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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분녕다객(分寧茶客)’ 황정견(黃庭堅)

solpee 2010. 4. 30. 06:32

문인다취 : ‘분녕다객(分寧茶客)’ 황정견(黃庭堅)

등록일: 2007년 08월 23일 20시 15분 18초

 
[대기원] 황정견은 북송의 저명한 시인이자 서예가로, 그의 서법은 소식, 미불, 채양과 더불어 ‘송 사대가’로 불린다. 그는 홍주 분녕(分寧, 현 강서 수수)사람으로, 송대 ‘강서시파’의 창시자이다.

송대에는 차 마시는 풍속이 성행하여, 문인, 묵객들은 모두 다도와 다예를 추구하는 품차의 고수들이었다. 황정견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분녕다객(分寧茶客)’으로 명성이 높았다. ‘분녕다객’이라는 칭호는 ‘송패류초’에 기록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당시 승상이었던 부필(富弼)은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 그는 황정견이 박학다식하고, 시사와 수법에 모두 정통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매우 질투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만날 기회가 생겼다. 무슨 이유인지 부필은 황정견을 좋아하지 않았고, 모임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이후 부필은 사람들에게 “나는 일찍이 황정견이 굉장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분녕의 다객 한 사람(分寧一茶客)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부필은 황정견을 폄하하려고 ‘분녕일다객’이라고 말했지만, 품차, 팽차에 정통한 황정견에게 오히려 그의 칭호는 고상한 의미로 불리게 되었고, 삽시간에 유명해졌다.

황정견은 ‘분녕다객’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의 고향인 분녕에서 ‘쌍정차’라는 명차가 생산되고, 그 역시 다도, 다예의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황정견은 젊어서는 술을 좋아했지만, 중년 이후 건강상의 이유로 술을 끊고 차를 더욱 즐기게 되었다. 그가 지은 시를 보면 그가 차에 대해 얼마나 정통했고, 차를 얼마나 즐겼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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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epochtimes.co.kr/news/article.html?no=8344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은 홍주분령(洪州分寧, 지금의 江西省 修水縣 雙井村) 사람으로, 자는 노직(魯直)이고 호는 산곡도인(山谷道人) 또는 부옹(涪翁)이다.

   황정견은 북송의 유명한 문학가이자 시인이며 서예가이다. 일찍이 진관(秦觀)장뢰(張耒)조보지(晁補之) 등과 함께 소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라고 불린다.

그는 서단에서 필법을 정통한 사람으로 특징이 두드러져 창신을 개척한 공로가 있는 유명한 서예가이다. 『송사·황정견전(宋史·黃庭堅傳)』에서는 그가 “행초서를 잘 썼고, 해서 필법 또한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善行草書, 楷法亦自成一家].”라고 했으며, 소식·미불·채양 등과 더불어 ‘송사대가(宋四大家)’라 일컬었다. 그는 젊었을 때 주월(周越)에게서 글씨를 배웠고, 특별히 큰 글씨를 잘 썼으며 <예학명(瘞鶴銘)>에서 진수를 얻었다고 술회했다.

   최근 『서법(書法)』 잡지에서 그가 젊었을 때 쓴 <백이숙제묘비(佰夷叔齊廟碑)>를 발표했는데, 당나라 저수량의 해서 필법과 비슷했다. 그는 시에서 “세상 사람들은 단지 <난정서>의 면목만을 배워 평범한 골격만 바꾸려고 하나 금단이 없다[世人但學蘭亭面, 欲換凡骨無金丹].”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황정견이 서예를 학습함에 장기간 예술의 진수를 탐구했으나 얻지 못했던 고충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와 같기 때문에 그는 채찍질해 가면서 집착하여 추구하고 분발했다. 그는 왕희지 글씨를 존경하고 사모하며 추획사·인인니·옥루흔 등의 용필 이론을 법으로 삼았다. 그는 <예학명>에서 필법을 탐구하여 “필봉을 붓에 감추고 뜻은 붓 앞에 있다[鋒藏筆中, 意在筆前].”라는 요지를 깨달았다. ‘필봉을 붓에 감춘다.'라는 것은 행필에서 제어함을 말하는 것이고, ‘뜻은 붓 앞에 있다.'라는 것은 운필의 자연스러움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글씨를 배운 지 30여 년 동안 20년간 속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까닭이 바로 운필할 때 누습을 없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또한 친구인 소순흠(蘇舜欽)에게 장욱과 회소의 진적을 빌려보고 반복해서 연구하여 필법의 묘를 깨달았다. 만년에 장강삼협(長江三峽)에 들어가서 뱃사공이 노를 저음에 노가 물결을 따라 일어났다 엎어짐이 한결같이 물결의 형세에 맡기는 것을 보고 필법을 깨달아 자기의 작품에 융해시켜 그의 독특한 폭사식(輻射式) '황체(黃體)'서법을 만들었다.

  황정견 서예의 성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형세로 팔을 움직이고, 팔을 운동에서 필호의 제안돈좌(擠按頓挫)를 제어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글씨는 필세를 전개하여 뒤집고 올리며 기복이 자연스러워 점과 획이 풍요롭고 중후하면서 윤택하다. 이렇기 때문에 그는 뜻으로 필호를 제어하여 중궁을 긴밀하게 수렴시키고 사면으로 펼쳐는 폭사형의 형체에서 이미 구속을 느끼지 않는다. 또한 표일함을 잃지 않고 의젓함을 갖춘 고상한 선비와 같아 후인들이 서예를 학습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그가 말한 “서예가의 글씨에 붓이 있는 것은 선가의 구절에 눈이 있는 것과 같다[書家字中有筆, 如禪家句中有眼].”라는 말은 한편으로 필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글씨를 쓸 때 선사가 경의 요지를 찾는 것처럼 용필의 관건을 확실히 파악하는 것이다.

출처 : 굴어당의 漢詩(唐詩.宋詩.漢文)
글쓴이 : 굴어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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