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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齋 徐丙五

solpee 2010. 5. 6. 20:45

20세기 대한민국 10대 서예가 10인

 

 

 

A. 解放前 近代書家 5名


(1) 안중근 (응칠, 1879∼1910)

안중근 의사가 남긴 붓글씨는 대부분 1910년 2월부터 순국하기 직전인 3월 26일까지 뤼쑨감옥에서 쓰여졌으며, 모두 230여 점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파악된 유묵은 40여 점에 달하며, 대체로 해서나 해서에 가까운 행서체로 되어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논어> 제14편의 글귀로 국내최대 자연석에 음각되어 남산에 세워져 있는(높이10m) 보물 제 569-5호 <견리사의 견위수명>(동아대학 소장)과 보물 제1150호로 지정된 <위국헌신 군인본분>(안중근 의사 기념관 소장) 및 보물 제1150-1호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보물 제569-11호, 제569-12호 등 국보급 유묵이 전해지고 있어 안의사의 충정 어린 애국정신을 읽을 수 있다. 이들 유묵에는 한결같이 낙관 대신 1909년 1월 애국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고 손가락을 자른 왼쪽손바닥 도장이 찍혀 있어 안의사의 비장한 의지를 느끼게 한다. 안의사의 필묵은 서예적인 가치는 물론 글에 담긴 애국정신과 역사적인 교훈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서예의 시대가 아닌 올곧은 선비정신이 서품의 우열을 좌우하던 시대의 한 전형으로써 안의사의 붓글씨는 대한제국의 민족혼 그 자체로 충절의 내용과 먹빛 또한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고 민족이 노예로 전락하려는데, 진정한 문필정신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우리들에게 재인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2) 김구(白凡, 1875∼1949)

3.1독립운동에 가담한 뒤 그 해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원하며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어 대륙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을 맞아 귀국하기까지 4반세기동안 노심초사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통일에 앞장선 정치인이었다.


백범 선생의 붓글씨는 인생을 통해 국내외로 많은 수를 남기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는 충절의 정신으로 필획을 이루지 않은 작품이 없다. 만년의 수전증도 운필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을 만큼 선생의 일자 일획은 鐵骨을 이루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국보적 보물로 지정되어 있듯 백범 선생의 遺墨이라고 해서 국가의 보물에 값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세기 10대서예가선을 마치고 원로 평론가 석도륜 선생을 찾아 10여명의 명단을 보인 적이 있다. 선생은 "대체로 맞는다"는 한 말씀만 하고 나서 "우남 이승만도 넣어줘" 하던 것이었다. 이대통령이 처음부터 논의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근대서예가에 '민족정기'를 염두에 두다보니 백범 선생이 들어가고 자연 이박사가 빠지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그의 독립운동가 건국공로와 상관없을 수도 없으나 만년의 실정과 독재로 인한 4.19 학생의거를 초래한 장본인이었던 탓이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마지막 과거에도 응시한 바 있는 당대의 명필 중의 일인이었다. 마치 20세기 중국의 10대 걸출 書法家에 뽑힌 모택동 주석의 기백 있는 초서가 중정 장개석 총통의 문약한 해서에 비교될 수 있는 것처럼, 굳이 백범의 필묵과 비교한다면 골기 면에서는 우남이 뒤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吳世昌(葦滄, 1864∼1953)

1919년 3월 1일은 기미독립운동으로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세계만방에 알린 날이다. 33일 민족대표 중에는 위창 오세창 선생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이전의 위창은 1886년 <한성주보>의 기자를 지냈고, 1902년에는 개화당사건으로 잠시 일본에 망명하기도 했다. 돌아와서는 <만세보>와 <대한민보사>의 사장으로 개화운동과 독립운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의 개화사상과 서예/전각 및 저술활동의 배경에는 한어역관으로 淸國을 13차례나 내왕한 부친인 역매 오경석(亦梅 吳慶錫)의 영향이 지대하였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특히 위창은 일찍이 그의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소장품의 감식과 연구를 착수하였으며, 전서체와 전각예술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천착한 보람이 있어 그를 두고 '근/현대 전각의 개창자'로, 혹은 '한국미술사 연구의 아버지'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그의 저서 가운데 역대서화가의 사전격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1928)과 <근묵(槿墨)>, <근역인수(槿域印藪)>, <근역서휘(槿域書彙)>, <근역화휘(槿域畵彙)>등이 있다. 이처럼 문필겸전의 다양한 그의 면모는 선비정신을 몸소 실천해 보인 근대서화사 내지 한국미술사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로 기록되고 있다.


(4) 김규진(海岡, 1868∼1933)

평남 인으로 18세에 유학하여 역대 중국 명첩을 두루 연구하고 돌아와 왕세자의 시부가 되어 서예를 가르쳤다. 서는 五體에 모두 능하였고 畵는 산수, 화조를 잘 그렸으며, 특히 난/죽의 대가였던 만큼 저서로 <난보>와 <죽보>를 남겨 후학들의 교본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해강의 묵난과 묵죽은 그의 초서체를 연상하리만큼 속도감과 리듬감이 돋보인다. 그이 글씨는 지금도 전국 사찰에서 현판이나 주련 등 쉽게 만날 수 있으며, 특히 금강산 구룡연 절벽에 새겨진 <미륵불> 세 자는 동양 최대의 글자로 유명하다.


1911년 서화미술회 강습소가 처음으로 생기고, 1915년에는 김규진 독자적으로 서화연구회를 설립하여 서와 文人畵(사군자 위주)를 3년제 수업과정의 학원체제로 운영하였다. 1918년 제1회 졸업생 중에는 뒷날 국전 등에서 문인화가로 활약한 송은 이병직이 포함되어 있었다. 20세기 후반의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미술가 고암 이응로 역시 그의 제자였다. 해강은 1922년 제1회 선전부터 9회까지 줄 곧 심사위원을 맡을 만큼 일제하에서도 비중 있는 예술가로 활동하였으며, 서화교육가로서도 크게 공헌한 선각자의 한 사람이었다.


(5)서병오(石齋, 1862∼1935)

석재는 조선말기 영남이 낳은 기재이자 걸출한 서화가였다. 시대의 풍운아 대원군이 대구에 신동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불러 만나니 그 때 석재의 나이 17세였다. 운현궁에서 함께 시를 짓고 서화와 바둑으로 소일하다 마침내 대원군은 그의 호 석파(石坡)에서 한 자를 따서 석재라는 아호를 하사할 만큼 그의 재주를 알아주었다. 자고로 천재라야 천재를 알아본다고 하였던가, 석재는 과연 天質이 빼어나서인지 여덟 가지 재주에 능통하다하여 그의 별명은 팔능거사(八能居士)로도 통했을 정도이다. 글씨는 석파를 통한 추사체 영향을 받았으며, 그림은 <개자원화보(介子園畵譜)>와 <십죽재서화보(十竹齋書畵譜)>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


석재는 서화문화의 창달과 후진양성을 위해 가산을 기울여 1922년 대구에서 교남시서화연구회를 설립하였다. 서화교육 뿐만 아니라 한시를 현상모집 심사하여 1등에서 10등으로 구분하여 상금을 주기도 하였다. 당시 대구에서 시회가 열리면 전국으로부터 김규진, 김돈희, 고희동, 오세창, 황용하, 김유택, 허백련, 지차한 등 당대 최고의 시인 묵객이 다 모일만큼 석재는 석화계의 영수로서 영남뿐만 아니라 조선8도 문화계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본과 두 차례의 중국 묵림계를 주유하여 명성을 날렸다. 대원군의 권유로 58세 때 북경과 상해 등지에서 교류한 제백석, 왕석, 포작영 등 거장들 외에도 손문 같은 정치인도 교류하였으며, 그들로부터 화국지재(華國之才)란 칭송을 받았다.


B. 解放後 現代書藝家 5名


(6) 손재형(소전, 1903∼1981)

소전은 시/서/화를 두루 겸한 전방위적인 예술가로 한국 현대서예의 창시자였으며, '추사 이후의 일인자'로 불리운다. 일제치하에서 사용하던 서도라는 명칭에서 탈피하여 '서예'라는 새로운 용어로 바꿔 쓰도록 함으로써 서를 현대적인 예술개념으로 승화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가학으로 조부 玉田으로부터 안진경 해서를 익힌 후, 양정고보에 입학하여 당시 교장이었던 석정 안종원에게서 전서와 초서를 배우고, 성당 김돈희로부터 황산곡과 예서를, 오세창에게는 전각과 서화 감정을 배웠다. 그는 외국어학원 독어과를 졸업하고, 잠시 북경에 유학하여 당대 최고의 갑골학자 나진옥에게 문자학을 사사한 바도 있다.


1945년 조선서화동연회를 조직, 회장이 되었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이 창설되자 서예수교가 되어 정환섭, 서세옥, 조수호 등 제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그는 성당문하에서 황산곡 서법을 계승, 그것을 다시 그의 高弟 김기승에게 轉敎, 행법 전법에 있어 독보경을 일구었으며, 특히 한글서법을 전획필법으로 전개시켜 초유의 성황을 보았는데 한글서법을 繼走하는 자로 서희환이 있다. 이른 바 이 나라 서단 및 국전서예부를 망라하는 일대권위자로서 전후 30년 그의 영향을 입지 않은 층이 한소(罕少)할 정도이다."(<한국현존서예가10인선> 석도륜 평문 중에서 발췌). 그는 2차대전말 목숨을 걸고 일본 동경으로부터 지금은 국보가 된 추사의 <세한도>를 찾아온 일화로도 유명하다. 예술원 부회장, 예총회장, 민의원과 국회의원을 지냄.


(7)金忠顯(一中, 1921∼)

일중은 20세기 한국대표서예가 중 빠질 수 없는 단골작가로 여기 10대가 중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하다. 그는 조선왕조 고종때, 형조판서를 지낸 안동의 김석진의 증손자로 세도가문의 후예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중심이 하나여야 된다'며 일중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경성 삼흥보통학교 시절인 15세 대는 집안인 영운 김용진으로부터 안진경의 <다보탑>등을 배웠다. 어릴 대부터 가학으로 익힌 글씨는 그의 아호가 의미하는 바와같이 평생 문질빈빈의 학자적 태도로 교육과 창작을 겸수하였으며, 국한혼용체와 예서필의 섞은 행초서가 일품이다. 일중의 작품세계에 대해 평론가 석도륜에 의하면 "안노공은 그의 가전인 듯하고 예법은 <조전비>등 한예를 밑자리한 것 같으나 행예와 더불어 완연 쇄탈무애(灑脫無碍)로운 자가일성, 더구나 정운판본서체의 한글서법은 응현과 더불어 초유의 창안자이다." (<계간미술>1978 제5호>라고 평가하고 있다. 일중은 국문판본체. 고체란 용어는 일중이 붙인 이름이다)연구 이전에 일찍이 궁체연구에 몰두하여 남 먼저 저서를 내는 등 지속적인 한글서체 개발에 미증유의 업적을 남겼다. 예술원 회원이며, 그의 저서로는 <우리글씨 쓰는법(1942)>, <우리 글씨체(1945)>, <중등글씨체(1946)>, <중학서예> 및<고등서예>(1955), <초등글씨체 쓰기(1956)>, <일중서예강의(1963)>, 편저<국한서예(1970)> 등이 있다.


(8)柳熙綱(劍如, 1911∼1976)

검여는 인천출신의 서예대가로 동정 박세림과 쌍벽을 이룰 뿐만 아니라, 국전 초기에는 공히 소전의 영향을 받았다. 명륜전문을 졸업하고 1938년 중국유학, 북경동방문화원에서 1년간 서화 및 금석학을 수학했으며, 해방직전에는 한 때 상해미술연구소에서 서양화 공부를 한 적도 있다. 1945년 귀국하여 중국어판 <한성일보> 기자를 거쳐 인천시립박물관장과 시립도서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제2회(1953) 국전에서 서양화부 유화과 서예부를 출품하여 각각 입선한 바 있다. 필자가 80년대 초 검여의 작품세계를 논하면서 "젊을 때 색을 좋아하셨는지 서양화도 몇 점 그리시고...." 한 대목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검여는 국전 5회, 6회 연속 특선(문교부장관상)을 거쳐 1958년에 추천작가, 50세 되던 1960년 초대작가가 되었다. 그는 북위와 예서를 섞은 조지겸과 소동파, 황산곡을 좋아하였으며, 특히 유석암을 즐겨 썼다. 그는 스스로 장대하고 힘찬 검여 서풍을 이루었으나 애석하게도 만년 오른쪽 수족을 못쓰게 되어 좌수서로 대신했다. 한학자 임창순은 "강유위의 <광예주쌍집>의 서론에 공명하고 북위의 웅강기초한 골수를 완전히 자기물로 만들기까지의 노력을 쌓아 전중하면서도 호방한 개성을 이루기에 이른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 하지만 완강한 보수주의적 성격의 검여는 법파의 영수이자 김응현의 스승격으로 여초의 초기 육조서와 과작인 전각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저서에 <중등서예>와<고등서예>(1965)가 있다.


(9) 이철경(갈물, 1914∼1989)

갈물 이철경은 월북한 그의 언니인 봄뫼 이각경과 동생 꽃뜰 이미경과 더불어 세 자매 모두 우리 글씨예술 발전에 기여한 특출한 한글서예가들이다. (1991년 5월, 북경에서 분단 반세기만에 처음으로<코리아선화전>과 토론회장에서 남북서예인이 한 자리에 만났을 때, 필자는 북쪽 서예가 최용진으로부터 그의 평양예술대학생 시절 이각경 선생으로부터 궁체를 배웠다는 말을 직접 들을 수 있다) 그들의 부친 이만규는 서울의대 전신인 대학의원 부속의학교를 졸업하고 외과의사가 되었으나 민족교육자로 변신, 3.1만세운동 참여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민족주의자로 <가정독본>과 <조선교육사> 등의 저서를 남겼다. 따라서 그들은 가친으로부터 크게 영향 받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갈물은 네 살 때부터 부친에게 <천자문>으로 한문서예를 배웠다고 한다. 1928년 15세부터 한글서예를 시작, 60년의 세월을 이 나라 궁체글씨 연구와 교육에 일생을 받친, 사임당선생 이후 500년 역사에 가장 존경 받을만한 여성 예술가임을 아무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공로로 실제 1969년 주부클럽이 제정한 제1회 신사임당상을 수상하였으며, 국민훈장 목련장(1974)과 외솔상(1979)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의 업적은 '민족문화의 창조적 계승'을 목적으로 한 갈물 한글서회 창설(1958)이다. 갈물 선생은 갔어도 40여 년을 헤쳐 온 갈물의 물결은 그 무늬만큼이나 아름답기만 하다. 저서로는 최초의 우리 글씨교본인 <궁체쓰는법>(상권, 1933)을 비롯, 1946에 발간된 <초등글씨본>과 <중등글씨본> 각3권, <한글글씨체>2권, <한글습자 가정편지틀>(1947) 등 다수가 있다.


(10) 李基雨(鐵農, 1921∼1993)

철농 이기우는 교육자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이세정은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의 제자로 한글학회 임원과 세종대왕기념 사업회회장을 지낸 진명여고 교장이었다. 철농이 서예가이자 전각가로 성장하게 된 배경도 그의 가계와 무관하지 않다. 철농의 글씨공부의 사부였던 무호 이한복은 부친이 교장으로 있던 진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으니, 그의 첫 한묵 인연은 이렇게 맺어진 것이다. 그의 나이 15세(1935)때의 일이다. 당시 이한복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한국 서화계의 엘리트로서 전각계의 태두 오세창과도 교유하고 있었던 터로, 1944년 그를 위창에게 소개, 정식 제자가 되었다. 철농이라는 호도 전각의 스승인 위창이 내린 것이다.


1945년 9월 '한국서예인의 합심과 민족예술운동'을 목적으로 조선서화동연회(회장 손재형)가 창립되고, 그 이듬해에 8월 해방전람회가 현재의 신세계 백화점화랑에서 개최되었을 때, 오세창, 안종원, 김용진 등 원로들을 비롯하여 서예가로는 손재형, 김기승, 황용하, 원충희 등과 더불어 이기우도 참가하고 있다. 이것이 철농의 공석적인 서단활동의 시작이 된 셈이다. 초기의 철농 전/예는 무호의 영향을 받았으나 위창으로부터 전각을 배우고 나서는 전각의 장법에 영향을 받아 그만의 독특한 현대적 조형어법을 터득하게 된다. 전각 역시 처음에는 위창을 통해 오창석을 배우고 진한을 거쳐 자성일가했다. 필자가 직접 참관한 1972년 이기우 陶刻書藝展은 도자와 전각 그리고 불이라는 자연이 만나 이루어낸 철농예술의 극치를 이루었던 감명 깊은 전시였다. 저서로는 <鐵農印譜>(제3권1972)가 있다.

 

石齋 徐丙五

 

[1] 대구가 낳은 천재,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
이에 대한 기록은 여러차례 발표되었지만 많은 호기심으로 항상 새로워지는 느낌은
그만큼 재능과 예술이 넓고 깊으며 많은 일화와 전설적인 이야기가 우리들의 잎에서 회자하기 때문이다.
팔능거사(八能居士)로써 문(文)에 능했는가하면 해박한 시(時)를 남겼고 글씨(書)를 잘 썼는가하면
그림(畵) 또한 감히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게다가 거문고로 풍류를 즐겼고 바둑, 장기 또한 프로급을 넘어 당시의 대원군도 두 손을 들었다.
의술(醫術)에 대한 조예도 깊어 멀리 중국, 일본에서 조선의 명의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서민층에서 즐기는 화투, 투전, 골패 또한 당할 자가 없었다.
백년에 한 번 태어날 수 있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천재 서병오. 그의 발자취 뒤안길에는 많은 일화가
있기 때문에 여기 몇 구절 적어본다.
대원군(1820 ~ 1898)과의 만남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민비의 세력에 밀려나 운현궁의 울적한 생활에서
자신의 재능 상대자를 찾던 중 기재 서동(奇才徐童)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초청하였다.
이때 석재의 나이 17세였다. 대원군을 위시한 당시 명대신들의 경탄을 받으면서 대원군 이하응은
"나의 호는 석파(石破)인데 너의 호는 석재(石齋)로 하여라" 하고서 화첩을 하사 받았다.
또다른 호칭은 석재(惜哉, 惜才)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어쩄든 대원군은 석재와 동거 동침을 하면서
시, 서, 화로 연일하였고 특히 장기, 바둑을 많이 즐겼다.
대원군이 바둑을 연삼패(三敗)를 하니 크게 노하여 "이놈아! 한번쯤은 패해주어야지. 이놈을 골방에 가두어라." 하고 농담을 하였다고 한다.
한편 장기에는 하수였던 석재는 어느날 대원군에게 집을 떠나온지 몇 달이 되어 부모님을 뵈러 집에
다녀오겠다고 하고는 그길로 동대문 밖 절방을 얻어 머물면서 장기책을 구하여 열심히 연구하여 결국
대원군을 이기니 "석재(惜哉)로다 서동아"를 몇 번 거듭 부르며 양반집 출신이면 능히 관직에 앉혀도
손색이 없다고 하며 "아깝도다 석재(惜才) 야".하였다.
중국과 일본여행 석재는 제자인 긍석 김진만(肯石 金鎭萬)과 동행하여 37세와 47세에 두차례 중국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제백석(濟白石), 오창석(吳昌碩), 손문(孫文), 포화(浦華)등 중국 제일의 예술가,
정치인 등을 만났다. 그때마다 화국지개(華國之才)란 극찬을 받았는데 그중에서 낙임정(駱任庭)
영국총통을 만나 나눈 국화에 대한 시가 그 당시 합방 이후 나라를 잃은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어 동아일보에 대서특필이 되었다.
'초나라 굴원(屈原)은 반찬으로 한 뒤에 이름이 멀리서 전해지고/
진나라 도연명(陶淵明)은 나물로 하여 그 향기는 끊이지 않는구나/
백.적.국화꽃 색 종류도 많지만 그 중에서 황색꽃이 제일이다'
라는 시는 우리 황인종이 제일이라고 국화꽃에 비유하여 읊은 국화그림에 병제한 시의 그림은
낙임정이 귀국하여 대영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동생 서상위(徐相緯)의 소개로 일본의 정계 거물이자 고문인 두삼만의 초총을 받게 되었는데
두삼만 또한 호방한 성격으로 글씨를 잘 썼으며 주색을 좋아하는 호걸로써 석재와는 일백 상통인 만큼
같이 동침 하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사경을 헤메는 두삼만의 손자를 석재의 의술인 부자(附子)를 써서 구해주니 소동파(蘇東坡) 서첩 한권을
선물로 받았는데 이 서첩은 석재 사망 이후 엄청난 가격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일본 명문 귀족들의 소개로 석재의 질녀(주병화 씨의 처)가 무시험으로 입학하였는데 정문에서
"조선에서 온 누구이다"고 하니 총장이 정문까지 마중나와주었으며 졸업때까지 맣은 배려를 받았다고
한다. (계속)

[2] 석재의 스승
석재는 태어나면서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천재성으로 예술의 길을 걸었지만 그의 천재성에 맞는
또 다른 천재 선배들이 석재를 이끌었다. 석재 또한 이 분들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으로써
만년에 팔능(八能)이란 별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석재의 집안은 대대로 동화사의 대주지사였던 만큼 석재는 산사에서 큰 불편 없이 공부를 하였다.
석재의 부친 서상민(徐相敏)은 매일 종이 한권을 하인을 통하여 보냈고, 그 인편에 전 날 썼던 서화를
가져 오게 하여 일족인 팔하 서석지(八下 徐錫止)에게 서평을 받게 하였다.
주로 왕희지. 조맹부, 김생의 글씨와 개자원화보(介子園畵譜)를 익혔고, 뒤에 추사의 영향을 받은
대원군의 서법에 관심을 가졌다.
37세에 중국을 다녀온 이후는 안진경체를 익혔고, 차츰 구양순, 동기창, 소동파 등의 서법을 익혔다.
사군자는 중국에서 만난 포작영(浦作英)법을 따랐다.
그 가운데 추사체는 만년에 이르도록 떨구지 않았다.
학문의 길은 당시 영남의 대유학자요 문장가인 방산 허훈에게 사사받고 문학적인 기초와 학문의 방법을
물어 유학자로써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에 스승의 이름자를 별명으로 하명 받아 그의 작품중에
서훈(徐薰)이란 인각을 자주 볼 수 있다. 그 후 경남 산청의 면우 곽종석(郭鍾錫)에게도 사사받았으며,
가장 정신적인 지주로 존경한 분은 석곡 이규준(石谷 李圭晙)이다.
석곡은 영일 석동 사람으로 중국의 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와 상통하였다.
석재의 만년 회술에 공자 이후에 석곡이 유일하게 탄생하였다고 극찬하면서 7세의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밥상을 마주하지 않았다고 할 만큼 존경하였다. 석재는 이렇게 많은 석학과 예술가들을
접하면서 학자와 예술가로서 급변하는 당시의 정세에도 흔들림없이 후일 팔능거사로서의 길을
걸어 갔던 것이다.
석재는 만년 팔능이란 별명을 얻어 전국적으로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석재의 제자 필자가 지난 1987년 그 문하생 긍석 김진만(肯石 金鎭萬), 운강 배효원(雲岡 裵孝源),
죽농 서동균(竹農 徐東均)등 23명의 서화를 가지고 영남교류전이란 전시회를 열어 연보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제자들을 열거하여 보면의술은 달성의 문경수(文敬洙), 청도의 이원세(李元世),
영일의 황보준(皇甫浚)등의 제자가 있다.
이원세는 무의당한약방으로 한때 대대 구 능인고등학교 앞에서 명의로 이름을 떨쳤다.
석재의 바둑제자로는 성주의 배상연(裵相淵), 경주양동의 이석홍(李錫泓), 합천의 김효석(金孝錫),
대구의 이근상(李根祥), 전남광주의 이노인등이 있다. 또한 바둑계에서는 국내 유일의 국수로 알려진
진주 노사초(盧史楚)와는 쌍벽을 이루었다고한다. 당시 국내 바둑계에는 유단제도가 없었으며,
최고수를 통칭 국수(國手)라 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현재와 같이 유단제가 있어 최고 유단자 6단이 석재와 여러차례 바둑 경선을 하였다.
대판매일조선판에서는 석재를 5단으로 필적하였다고 대서득필하였다. 뒷날 경북지사 일본이 아베가
석재의 바둑솜씨를 듣고 인력거를 보내 초청하여 대국을 가졌다. 석재는 두 판 이기고, 한 판을 져주니
여기에 힘을 얻은 아베는 결국 밤을 세워 바둑을 두었다.
석재는 새벽녘에 과로로 인한 뇌일혈로 오른 팔이 마비되면서 얼마 뒤 별세하였다.
석재는 바둑과 필연 아닌 악연을 갖게 되었다.
전라도 부안에 거주하는 대부호 아들 김성수(金性洙)가 석재를 찾아와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는데
인촌(仁村)이라는 호를 지어 주면서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朝朝喚起自家魂 不是某 是血  細看字字行行意 舌弊唇焦出苦言

매일 아침 자기의 정신을 환기시키니 이것은 활자 끄으름이 아니라 피먖힌 흔적이구나.
글자 한 자마다 줄줄이 그뜻을 자세히 보지 혀를 헤치고 입술이 마르도록 고언을 말했도다.

'인촌 회고록'에 나오는 이 시를 보면 그 당시 동아일보가 일제히 필거하도록 격려한 시구로서
석재의 항일 정신의 일면을 볼 수 있다.

[3] 석재의 집안은 대구 진골목에서 오랜 세거를 이루는 집단 문벌이었지만 뛰어난 인물이
배출되지는 못했다.그래서 그의 부모를 위시한 문중에서는 학자, 또는 정치가의 꿈을 키워 보았으나
천부적인 예술가의 길을 막지는 못했다.
일반 범인들은 어느 한편의 뛰어남도 어려운 법인데 석재는 팔능(八能)이란 별명을 얻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니 그 뒤를 추종하는 제자들이 운집하였고 항상 그의 뒤안길에는 일화가 줄을 이었다.
석재는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한 예술가로서의 친가 만석, 양가 만석 이만석의 재산을 탕진하면서
예술적 자존과 방탕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살다 갔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중기 이후 평양에 본부를 둔 권번(卷番)조합은 기생을 선출, 양성한 제도가 있었는데 풍류를
좋아하는 석재는 이곳 출신의 기생(지재, 이향, 연옥, 진옥, 비취, 염농산, 경란, 람전, 계난, 금심, 옥란,
금계, 근영 둥)과 숱한 염문을 뿌렸다. 뿐만 아니라 평양, 개성, 금강산을 비롯하여 진주, 동래, 경주,
밀양 등을 왕래하면서 무수한 기생들과 사랑과 시기를 받았다.
석재가 머물다 떠난 뒤에는 항상 염문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번은 평양 제일가는 기생 금계(錦溪)가 대구로 석재를 찾아왔다. 주안상이 차려지고 주흥이 돌면서
거문고, 가야금으로 시구(時句)가 오가는 분위기 속에서 춤을 추는 금계의 치마폭을 움켜 잡은 석재는
일필휘지(一筆揮之)하니 같이 동석했던 대구 갑부 이종면(李宗勉)은 그 자리에서 비단전에 연락하여
치마 한 벌을 지어오게 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예술가로서, 장부로서 영남인의 기량을 발휘한 석재는 권번조합 고문을 맡아 진주에서 한 달간
머물면서 여러 기생들과 어울렸다. 그러나 진작 진주 제일의 명기인 향전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존심 강한 향전은 분함을 이기지 못해 석재의 뒤를 따라 대구로 와서 "나의 부족함이 무엇이냐"고
따지면서 석재에게 사모의 정을 토로하였다. 석재는 계획했던 방법인 만큼 결국 말년까지 향전과 함께
살았다. 혹자는 석재를 한 시대를 멋지게 살다간 임백호(林白湖)에 비견하여 풍류객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추사 김정희(金正喜)이래 몇 안되는 삼절인(三絶人)으로 석재를 세칭하는데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시는 도교적(道敎的)인 풍과 당.송(唐宋)의 품격을 갖추었으며 시대 저항적인 시편으로 일제의
집요한 회유와 협박에도 흔들림없이 자신의 길을 갔다.
서(書) 또한 대구의 원근에 있는 사찰, 서원등에 많은 편액을 남겼으며 그곳에서 사회를 열어
연축(聯軸)을 많이 남겼고 만년에는 생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작품전을 열어 동양 삼국을 놀라게 하였다.
화(畵)는 그의 유품중에서 초년의 작품이 가끔 소장가와 화랑에 보이며, 중년기의 작품은 희소하다.
석재는 중국을 두 번, 그리고 일본도 다녀왔다. 이런 견문이 결국 많은 작품을 남기게된 영양소가 되었다고 하겠다. 외국 방문 때마다 최고의 예술가, 정치인,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나라 잃은 정세속에서도
국위를 떨치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존앙(尊仰)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술의 길은 고집했기 때문 일 것이다.
결국 이 길로 만년에 그 많은 재산을 탕진해 버린 석재는 허탈과 무위(無爲)의 자신을 원망하면서
필자에 없는 사업인 국농소(國農所)허가를 내어 개간 간척사업에 손을 대었다가 엄청난 재산 손실은
보게 되었다. 그때 나이 60여세, 석재는 몹시 슬펐다.
석재는 한 평생 후회없이 이 세상을 크게, 높게 살아왔지만 어느 한편 완성을 보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개탄하며 후일을 걱정하였다. 그래서 만득(晩得)의 외아들 복규(復圭)와 같이 한집안에서 자란
신대식(申大植, 의사)을 불러 의교(義交)를 부탁하고 후사(後嗣)를 걱정하였다고 하니
만년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하늘이 낳은 천재 서병오. 영남이 배출한 기재만능(奇才萬能)의 예술가.작고한 지 어언 62년이 지난 지금
그의 무덤도 없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은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소장가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요즘처럼 흔한 도록 한권, 논문 한편 나오지 않았으니 후일의 상유지목(桑楡之木)을 바랄뿐이다.
일제 강점기의 한 시대를 살다간 예술가 석재에 대한 단편적인 여재의 글을 마친다.
풍성한 가을에 추수한 농부가 빈 들판을 바라보는 허탈감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김항회. 대구화랑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