소산이다. 짧은 지면의 제약으로 우선 오늘날 음미해 봄직한 두어 가지 화제만을 가지고 그 一斑을 맛보기로 한다. 비록 그렇다 해도 온 솥의 국 맛은 한 숟갈만 맛 보아도 알 수 있는 법이다.


2. 詩魔의 죄상


"네가 오고부터 모든 일이 기구하기만 하다. 흐릿하게 잊어 버리고 멍청하게 바보가 되며, 주림과 목마름이 몸에 닥치는 줄도 모르고, 추위와 더위가 몸에 파고드는 줄도 깨닫지 못하며, 계집종이 게으름을 부려도 꾸중할 줄 모르고 사내종이 미련스러운 짓을 하더라도 타이를 줄 모르며, 동산에 초목이 우거져도 깎아낼 줄 모르고, 집이 쓰러져가도 고칠 줄을 모른다. 재산이 많고 벼슬이 높은 사람을 업수이 보며, 방자하고 거만하게 언성을 높여 겸손치 못하며, 면박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며, 여색에 쉬이 혹하며, 술을 만나면 행동이 더욱 거칠어지니, 이것이 다 네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이규보가 <시 귀신을 몰아내는 글.驅詩魔文>에서 詩魔 즉 시 귀신을 힐난하는 대목의 일부이다. 시마가 내게 들어오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시마가 내게 온 뒤로부터 나타난 이상한 증상들이다.


이규보는 다시 시 귀신의 구체적인 죄악상을 이렇게 나열한다. 첫째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데, 붓만 믿고 찧고 까불게 만드는 죄, 둘째 오묘하고 신비한 이치를 파헤쳐 기밀을 누설하면서도 당돌하여 그칠 줄 모르고,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죄, 셋째 삼라만상의 천만 가지 형상을 닥치는대로 하나도 남김 없이 붓 끝으로 옮겨 내어 겸손할 줄 모르게 하는 죄, 넷째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기만 하면 즉시 공격하여 상 주고 벌 주기를 제멋대로 하며, 정치를 평론하고, 만물을 조롱하며 뽐내고 거만하게 만드는 죄, 다섯째 목욕을 싫어하게 하고 머리 빗기를 게으르게 하며, 괜스레 신음 소리를 내고 이맛살을 찌푸리게 만들어 온갖 근심을 불러들이는 죄가 그것이다. 멀쩡하던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시 귀신이 있으니 이를 아니 쫓고 어찌할 것이랴.


예전 시화를 보면 이러한 시마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이 이현욱이란 사람에게 붙었던 시마이다. 그는 시마에 둘러 씌인 뒤 짓는 시마다 기막힌 佳句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 뒤에 시마가 떠나고 나자 단 한 글자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허균의 《학산초담》에 나오는 이야기다. 연산조의 최연이란 이도 <逐詩魔>란 글을 통해 시마의 죄악상을 낱낱히 고발하고 있다. 이로 보면 강신무가 접신하듯, 시마가 사람에게 들면 그는 신들린 듯이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며 시만 생각하고, 시만 쓰게 되며, 그 결과 쓰는 시마다 뛰어난 작품 아닌 것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시마`란 놈은 무슨 이마에 뿔이 달린 귀신이 아니라, 다름 아닌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드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규보가 적시하고 있는 `시마의 죄상`이란 것도 되읽어 보면, 나는 이렇듯 오로지 시만 생각하며 산다는 그야말로 전업 시인으로서 누리는 특권에 대한 `즐거운 비명`일 뿐이다. 평소 얼마나 시에 골몰하며 생활의 매 순간 순간을 시와 관련지었으면, 스스로 시 귀신에 씌었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을까.


옛 사람의 시구 중에는 "다섯 글자의 시귀를 읊조리기 위해, 일생의 심력을 다바치었네. 吟成五字句, 用破一生心"나, "安이란 한 글자를 읊기 위하여, 여러 개의 수염을 비벼 끊었네. 吟安一箇字, 撚斷幾莖 "라 한 것이 있다. 또 "두 구절을 삼년 만에 얻고서, 한 번 읊조리매 눈물이 주루룩 흐르네. 兩句三年得, 一吟雙淚流"나, "시 읊조리는 괴로움 알고 싶은가. 가슴 속에 가을 서리가 있는듯 하네. 欲識吟詩苦, 秋霜若在心"과 같은 구절을 보면, 옛 사람이 한 구절의 시를 얻기 위해 고심참담하던 광경이 눈 앞에 선하게 떠오르는 듯 하다. 두보 같은 이는 아예 "말이 사람을 놀래키지 못하면 죽어도 그만 두지 않으리. 語不驚人死不休"라고까지 만장의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으니, 이래 저래 일상사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시와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었던 옛 사람들의 시정신을 읽을 수 있다.


이 시마를 다소 점잖게 표현하여 詩癖이라고도 한다. 글자 그대로 시에 痼疾이 든 것이다. 송나라 때 매요신 같은 시인은 아예 〈詩癖詩〉를 지었는데, "인간의 시벽이 돈에 대한 욕심보다 더하니, 애간장 졸이며 시귀 찾느라 몇 해 봄을 보냈던고. 호주머니 비어 가난해도 개의하지 않았고, 읊은 것에 새로운 시귀 많은 것만 기뻐했었다.人間詩癖勝錢癖, 搜索肝脾過幾春. 囊 無嫌貧似舊, 風騷有喜句多新"고 하여, 시에 고질이 든 자신의 삶을 술회하기도 하였다.
 

3. 시를 쓰면 궁해진다


허구 헌 날 이렇듯 시만 생각하다 보니, 그 생활이야 일러 무엇 하겠는가. 시화를 빈번하게 장식하는 화제 가운데 "시가 사람을 능히 궁하게 한다. 詩能窮人"는 말이 있다. 시가 무슨 조화가 있어 사람을 궁하게 할까마는, 폐백사하고 시만 생각하고 앉았으니, 궁함이 뒤따라오는 것은 또 당연할 법하다.


어느 여류 시인이 자신은 시를 쓸 때 먼저 커튼을 치고 촛불을 켜고 실연의 기억과 같은 슬픈 일을 생각하노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거니와, 대체 문학은 모든 것이 충족된 만족 속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무언가를 상실하거나 무참하게 버려진 느낌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나는 법이다. 중국의 《사명시화》에는, "요즘 두보의 시를 배우는 자를 보면 부유하게 살면서도 궁상스런 근심을 말하고, 태평한 시절을 만나서도 전쟁의 고초를 말하며, 늙지도 않았으면서 늙은이 흉내를 내고, 병도 없으면서도 끙끙댄다."고 하여, 시인들의 유난스런 `무드 잡기`를 꼬집은 바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두보를 배우면 가난해 진다고 해서 아예 두시를 배우지 못하게 한 경우까지 있었다. 커튼 치고 촛불을 켠다고 좋은 시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진실이 없이 자기 최면의 위장된 수식으로 이루어진 시는 교언영색의 자기기만일 뿐이다. 이에 그친다면 시인은 기능적인 언어조립공에 불과할 것이다.


트릴링은 현대의 문화인들이 정치적으로는 부와 쾌락을 원하면서도, 예술적 실존적으로는 내핍과 괴로움을 원하는 모순적인 심리상태에 놓여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고통 속에서 오히려 만족을 찾는 이러한 또 하나의 본능적 충동이 결과로 시인에게 궁곤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 바로 `詩能窮人`의 생각이다. 《지봉유설》에 보면 시장에서 떡을 팔며 노래를 잘 부르는 자가 있었는데, 갑자기 돈이 많이 생기자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옛 시조에도, "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 할샤. 일러 못다 일러 불러나 푸돗던가.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 보리라"고 한 것이 있다.


또 시화에는 이 詩能窮人과 함께 "시는 궁해진 뒤에 좋아진다. 詩窮而後工"이란 말도 자주 보인다. 이 말은 구양수가 매성유의 시를 평하면서 그 서문에서 말한 이래로 널리 퍼졌는데, 부유하고 넉넉할 때 지은 시보다 궁곤 속에서 지어진 시가 훨씬 더 좋다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하여도 수긍이 간다. 시인의 생활이 궁할수록 묘사하는 바가 더욱 더 예리하고 섬세하게 되는 것은 심리적 보상작용의 결과이기도 하다.


불가에서도 "주리고 추운 속에서 道心이 생겨난다. 飢寒發道心"는 말을 하거니와, 대체 窮의 상황은 시인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 터이다. 그러니 잃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되찾으려는 열망이 어느 때 보다 고조될 것이고, 이에 따라 예전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들이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닌 채 낯설게 다가올 것은 당연하다. 그의 감정은 극히 예민한 촉수가 되어 주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르나아르는 "사람은 권태 속에서 가장 열심히 산다. 마치 귀를 쫑긋 기울인 토끼처럼"이라고 말한 바 있다. 권태 속에서 가장 열심히 산다는 이 역설적인 말은, 궁곤 속에서 시인의 정신이 오히려 맑고 투명하게 타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를 담고 있다.


그런데 詩能窮人은 시를 쓰는 행위의 결과로 궁하게 된다는 말이고, 詩窮而後工은 궁해진 뒤에 시가 좋게 된다는 말이다. 이로 보면 이 두 말은 서로 선후가 반대가 되어 의미가 다른데도, 실제 시화에서는 혼동해서 쓰고 있어 흥미롭다. 어느 것이 먼저인가. 窮이 먼저인가, 아니면 詩가 먼저인가. 물론 정해진 결론은 없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窮이 먼저든 시가 먼저든 시인은 늘 窮狀을 달고 다니는 직업이라는 사실만은 꼭같다. 실제로도 詩魔나 詩癖이 시인을 궁하게 만든 것인지, 궁한 속에서도 시만 짓다 보니 詩魔가 찾아 들어 시에 고질이 들린 것인지는 명확한 구분이 어렵다.


예전 굴원은 참소와 아첨이 임금의 밝음을 가려 바른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의로움이 행해지지 않음을 한탄하며 《초사》를 지어 그 심회를 펼쳐 보이고, 마침내 상강에 빠져 죽고 말았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고서 그 분노와 수치를 창조적 에너지로 삼아 불후의 걸작 《사기》를 완성시켰다. 이를 `發憤抒情`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대개 마음 속에 쌓인 憤을 발하여 응어리 진 情을 펼친 것이어서, 그 말이 인정의 말하기 어려운 것을 살펴 얻었던 것이다. 시인이 궁곤을 달고 다닌다는 말은 가난해야 시인의 자격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결핍의 불우한 상황 속에서도 결코 주저물러 앉지 않는 불굴의 정신, 남들이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주변 사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 속에서만이 시인의 정신은 밝게 빛난다는 말일 뿐이다. 궁곤이나 결핍은 시인의 정신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충분조건일 뿐, 能詩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4. 말이 씨가 되어


흔히 "글은 바로 그 사람. 文如其人"이라는 말을 한다. 대개 시에는 그 사람의 기상이 절로 스며들게 되니, 그 시의 한 구절로도 그 사람의 궁달을 점칠 수가 있다. 이를 달리 氣象論이라고도 한다. 옛 사람들은 언어의 힘을 믿었다. 우리 속담에도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시화를 읽다 보면 의외로 이런 예화와 자주 접하게 된다. 비유가 조금 유감스럽긴 하지만, 예전 어느 가수가 "한 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라는 노래를 부르더니, 실제 그렇게 되고 만 것 같은 예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앞서 무심히 한 말이 뒷 날의 예언이 되는 경우를 따로 詩讖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대개 이는 언어의 주술적 힘을 믿어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됨을 경계한 것이다. 입에서 나온다고 해서 다 말이 아닌 것처럼, 생각도 없이 되는대로 쓴 한 편의 시가 어느 날 재앙이 되어 내게 돌아오는 법이다. 말 한 마디, 시 한 구절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우홍적이란 이가 일곱 살에 어른이 `老`와 `春`자로 聯句를 짓게 하니, 읊기를 "늙은이 머리 위의 눈은, 봄 바람 불어도 녹지를 않네. 老人頭上雪, 春風吹不消"라 하였다.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으나 식자는 이를 보고 그가 요절할 것을 알았다. 《어우야담》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머리 위에 눈이 삶의 근심이 가져다 준 얼룩이라면, 봄 바람이 불어와 마땅히 이를 녹여 주어야 옳다. 그런데 그는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이미 녹일 수 없는 삶의 근심을 말하고 있으니, 그렇게 말한 것이다.


또 《수촌만록》에 보면 안명세가 아홉 살 때 그의 아버지가 진달래를 따서 연적에 끼워 놓고 시를 짓게 하니, 즉석에서 짓기를 "진달래 꽃 한 떨기, 푸른 산 중에서 와서, 연적에 생애를 부치었으니, 타향 나그네 신세와 한가지로다. 杜鵑花一악, 來自碧山中. 硯滴生涯寄, 他鄕旅客同"라고 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이 시를 보고 울었다. 그 시에 나타난 뜻이 처량하고 괴로워 멀리 현달할 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뒤에 그는 과연 사화에 연루되어 20대의 젊은 나이에 화를 당하고 말았다.


《지봉유설》에는 예전 중국의 유명한 기생 薛濤가 어렸을 때 우물가 오동을 읊은 시를 소개하고 있다. 시에 이르기를, "가지는 온갖 새들을 다 맞이하고, 잎새는 지나는 바람을 전송한다네. 枝迎南北鳥, 葉送往來風"라고 하였다. 또 송나라 때 어떤 소녀가 있었는데 들꽃을 노래하기를, "다정한 목동들이 자주 머리에 꽂고, 주인 없는 벌과 꾀꼬리 멋대로 깃들어 자네. 多情草木頻簪 , 無主蜂鶯任宿房"라 하였다. 결국 뒤에 모두 기생이 되었는데, 대저 시란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 시귀가 그의 운명을 이미 예견하였다는 것이다.


또 정승 尙震은 도량이 넓고 커서 남의 장단점을 말하는 법이 없었다. 판서 吳祥이 시를 지었는데, "희황 때의 좋은 풍속 땅을 쓴듯 사라지고, 봄바람 술잔 사이에만 남아 있구나. 羲皇樂俗今如掃, 只在春風酒杯間"라고 하였다. 그러자 상진이 "어찌 그리 박절하게 말하는가?"하며, "희황 때의 좋은 풍속 지금도 남았으니, 봄바람에 술잔 사이를 살펴 보게나. 羲皇樂俗今猶在, 看取春風酒杯間"라고 고쳤다. 두 글자 씩을 바꾸었을 뿐인데, 시의 의경은 판연히 달라졌다. 두 사람의 사고 방식의 차이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역시 기상이 같지 않은 까닭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 방식의 차이가 삶의 방식의 차이와 무관할 수 없는 것은 또 자명하다.

 
 5. 말하지 않고 말하기


종래 시화에 보이는 한시 감상 태도는 세밀한 분석보다 총체적인 감상을 중시하여, 두 세 마디로 자신의 직관적인 느낌을 말하고 있을 뿐 논리적 분석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오늘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모호한 느낌을 갖게 되지만, 이는 그들의 문학 인식이 낮거나 구체적이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1920년대 이미지즘 시인 아치볼트 매클리쉬는 〈시의 작법. Ars Poetica〉이란 시에서 "시는 의미해서는 안된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 A Poem should not mean: but be"고 하고, 또 "시는 사실 그 자체를 말해서는 안되고 등가적이어야 한다. A Poem shuold be equal to: Not true"고 말하였는데, 이 말은 시의 언어는 직접 의미를 지시하는 대신 이미지를 통해 간접화된 방식으로 의경을 전달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흔히 현대시에서 말하는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iative)의 이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서구시에서 이러한 시 언어에 대한 인식이 도입되는 것은 19세기 중엽 이후이다.


그러나 한시에서 이러한 원칙은 이미 천 년이 넘는 문학적 전통 속에서 불변의 준칙으로 엄격하게 지켜져 왔다. 이는 다시 말해 시인은 할 말이 있어도 직접 말하지 말고 사물을 통해 말하라는 것이다. 아니 사물이 제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것이다. 시는 어떤 사실이나 사물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시는 언어 그 자체로 살아 숨쉬는 생물체여야 한다. 시인은 외롭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면서도 독자를 외롭게 만들어야 한다. 괴롭다는 말을 해서도 안된다. 그래도 독자가 그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만약 시인이 나서서 직접 시시콜콜한 자기 감정을 주욱 늘어 놓는다면, 그것은 넋두리나 푸념일 뿐 시일 수는 없다.  


돌아가던 개미가 구멍 찾기 어렵겠고                         返蟻難尋穴
돌아오던 새는 둥지 찾기 쉽겠구나.                          歸禽易見巢
복도에 가득해도 스님네 싫어 않고                           滿廊僧不厭
한 사람 속객만이 많음을 싫다 하네.                         一個俗嫌多


위 시는 무엇을 노래한 것인가. 개미는 왜 구멍을 찾지 못하며, 새는 둥지를 왜 쉽게 찾는가. 복도에 가득한데도 스님네가 싫어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속객은 왜 이것이 많음을 싫어할까. 위 시는 鄭谷이란 이가 낙엽을 노래한 것이다. 낙엽이 쌓이는 형상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시의 모든 상황은 석연해 진다. 그러나 스물 여덟자 어디에도 낙엽과 관계되는 말은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落葉歸根이라 했다. 한 인연이 끝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낙엽만이 아니다. 우리네 인생도 또한 그러하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스님네가 이를 싫어하지 않는다 함은 담긴 뜻이 유장하다. 그러나 길이 낯선 나그네는 온통 뒤덮인 낙엽 때문에 길을 잃을까 근심스럽다. 이러한 정황 속에 蕭條한 가을날의 풍경이 어느덧 가슴을 가득 메운다.


예전 송 휘종황제는 그림을 몹씨 좋아하여 詩의 한 구절을 畵題로 주어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한번은 "어지러이 솟은 산, 옛 절을 감추었네. 亂山藏古寺"란 구절이 화제로 제출되었다. 화가들은 어지러이 솟은 봉우리의 한 구석에 고색창연한 절의 모습을 그리는데 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어떤 사람은 절 지붕이 숲 사이로 얼핏 보이는 광경을, 어떤 사람은 숲 위로 솟아 오른 절의 탑을 그렸다.


그런데 정작 일등으로 뽑힌 작품에는 화면 어디에도 절의 모습은 없었다. 다만 숲 아래 조그만 소로길이 나 있고, 그 길로 중 하나가 물을 길어 올라가는 모습을 그렸다. 중이 물을 길어 올라가니 그 위 어디께엔가 분명 절이 있을 것이나, 산이 너무 깊어 보이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절을 그리라 했는데, 절 대신 물 길러 나온 중을 그리는 것, 이것이 바로 말하지 않고 말하기이다.  


은촉불 가을 빛은 병풍에 찬데                           銀燭秋光冷畵屛
가벼운 비단 부채로 반디불을 치누나.                    輕羅小扇搏流螢
하늘 가 밤빛은 물처럼 싸늘한데                         天際夜色凉如水
견우와 직녀성을 오두마니 바라보네.                     坐看牽牛織女星


杜牧의 〈秋夕〉이란 시이다. 깊어 가는 가을 밤, 창을 열고 방 안으로 날아드는 반디불을 부채로 치면서 하늘을 올려다 보는 여인이 있다. 가을 밤의 애상적 분위기가 물씬한 작품이다. 그러나 시어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더욱 깊은 심층적 의미를 캐낼 수 있다. 우선 은촉불, 그림 병풍, 비단 부채 등은 넉넉한 경제적 형편을 말하여 그녀가 귀한 신분의 여인임을 보였다. 그녀는 손에 부채를 쥐고 있다. 부채는 여름날엔 없지 못할 소중한 물건이지만, 가을이 되면 아무 짝에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이 `가을 부채`는 그녀가 버림 받은 신세임을 말해준다. 한 때 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나 이제는 쓸모 없이 잊혀진 그녀, 그녀의 창엔 반디불이 날아들고 있다. 반디불은 ?은 풀더미 같은 황량한 곳에서 날아다닌다. 그 반디불이 그녀의 방안까지 날아들고 있으니, 그녀의 거처가 매우 황량하고 생활이 처량함을 알 수 있겠다. 님이 찾지 않으니 그 꽃밭엔 잡초만이 우거져 있을 것이다. 또 그녀는 반디불을 부채로 후려 침으로써 자신을 향해 끊임 없이 달려드는 처량함과 황량함을 몰아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물처럼 싸늘한 하늘은 밤이 어느 덧 깊었음을 말하며, 앉아서 별을 바라 본다 함은 아예 그녀가 잠 잘 생각을 버리고 근심에 겨워 긴긴 가을 밤을 새우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녀가 보는 별은 무엇인가. 견우와 직녀성이다. 그들은 그래도 일년에 칠월 칠석 하루는 만날 수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신세는 어떠한가. 님은 한 번 떠나신 뒤로 돌아올 줄 모르고, 이 기나긴 기다림이 끝없이 이어져도 다시 님을 만날 날은 영영 올 것 같지가 않다. 이러한 초조감과 절망감이 견우와 직녀성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 위에 서리어 있다. 대개 시인은 이같이 진진한 사연을 단지 28자 안에 농축시켜 놓은 것이다. 만일 이러한 내용을 시시콜콜히 다 이야기해 버린다면 여기에 무슨 여운과 함축의 울림이 남겠는가.


7. 남는 이야기
 

김부식과 정지상은 문장으로 한 때에 명성이 나란하였다. 한번은 정지상이 다음과 같은 시구를 지었다.


절에서 독경소리 끝나자 마자                                 琳宮梵語罷
하늘 빛 유리처럼 깨끗해지네.                                天色淨琉璃


독경소리가 맑게 하늘로 울려 퍼지니, 그 소리에 씻긴 듯 하늘 빛이 유리와 같이 맑아졌다고 했다. 청각을 시각으로 옮긴 절묘한 포착이 아닐 수 없다. 본시 독경소리와 맑아진 하늘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시인은 독경소리에 쇄락해진 마음을 맑아진 하늘에서 새삼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감적 심상의 교묘한 결합과 행간에 의미를 감추는 심층화의 수법은 한시가 아니고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심오처이다. 이를 본 김부식이 이 구절을 좋아 해서 정지상에게 그것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으나 정지상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김부식은 정지상에게 원한을 품어 결국 그를 죽이게 되었다고 한다.《백운소설》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시 한 구절 때문에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였다는 것은 그야말로 설화적 발상이지만, 또 한편으로 시에 대한 고인의 유별난 집착과 애호를 읽게 하는 측면도 있다.


劉希夷가 저 유명한 "해마다 해마다 꽃은 그 모습이건만, 한해 한해 갈수록 사람은 늙어 가네. 歲歲年年花相似, 年年歲歲人不同"란 시구를 지었는데, 그 장인 宋之問이 이 글귀를 사랑하여 자기에게 주기를 간절히 빌었으나 주지 않으므로 성내어 흙주머니로 눌러 죽였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또 《지봉유설》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이래 저래 시에 대한 고인들의 집착은 유난스럽기까지 하다.


역대의 시화는 이러한 유난스러운 집착이 빚어낸 정채로운 보석이다. 한시는 언어 표현의 함축미나 정서 표출의 세련미에서 다른 어떤 시가 양식보다 우수하다. 한시의 풍부한 표현미와 그 안에 담긴 선인들의 숨결은 가꾸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소중한 문학 유산이다. 먼지 쌓인 역사의 뒤켠에 그대로 방치하여 두기 보다, 그것들에 생기를 불어 넣고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과 인식이 안타까운 오늘이다. 한시가 지닌 높고 깊은 미학은 기교주의 형식주의에 찌든 오늘의 시단에도 새롭고 건강한 지평을 열 수 있으리라 본다.


이글에서 추려본 몇 개의 삽화들은 전체 시화의 풍부하고 다채로운 내용 가운데 극히 일부일 뿐이다. 지면의 제약으로 다루지 못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좀더 깊이 있는 접근을 해 보면 한시의 미학에 대한 이해가 더 용이할 듯도 싶다. 

 

 

作詩, 즐거운 괴로움


 

예술에서 上達境界로 진입하려면, 잗단 技巧 쯤은 까맣게 잊어야 한다.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榮辱도 得失도 生死까지도 마음에 두어서는 안된다. 그때 예술은 비로소 참 모습을 드러낸다.

 

藝術과 狂氣

대상을 향한 미친듯한 몰두 없이 위대한 예술은 이룩되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하찮은 기교라 할지라도 자신을 온전히 잊는 몰두가 있어야만이 성취를 이룰 수 있다. 예로부터 예술의 천재들에게는 스스로도 주체하기 힘든 狂氣가 있다. 인간의 熱情이 뿜어내는 거친 호흡과, 다른 사람을 빨아들이는 흡인력이 그들 안에서는 느껴진다.

崔興孝는 조선 초의 유명한 名筆이다. 일찍이 과거를 보러 갔는데, 답안을 쓰다 보니 우연히 한 글자가 王羲之의 글씨와 같게 되었다. 넋을 잃고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 뚫어지게 그 글자만을 바라보던 그는, 답안지를 차마 제출하지 못하고 그냥 품에 넣고 돌아오고 말았다. 우연히 같게 써진 한 글자 앞에서 그는 立身出世의 꿈마저도 까맣게 잊고 말았던 것이다. 李澄은 조선 중기의 화가이다. 어려서 다락 위에 올라가 그림을 익히고 있는데, 집에서는 간 곳을 몰라 사방을 찾아 헤매다가 사흘 만에야 그를 찾았다. 아버지는 노하여 볼기를 쳤다. 李澄은 울면서 눈물을 찍어 새를 그렸다. 宗室 鶴山守는 名唱으로 이름 났다. 산에 들어가 노래 공부를 할 때면, 한 곡을 부를 때마다 모래 한 알을 신에다 던져, 신이 모래로 가득차야 돌아왔다. 한번은 도적을 만나 죽게 되었는데, 바람결을 따라 노래를 불렀더니 도적 떼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연암 박지원의 〈炯言挑筆帖序〉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디 그뿐인가. 秋史 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草書에 능했던 名筆 李三晩은 일생에 먹을 갈아 구멍을 낸 벼루 만도 여러 개였다고 한다. 낙수물이 돌을 뚫는다더니, 벼루 여러 개가 구멍 나도록 그는 열심히 먹을 갈고 또 썼다. 師曠은 전국시대의 유명한 樂師였는데, 그는 소리를 듣는데 방해가 된다하여 자신의 눈을 찔러 멀게 하였다. 예술도 이쯤 되면 그 이르러 간 경지를 보통 사람은 측량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술에서 上達境界로 진입하려면, 잗단 技巧 쯤은 까맣게 잊어야 한다.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榮辱도 得失도 生死까지도 마음에 두어서는 안된다. 그 때 예술은 비로소 참 모습을 드러낸다.

 

不知老之將至, 늙음이 오는 것도 모르고

고려 때 金黃元이란 이가 평양 감사가 되어 浮碧樓에 올랐는데, 누각에 걸린 고금의 題詠이 성에 차는 것이 없는지라 詩板을 다 떼어 불사르게 하고는 하루 종일 난간에 기대 괴로이 읊조렸으나 다만,

장성 한 면에는 넘실대는 강물이요
넓은 들 동편에는 점점이 산일래라.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라는 두 구절을 얻고는, 뜻이 고갈되어 마침내 통곡하고 돌아왔다는 일화가 역대 시화에 두루 전한다.

역시 고려 때 유명한 시인 康日用은 백로를 가지고 시를 지으려고, 비만 오면 짧은 도롱이를 입고 성문 밖 天水寺 남쪽 시내 위로 가서 황소 등에 걸터 앉아 이를 관찰하였다. 날마다 수염을 꼬며 고심하기 백 일이 다 되어 문득
푸른 산 허리를 날며 가르네. 飛割碧山腰
"
라는 한 구를 얻고는, "오늘에야 고인이 이르지 못한 것을 비로소 얻었다. 뒤에 마땅히 이를 잇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과연 뒤에 李仁老가 "교목의 꼭대기에 둥지를 틀고. 占巢喬木頂"를 그 앞에 얹어 짝을 맞추었다.

조선 중기의 시인 申光漢은 일찍이 낮잠을 자다가 소나기가 연꽃 화분을 지나는 소리에 잠을 깨어 문득

꿈이 서늘터니 연 잎에 비가 쏟아지네. 夢凉荷瀉雨

라는 시구를 얻었다. 그 뒤 몇 해가 지나도록 그 대구를 얻지 못하여, 율시 한 수를 이루었으나 그 행만은 빈칸으로 비워두고 반드시 절묘한 대구를 얻어 채우려 하였다. 朴蘭이 이 말을 듣고, "옷이 젖자 돌에선 구름이 이네. 衣濕石生雲"가 어떠냐고 했으나, 신광한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죽을 때까지 이 구절의 대구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상의 예화들은 선인들의 시 한 구절에 대한 애착과 노력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권필은 조선 중기의 시인인데, 평생 벼슬길에 몸담지 않았다. 이를 안타까이 여겨 벼슬을 권하는 벗이 있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古書 여러 권이 있어 홀로 즐기기에 족하고, 시는 비록 졸렬하지만 마음을 풀기에 족하며, 집이 비록 가난해도 또한 막걸리를 댈만은 하니, 매양 술잔 잡고 시를 읊조릴 때면 유연히 스스로 얻어 장차 늙음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니, 저 이러쿵 저러쿵 하는 자들이 내게 있어 무엇이리요?"

그는 타고난 시인 기질을 어쩌지 못해, 불의는 결코 좌시하지 못했다. 부딪치는 일마다 氷炭不相容의 형국을 빚었다. 다만 시를 지을 때만은 유연히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조차 까맣게 몰랐으니, 그는 삶의 의미를 시 속에서 찾았던 생래의 시인이었다. 〈戱題〉라는 시에서 그는,

시는 고민 걷어가 때로 붓을 잡았고
술은 가슴 적셔줘 자주 잔을 들었지.

詩能遣悶時拈筆
酒爲汀胸屢擧?

라 하여,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지으며 타는 가슴 속의 번민을 토로했던 자신의 삶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뒷날 그는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풍자한 시 한 수 때문에 왕의 노여움을 입어, 곤장을 맞고 귀양길에 올랐다가 杖毒을 추스리지 못해, 한창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야말로 시에 살고 시에 죽었던 시인이다.

당나라 때 周樸이란 이는 경물과 만나면 괴로이 시귀를 찾으며 읊조렸다. 산에서 해가 지는데 돌아오기를 잊은 적도 있었다. 만약 좋은 시귀를 얻게 되면 더욱 신이 나서 즐거워 했다. 한번은 들판에서 등에 나무를 지고 오는 나무꾼을 만났는데, 그를 꽉 잡으며 소리 지르기를, "잡았다!"고 하였다. 나무꾼은 너무 놀라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그만 나무를 진 채로 땅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때 마침 순찰 돌던 나졸이 그 광경을 보고 나무꾼을 도적인 줄 알고 붙잡아 신문하였다. 周樸이 급히 달려와 말하기를, "내가 저 나무꾼을 보자마자 갑작스레 기막힌 영감이 떠올라 좋은 시구를 얻었소.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를 붙잡았던 것이오."라 하고는, 지은 시를 읊조리기를,

자손들은 어디메서 한가롭길래
솔잣나무 대신해서 땔감 되었나.
子孫何處閑爲客
松柏被人代着薪

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尤?의 《全唐詩話》에 보인다.

당나라의 천재 시인 李賀는 매일 아침 파리한 나귀를 타고 집을 나서는데, 나귀 등에는 낡아 헤진 비단 주머니가 하나 매달려 있었다. 길을 가다가 시상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메모하여 주머니 속에 넣곤 하였다. 저물어 돌아오면, 그 어머니가 계집 종을 시켜 주머니를 꺼내 보게 하였다. 써 놓은 것이 많으면 문득 말하기를, "이 얘가 심장을 다 토해내어야만 그만 두겠구나."하며 한숨 쉬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李賀는 그 메모지를 가져다가 먹을 정성스레 갈아 원고지에 또박또박 써서는 다른 주머니 속에 보관하였다. 술에 크게 취하거나 초상이 있는 날이 아니면 언제나 이같이 했고, 이미 지난 원고는 다시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렇듯 作詩에 지나치게 골몰한 나머지 건강을 해친 그는 27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죽기 전에 한 비단 옷 입은 사람이 나무 판 하나를 가지고 와서는 그에게 말하기를, "옥황상제께서 백옥루가 완공되어 그대를 불러 상량문을 짓게 하고자 하신다."하였는데, 과연 얼마 뒤에 죽었다. 이 뒤로 세상에서 아까운 인재가 요절하면, 천상에 또 백옥루가 완공된 모양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당나라 때 劉希夷가 일찍이 〈白頭吟〉을 지었는데, 그 한 연에 이르기를,

올해 꽃 지자 낯빛도 시어지니
내년 꽃 피면 다시 누가 있으리오.
今年花落顔色改
明年花開復誰在

라 하였다. 짓고 나서 생각하니, 시의 내용이 매우 불길한지라 이를 지워 버리고 다시 읊으니,

해마다 해마다 꽃은 비슷하건만
해마다 해마다 사람은 같질 않네.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라고 하였다. 그래도 詩想이 역시 펴지질 않자, "死生은 운수가 있는 것이다. 어찌 이까짓 빈 소리에 연연하랴!"하고는 앞서 지웠던 것까지 모두 남겨 두었다. 그의 장인 宋之問이 사위가 지은 위 구절을 너무 아낀 나머지, 자기에게 줄 것을 간절히 청하였다. 劉希夷는 장인에게 짐짓 그러마고는 했으나 끝내 주지는 않았다. 이에 자기를 속였다 하여 격분한 송지문은 하인을 시켜 흙주머니로 눌러 사위를 죽여 버리고 말았다. 그의 나이 서른도 못된 때의 일이다. 시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낳은 패륜의 살인극이다. 《唐才子傳》에 전한다. 사실 여부야 차치하고라도, 과연 시에 대한 이같은 집착과 애착이 있고서야 진정으로 시를 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周興嗣가 하루 저녁 사이에 〈千字文〉을 만들어 올렸는데 수염과 머리털이 다 세어 버렸다. 돌아와서는 두 눈을 한꺼번에 실명하고, 죽을 때에는 마음이 丹田을 떠난 것 같았다 한다. 謝靈運은 반일 동안에 시 백 편을 짓고서 갑자기 이가 열 두 개나 빠졌으며, 孟浩然은 눈썹이 모두 떨어졌다고도 한다. 魏裳은 《楚史》 76권을 저술하고는 심혈이 모두 닳아서 죽고 말았다. 《지봉유설》에 실려 있다. 창작한다는 것은 이같이 피를 말리는 일이다.

 

눈을 상처 내고 가슴을 찌르듯

韓愈는 〈貞曜先生墓誌銘〉에서 孟郊의 시에 대해, "그 시를 지음에 미쳐서는, 눈을 상처 내고 가슴을 찌르 듯 하였다. 及其爲詩, ?目鉥心"고 하여, 준열한 시정신을 기린 바 있다. 실제 孟郊는 한 편의 좋은 시를 짓기 위해, 칼로 자기 눈을 찌르고 가슴을 도려내는 것 이상의 고통을 달게 여겼던 시인이다. 그의 시에,

밤새 읊조려 새벽까지 쉬잖으니
괴로이 읊조림, 귀신조차 근심하리.
어찌하여 제 스스로 한가치 못하는가
마음이 몸과는 원수 되었네.
夜吟曉不休
苦吟鬼神愁
如何不自閑
心與身爲仇

라 한 것이 있다. 오죽하면 몸이 마음을 원수로 알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마는, 시를 향한 마음이 골수에 깊이 박힌 痼疾이 되고 보니 자신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는 푸념이다. 〈宿欒城驛却寄常山張書記〉에서는,

일경이 다 가고 삼경 되도록
이별의 맘 읊으려도 되지를 않네.
一更更盡到三更
吟破離心句不成

라 하여 詩作에 골몰타가 밤을 꼬박 지새는 심경을 노래하였고, 또 〈秋宿山館〉에서는,

산 속 여관 앉아서 새벽을 기다리니
기나긴 밤 시 짓느라 정신을 괴롭혔네.
山館坐待曉
夜長吟役神

라 하였다. 〈秋日閑居寄先達〉에서는,

백년 인생, 뜻 맞는 일 없어도 괜찮지만
하루라도 시를 짓지 않고는 못견디겠네.
乍可百年無稱意
難敎一日不吟詩

라 하였고, 또 〈山中寄友人〉에서는,

살 도리 찾을 재주 없는 것이 아닐세
이 모두 시 짓느라 바쁜 때문이지.
不是營生拙
都緣覓句忙

라 하여, 생활의 무능까지도 시 외에 딴 곳에는 잠시도 정신을 팔 수 없는 탓으로 돌리고 있다. 〈苦吟〉이란 작품에서는 숫제,

살아선 한가한 날 결코 없으리
죽어야만 시를 읊조리지 않겠네.
生應無暇日
死是不吟時

라고 하여, 죽기 전에는 끝이 없을 주체할 길 없는 창작에의 열정을 토로하고 있다. 말하자면 孟郊는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시를 위해 살았던 시인이다. 시를 빼고 나면 그의 삶에서 남는 것은 하나도 없게 되니, 목숨을 걸고 시를 썼던 시인이 바로 그다.

이 孟郊와 나란히 일컬어지는 시인에 賈島가 있다. 송나라 蘇軾은 〈祭柳子玉文〉에서 "맹교는 차고, 賈島는 수척하다"고 하여, '郊寒島瘦'의 말이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이 賈島 또한 孟郊 이상으로 苦吟의 詩人으로 유명하다. 그는 3년을 沈吟한 끝에 〈送無可上人〉의 頸聯에서,

홀로 걸어가는 연못 아래 그림자
자주 쉬어가는 나무 가의 몸.
獨行潭底影
數息樹邊身

이란 得意句를 얻고는 감격한 나머지 그 아래에다가 다시 시 한수를 써서 得句까지의 사연을 注내어 적었다.

두 구절을 삼 년 만에 얻고서
한 번 읊조리매 눈물이 주루룩 흐르네.
벗들이 좋다고 기리지 아니하면
고향 산 가을에 돌아가 눕겠노라.
兩句三年得
一吟淚雙流
知音如不賞
歸臥故山秋

득의의 시구를 얻고 환호작약 하다가, 끝내 落淚에 이르는 詩心이 갸륵하기까지 하다. 더욱이 자신의 이 시를 안목있는 이들이 칭찬하지 아니하면 아예 죽어 고향 산에 묻히고 말겠노라 하였으니, 그 자부가 또한 대단하다.

《唐才子傳》은, 賈島가 골똘히 作詩에 빠져들 때에는 앞에 王公貴人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였으며, 마음은 아득한 하늘 위에서 놀고, 생각은 끝없는 속으로 들어 갔었다고 적고 있다. 또 "비록 길 가거나 머물거나 자리에 누울 때나 밥먹을 때나 괴로이 읊조리기를 그만두지 않았다"고도 하였다. 일찍이 절둑거리는 노새를 타고 우산을 쓰고서 長安의 거리를 가로질러 가는데, 가을 바람이 매서워 길 위에 낙엽을 불어가므로 홀연,

낙엽은 장안 길에 가득하건만
가을 바람은 渭水로 불어오누나.
落葉滿長安
秋風吹渭水

란 구절을 얻었다. 기쁨을 가눌 길 없었던 그는, 다짜고짜 大京兆 劉棲楚의 집에 뛰어들었다가 하루 밤 구금되어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석방되었다.

또 한번은 말을 타고 李凝의 幽居를 찾아 가다가,

 

한가롭게사노라니 사귄 이웃 드물고     閑居隣竝少

풀 우거진 지름길은 멀리 황원으로 가는 데 草徑入荒遠

새는 연못 가 나무에서 잠들고
스님은 달빛 아래 문을 미누나.
鳥宿池邊樹
僧推月下門

라는 시귀를 얻었다. 그리고는 '推'로 할까 '敲'로 할까 결정치 못하고, 손짓 발짓 하며 가다가 그만 京兆尹 韓愈의 수레를 가로 막고 말았다. 좌우의 하인들이 賈島를 韓愈 앞에 무릎 꿇게 하고 힐문하니, 賈島가 사실대로 이야기 하였다. 수레를 멈추고 한참을 서 있던 韓愈는 "敲字가 낫겠네"하고는, 함께 돌아가 詩道를 논하며 布衣의 사귐을 맺었다. 그리고는 아예 중 노릇을 그만 두고 과거에 응시케 하였다. 두 글자가 다 좋지만, '推'라 하면 문을 그저 삐꺽 하고 밀며 들어가는 것이니 李凝과 미리 약속이 되어 있음이요, '敲'라 하면 똑똑 노크하는 것이니 서로 약속이 없는 불시의 방문이 된다. 못 가에 새도 잠든 밤의 적막을 타고 들려오는 소리는 과연 삐꺽하고 문을 미는 소리 보다는, 청명하게 울려 퍼지는 똑똑 소리가 더 어울림직 하다. 이때에는 孟郊가 이미 세상을 뜨고 없었으므로 韓愈는,

孟郊가 죽어 북망산에 묻힌 뒤
해와 달 바람 구름, 문득 한가해졌네.
문장이 끊어질까 하늘이 염려하여
賈島를 다시 내어 인간에 있게 했네.
孟郊死葬北邙山
日月風雲頓覺閑
天恐文章渾斷絶
再生賈島在人間

라는 시를 지어 주기까지 하였다. 賈島는 매년 그믐날이 되면 반드시 그 한 해 동안에 지은 작품을 책상 위에 모아 놓고, 향을 살라 두 번 절하고는 술을 부어 빌기를, "이것이 내 한 해 동안의 苦心함이다."라 하며, 취토록 술 마시며 노래 불렀다고 한다.

 

가슴 속에 서리가 든 듯

《葉石林記》란 책에는 송나라 때 陳師道의 일화가 실려 전한다. 그는 산수를 노닐다가 시상이 떠오르면 곧 돌아와서 이불을 머리 끝까지 푹 뒤집어 쓰고 침상에 누워 버린다.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알면, 즉시 고양이나 개는 멀리 쫓고 애기는 안고 어린애는 데리고 가서 이웃집에 맡긴다. 그리고는 그가 시를 완성하기를 기다린다. 시가 완성된 뒤라야 감히 다시 애도 데려오고 고양이와 개도 불러올 수 있었다. 어떤 때는 사흘 씩 방에 쳐박혀 나오지 않는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시인이 고심참담한 결과만을 놓고 좋으니 나쁘니, 잘 되었네 못 되었네 말들 하지만, 정작 그 갈피 갈피에 서린 고초는 간과해 버리기 일쑤이다. 古人이 作詩의 괴로움을 읊은 시 몇 구를 살펴 보자.

杜甫는 〈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이란 작품에서,

내사 성벽이 佳句를 탐닉하여
말이 남을 놀래키지 못하면 죽어도 그치잖으리.
爲人性僻耽佳句
語不驚人死不休

라고 만장의 기염을 토한 바 있고, 盧延讓은

한 글자를 알맞게 읊조리려고
몇 개의 수염을 비벼 끊었던가.
吟安一箇字
撚斷幾莖?

라 하였는데, 그 작시에 골몰하느라 수염을 배배 꼬며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절로 미소를 떠올리게 한다. 方幹은

다섯 자의 시귀를 읊조리느라
일생의 심력을 다 바치었네.
吟成五字句
用破一生心

라고 하였다. 글자 하나 구절 하나를 놓고 左顧右度, 千思萬慮의 고심을 거듭하던 옛 사람들의 詩作 자세를 알 수 있다. 杜牧은,

시 읊조리는 괴로움 알고 싶은가
가슴 속에 가을 서리 서린듯 하네.
欲識吟詩苦
秋霜若在心

라 하였다. 시로 태운 안타까운 가슴은 얼마나 뜨거울 것인가 마는, 그간의 고초를 생각하면 차라리 가슴 속에 차디찬 가을 서리를 품은 듯 하다 했다. 그런데도 이 말이 전혀 엄살이나 과장으로 비치지 않는 것은 스스로에게 냉혹하리만치 준엄했던 옛 시인의 시정신 때문일 터이다. 李白은

묻노니 어찌하여 그다지 말랐더뇨
다만 이제껏 시 짓는 괴로움 때문일테지.
爲問如何太瘦生
只爲從前作詩苦

라 하여, 作詩에 골몰하느라 바싹 야위어버린 벗의 모습을 哀傷한 바 있다. 이 말이 있은 이후 시를 쓰다 야윈 것을 따로 '詩瘦'라 일컫기도 한다. 고금의 시 가운데 창작의 괴로움을 토로한 것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顧文?는

한 글자의 온당함을 구하느라고
긴긴 밤의 추위를 참아 견뎠네.
爲求一字穩
耐得半宵寒

라 했고, 杜荀鶴은

엄동설한 나그네 옷 죄다 잡히고
시구를 가다듬다 머리 다 셋네.
典盡客衣三尺雪
煉精詩句一頭霜

라 하였으며, 齊己는

좋은 시귀 찾기를 범 찾듯 했고
알아줌을 만나면 신선 만난듯 했지.

覓句如探虎
逢知似得仙

라 하였다. 劉昭禹는 〈風雪詩〉에서

구절마다 깊은 밤에 얻은 것이니
마음은 하늘 밖에서 돌아온다오.
句句夜深得
心從天外歸

라 하여 밤마다 作詩에 골몰하느라 넋이 아득한 하늘 밖까지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즐거운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裵說은

入定에 든 스님처럼 괴로이 읊조리니
시귀를 얻어야만 공을 이루리.
苦吟僧入定
得句始成功

라 하여, 아예 詩道 三昧를 禪定에 든 高僧의 三昧境에다 견주기까지 하였다. 이렇듯 미친듯한 몰두 끝에 얻어진 시이고 보니, 그 시에 대한 애착 또한 유난스럽기 짝이 없다.

 

참을 수 없는 가려움, 技榻

歐陽修는 글을 지으면 벽에다 붙여 놓고 볼 때마다 이를 고쳤는데, 마지막 완성되고 나면 처음의 것은 한 글자도 남지 않은 적이 많았다고 한다. 蘇東坡가 〈赤璧賦〉를 지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단숨에 이를 지은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를 짓느라 버린 초고가 수레 석 대에 가득하였다 했으니 그간의 고초를 헤아려 무엇하랴. 《事文類聚》에 나온다.

宋子京이란 이가 "나는 번번이 예전에 지은 문장을 볼 때마다 그것을 미워하여 반드시 불태워 버리고 싶어진다"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梅堯臣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그대의 글이 진보하는 것입니다. 나의 시 또한 그러합니다." 梅堯臣은 앞서 여러 시인이 그랬듯 詩에 痼疾이 들었던 시인으로, 그는 아예 〈詩癖〉을 제목으로 시를 지은 것이 있다.

인간의 詩癖이 돈 욕심 보다 더하니
애간장 졸이며 시귀 찾느라 몇 봄을 보냈던고.
주머니 비어 가난해도 개의하지 않았고
새로운 시귀 많은 것만 기뻐했었다.
다만 괴로이 층층의 하늘을 치달았을 뿐
곤궁 속에서 저승 갈 일은 따지지도 않았다.
人間詩癖勝錢癖
搜索肝脾過幾春
囊?無嫌貧似舊
風騷有喜句多新
但將苦意摩層宙
莫計終窮涉暮津

시에 대한 고질도 이쯤 되면 扁鵲이 열이라도 고칠 방도는 없게 되고 만다. 行住坐臥에 시와 무관한 것이 없고 보니, 시를 짓는다는 것은 이들에게 있어 매 순간 순간을 살아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셈이다.

韓愈는 시를 향한 자신의 병적인 몰두를 두고 "슬프다. 유익함도 없는 일에 정신을 낭비하니. 可憐無益費精神"라고 자조한 바 있다. 이수광은 또 《지봉유설》에서, "대체로 사람의 정신을 피폐케 하고 眞氣를 소모하게 만드는 것은 시라는 魔物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간혹 감흥이 일어난 때에 짓는 것은 좋으나 어찌 마땅히 남에게 좇아 나의 심신의 알맹이를 손상하겠는가."라는 충고를 남기기까지 하였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을 알면서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시인이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주체하기 힘든 표현 욕구를 옛 사람들은 '技榻'이란 말로 표현했다. '榻'이란 가려움증을 말한다. 아무리 긁어도 긁어지지 않는 가려움이 있다. 이런 가려움은 어떤 연고나 내복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쓰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표현욕'이 바로 技榻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어, 정신을 피폐케 하고 眞氣를 온통 소모해 가면서까지 旬鍛月鍊, 시구의 조탁에만 힘 쏟게 하는가.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떠날 수 없게 만드는 魔物이 있으니, 옛 사람들은 이를 일러 詩魔라 했다. 李奎報 또한 梅堯臣과 마찬가지로 〈詩癖〉이란 제목의 긴 시를 남긴 바 있다.

나이 이미 칠십을 지나 보냈고
지위 또한 三公에 올라 보았네.
이제는 시 짓는 일 놓을만도 하건만
어찌하여 능히 그만 두지 못하는가.
아침엔 귀뚜라미처럼 읊조려 대고
저녁에도 올빼미인양 노래 부르네.
어찌할 수 없는 詩魔란 놈이
아침 저녁 남몰래 따라 와서는,
한 번 붙어 잠시도 놓아주지 않아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
날이면 날마다 心肝을 도려내
몇 편의 시를 쥐어 짜내지.
내 몸의 기름기와 진액일랑은
다 빠져 살에는 남아 있질 않다오.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리나니
이 모습 정말로 우스웁구나.
그렇다고 놀랄만한 시를 지어서
천년 뒤에 남길만한 것도 없다네.
손바닥을 부비며 홀로 크게 웃다가
웃음을 그치고는 다시 읊조려 본다.
살고 죽는 것이 필시 시 때문일 터이니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렵도다.

年已涉縱心
位亦登台司
始可放雕篆
胡爲不能辭
朝吟類??
暮嘯如鳶?
無奈有魔者
夙夜潛相隨
一着不暫捨
使我至於斯
日日剝心肝
汁出幾篇詩
滋膏與脂液
不復留膚肌
骨立苦吟?
此狀良可嗤
亦無驚人語
足爲千載貽

撫掌自大笑
笑罷復吟之
生死必由是
此病醫難醫

아쉬울 것 없는 일흔을 넘긴 노인이 피골이 상접하도록 詩作에만 몰두하는 가긍한 정황을 적고 있다. 죽고 사는 것이 시에 달려 있다 했으니 이쯤 되면 병도 중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시 때문에 생긴 증세를 自家 진단하는 마당에서도 시로써 그 처방을 내리고 있으니, 과연 시를 떠나서는 단 하루도 삶의 보람은 없게 되고 말 것이 아닌가. 자신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詩魔 때문이라 하였는데, 이 詩魔란 놈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 자세히 소개하기로 하겠다.

金得臣 또한 苦吟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시에 몰두할 때면 멍하니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아내가 한번은 점심 상에 상치를 얹어 내 오면서 일부러 초장을 놓지 않았다. 작시에 골몰한 그는 밥을 먹으면서도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아내가 초장이 없는데 싱겁지도 않느냐고 묻자, 그는 "응응! 모르겠어." 했더란다. 《東詩話》에 보인다. 그도 〈詩癖〉시 한 수를 남기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 내 성벽이 시 짓기를 좋아하여
시 지어 읊을 제면 글자 놓기 망설이네.
끝내 의심 없어야만 비로소 통쾌하니
일생의 이 괴로움 알아줄 이 그 누구랴.
爲人性癖最耽詩
詩到吟時下字疑
終至不疑方快意
一生辛苦有誰知

한 글자라도 바로 놓이지 않으면 마음에 쾌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평생 스스로를 이렇게 괴롭히니, 그 사이의 괴로움을 누가 알겠느냐는 넋두리다. 이어 그는 "아! 오직 아는 자라야 이러한 경계를 더불어 말할 수 있으리라. 지금 사람들은 얕은 배움으로 경솔하게 시를 지으면서도 남을 놀래킬 말만 지으려 든다. 또한 어리석지 않은가?"라는 말을 덧붙였다. 《終南叢志》에 보인다.

 

개미와 이

일찍이 높은 산에 올라 城市를 굽어 보니 마치 개미굴 같았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높은 데서 바라보니 참으로 한번 웃을 만 했다. 산이 城市보다 높다한들 능히 얼마나 되랴마는, 그런데도 이미 이와 같으니, 하물며 진짜 신선이 허공 속에 있으면서 티끌 세상을 굽어 본다면 또 어찌 다만 개미굴이겠는가?

허균의 《閒情錄》에 나오는 말이다. 실제로 옛 사람이 步虛登空하여 下界를 조감하는 遊仙詩에는 이러한 광경을 노래한 구절이 있다. 김시습은 〈凌虛詞〉에서,

굽어보니 땅 덩어리 너무도 아득한데
대붕은 잘 안 뵈고 하루살이만 우글대네.
下視塊蘇嗟渺渺
大鵬飛少恰?多

라 하였고, 林悌는 〈效謫仙體〉에서

아래로 東華 땅을 내려다 보니
아득히 다만 누런 먼지 뿐.
下視東華土
茫然但黃埃

이라 한 바 있다.

근교 산에 올라가 시가지를 굽어 보고 있노라면, 그 움직이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저 안에서 복작대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이 가소롭기도 하다. 그럴 때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은 마치 구름 위에 신선인양 통쾌한 호연지기를 심어주기에 족하다. 대개 시인들이란 산 꼭대기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자이다. 그러면서 산 아래에서 헐고 뜯고 싸우는 인간들의 작태를 조소하고 비웃고, 때로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는 자이다. 그런데 연암 박지원이 벗에게 보낸 엽서에 보면 또 이런 내용이 나와 있다.

내가 일찍이 藥山에 올라 그 都邑을 굽어보니 그 사람과 물건이 달리고 뛴다는 것이 땅에 엎어져 꿈틀꿈틀 하는 듯하여, 마치 개미굴의 개미와 같아 능히 한 번 훅 불면 흩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마을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바라보게 한다면, 언덕을 더위잡고 바위를 따라 덩굴을 잡고 나무를 안고 꼭대기에 올라, 망녕되이 스스로 높고 큰 체 하는 것은 또한 머리의 이가 머리카락에 붙어 있는 것과 무에 다르겠는가.

그러고 보면 시인들의 산 아래를 향한 연민에 찬 탄식이나, 조소 넘치는 비아냥도 저 아래 사람들이 보기에는 같잖기 그지 없는 일이다. 재미 있지 않은가. 한 사람은 위에서 아래를 보며 개미와 같다고 하고, 훅 불면 날려가 버릴 것 같다고 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다고 하는데, 아래서는 또 위를 보며 머리카락 위에서 비틀대는 이 같다고 하고, 괜히 저 혼자만 고상한 체 한다고 하고, 꼴같지 않게 논다고 눈을 흘기니 말이다.

사실 실용적이기로만 말한다면 시처럼 아무 짝에 쓸모 없는 것도 없고, 시인처럼 무능한 인간들도 없다. 공연히 세상 고민을 혼자 다 짊어진 듯이 끙끙대지만, 실제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金宗直은 〈永嘉連魁集序〉에서, "문장은 잗단 技藝이다. 詩賦는 더더욱 문장의 보잘 것 없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앞뒤 헤아리지 않고 보면 詩란 것은 小技인 문장 중에서도 가장 하급에 속하는 것이 된다. 丁若鏞은 또 〈五學論〉에서 "문장학이란 우리 道의 커다란 해독이다. 대저 이른 바 문장이란 것은 무엇이던가? 문장이란 허공에 걸려 있고 땅에 퍼져 있으니, 어찌 바람을 보고 달려가 붙잡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하고, 나아가 세상에 보탬이 되지 않는 글은, 한 평생 읽고 외워 본들 슬프고 우울하기만 하지 천하와 국가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문학의 심각한 해독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李珥는 〈仁物世藁序〉에서 "말이란 것은 소리의 정채로운 것이고, 文辭란 것은 말의 정채로운 것이며, 詩란 것은 文辭의 빼어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권필도 "시라는 것은 말의 정채로운 것이다"라고 한 바 있다. 이렇게 보면 詩는 또 인간의 언어 가운데 가장 빛나는 보석이다. 사실 세상에는 쓸모만으로 따지면 맥 빠지는 일들이 많다. 춤이니 그림이니 하는 것들도 쓸모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사람을 배부르게 해주지도 않고, 그다지 기쁘게 해주지도 못한다. 마라톤 주자가 42.195Km를 달린다 한들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황영조의 쾌거에 마음 설렌다.

오늘날 말하는 唐나라 때의 시의 융성은 앞서 여러 제가의 시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약간은 미친듯한 열기와 목숨을 건 집착 속에서 이룩된 것이다.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두 눈을 바늘로 찌르며, 심장을 다 토해낼 듯, 가슴 속에 찬 서리가 든듯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이들은 오직 시를 위해 살았고, 시를 위해 일생의 심력을 다 쏟아 부었다. 古人의 이러한 거울 위에 오늘의 詩壇을 비추어 보면 어떨까? 날마다 시집이 쏟아져 나오고, 잡지마다 시가 넘쳐 흐르지만, 落淚의 감격은 고사하고 수염을 꼬는 고심의 흔적도 찾지 못할 시가 수두룩하다. 정신은 간 데 없이 껍데기만 남은 시가 너무도 많다.

비록 그렇기는 해도, 이 아무 데에 쓸모 없는 시를 짓느라고 古今에 피를 말리며 밤을 지새는 시인을 어찌 손 꼽을 수 있으랴. 그 고심참담의 결과를 앞에 놓고 독자들은 마음의 위안을 얻고 삶의 깊은 의미를 읽는다. 중요한 것은 시가 인간의 언어 가운데 가장 정채로운 보석이든, 아무 짝에 쓸모 없는 害毒이든 간에 시는 시라는 사실이다. 그것을 보석으로 만들고 독약으로 만드는 것은 오로지 시인 자신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