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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의 淸溪石壁

solpee 2009. 8. 31. 06:36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2권  

 

 

경상도(慶尙道) 

 

영천군(永川郡)

 

조선 국가는 고려국가보다 훨씬 강화된 중앙집권국가이므로 건국초기부터 전국 각 고을에 대한 통치 정보가 절실하였다.

그 고을의 자연과 인문 환경을 많은 문헌과 현지 조사를 통하여 수집한 정보들을 보기 좋게 정리하였다.

 

각 고을의 지방 세력들은 성씨 조에 실어 정리하고 있다.

신라말 후삼국 고려 이래로 그 고을에 사는 유력 토착 세력(호족)이 점차로

중국식 성씨를 가졌다. 고려 왕조는 호족 연합 정권.

평민 이하 신분 사람들은 조선 시기에도 성이나 한자식 이름이 없었다. 

이것이 본관, 관향의 유래.

승람에는 다른 지역에서 들어온 성씨까지도 파악하고 있다.

 

영천군에는 신라말 후삼국 시대의 호족인 황보 씨, 이씨,

영일현에는 고려 인종-의종 때 명신인 정습명을 시조로 하는 오천 정씨가 실려 있고,

인물 조에도 그 성씨 출신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포은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영천 우항리이고,

그에 대한 인물 소개는 영일현에서 한다고 승람은 적시하고 있다.

 이종검, 이종겸이 영천 이씨로 영천군 인물조에서 소개하나 그들의 부친 이상의 선대가 어느 시점인가 관향인 영천을 떠나서,

용인 땅으로 흘러들어가 살게 되었고, 이들 형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경기도 용인이므로

용인의 우거조를 보라고 승람은 영천군에서 적시하고 있는 점을 참조.

 

지리지나 행장 등에서 포은을 영일현인이라고 하는 까닭은 오천 정씨(시조 정습명)인 포은의 관향에 따라 편찬한 것이다.

오늘 우리시대 입장에서 역사 기록을 해석해서는 않된다.

그렇다고 옛 사람들의 편찬, 표현이 잘못된 것도 물론 아니다.

 

 관향도 고향이므로 포은이나 포은 당시 사람들, 그 이후의 여러가지 문헌들에서 포은을 오천인, 영일현인이라고 표현하였고,

관향인 오천에 여러가지 기념물들이 만들어지고,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오천 사람들의 기억에 포은의 고향이 오천이라고

하는 유무형의 기억(전설, 물질, 시 등)이 형성된 것이다.

 

오천은 포은의 고향은 고향이되 태어나고 자란, 요새 우리가 말하는 의미의 고향이 아니라,

관향(본관의 고향), 즉 포은의 '뿌리'로서의 고향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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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는 경주부(慶州府) 안강현(安康縣) 경계까지 42리요, 남쪽으로는 같은 부(府) 자인현(慈仁縣) 경계까지 33리요, 서쪽으로는 하양현(河陽縣) 경계까지 23리요, 북쪽으로는 임내 신녕현(任內新寧縣) 경계까지 25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절야화군(切也火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임고(臨皐)로 고쳤고, 고려 초년에 도동(道同)ㆍ임천(臨川) 두 고을을 합쳐서 영주(永州) 고울부(高鬱府)라고도 한다. 라고 고쳤다. 성종(成宗)이 자사(刺史)를 두었고, 현종(顯宗)은 경주(慶州)에 붙였고, 명종(明宗)은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뒤에 승격시켜서 지주사(知州事)로 삼았으며,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군(郡)으로 삼았다.

【속현】 신녕현(新寧縣) 고을 북쪽 25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사정화현(史丁火縣)으로 또는 화산(花山)이라고도 하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임고군(臨皐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이 경주부(慶州府)에 붙였고, 공양왕(恭讓王)이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에서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치고 치소를 장수역(長壽驛)으로 옮겼다. 금상(今上) 3년에 현의 아전들이 현감 길수(吉脩)의 엄하고 사나운 것을 싫어해서 고을을 비우고 도망하니, 이를 없애어 군(郡)에 붙이고 북면 신촌리(新村里) 땅을 베어서 의성(義城)에 붙이고, 남면 이부현(梨阜縣) 땅은 하양(河陽)에 붙이고, 서면 치산리(雉山里) 땅은 의흥(義興)에 붙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절야화(切也火)ㆍ임고(臨皐)ㆍ영주(永州)ㆍ익양(益陽)ㆍ영양(永陽)ㆍ고울(高鬱).

성씨】 본군 황보(皇甫)ㆍ이(李)ㆍ윤(尹)ㆍ신(申), 송(宋)ㆍ김(金)ㆍ극(克)ㆍ유(兪)ㆍ최(崔)ㆍ심(沈) 모두 내성(來姓)이다. 이(李)ㆍ박(朴)ㆍ정(丁)ㆍ사(史) 신녕(新寧).

【풍속】 풍속은 평이한 것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형승】 청계석벽(淸溪石壁)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있다. 이수삼산(二水三山)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흰 구름 누른 학은 몇몇 때나 돌아왔나. 이수(二水)와 삼산(三山)이 차례로 열려있네.” 하였다. 형세웅반(形勢雄盤) 정조(鄭慥)의 시에 있다.

【산천】 모자산(母子山) 고을 북쪽 90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사룡산(四龍山) 고을 남쪽 50리에 있다. 채약산(採藥山)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금강산성(金剛山城) 고을 동쪽 8리에 있다. 공산(公山)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대구부(大丘府) 조에도 있다. ○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지팡이 끌고 제일 높은 데 올라갔다 돌아오니, 산에 오른 지 반나절에 귀밑머리 희어졌네. 하늘이 얕고 바다는 넓어 땅이 없는가 의심스럽고, 안개는 흩어지고 구름이 열리더니 갑자기 산이 있네. 위태로운 길 구불거려 마치 촉(蜀) 땅 가는 길 같고, 여러 봉우리 높고 높아 진(秦) 나라 관(關)과 같네. 우리들은 이미 집에 전해 오는 훈계를 알거니, 무슨 일로 지금같이 위험한 일 당하는가.” 하였다. 작산(鵲山) 고을 남쪽 6리에 잇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이 고을의 지형이 나는 봉(鳳)과 같다.” 하는데, 봉은 대나무를 사랑하고, 또 까치가 지저귀고 날아가지 않는 것을 보았으므로 산의 이름을 작(鵲)이라 하고 또 죽방(竹防)이라고도 한다. 죽방산(竹防山) 고을 남쪽 9리 떨어진 곳의 남천(南川)과 북천(北川) 두 물 어구에 있다. 청경산(淸景山) 고을 동쪽 30리에 있다. 보현산(普賢山) 혹은 모자산(母子山)이라고도 하며, 신녕현(新寧縣) 북쪽 30리에 있다. 화산(花山) 신녕현 북쪽 3리에 있다. 유현(柳峴) 고을 남쪽에 있으며, 청경산에서 나와서 명원루(明遠樓) 밑을 거쳐서 북천과 합하여 흘러 가다가 하양현(河陽縣) 남천이 되었다. 북천 고을 북쪽 6리에 있는데, 모자산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청통역(淸通驛)에 이르고 남쪽으로 남천과 합해서 동경도(東京渡)가 되었다. 이 고을이 두 물이 합류하는 곳에 있기 때문에 영천(永川)이라고 이름했으며 영(永) 자는 이수(二水)를 뜻한다. 범어천(凡魚川)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그 근원이 사룡산(四龍山)에서 나와서 동경도(東京渡)로 들어갔다. 자을아천(茲乙阿川) 옛날 신녕 북천 상류에 있다. 서천(西川) 신녕현 서쪽 1리에 있는데, 공산(公山)에서 흘러나와서 고을 북천과 합하여 흐른다. 시천(匙川) 고을 서쪽 16리에 있는데, 근원은 공산에서 나와서 하양현 남천 상류로 들어갔다. 동경도(東京渡)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청천지(菁川池)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신증』 병풍암(屛風巖)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토산】 은어[銀口魚]ㆍ황어(黃魚)ㆍ꿀[蜂蜜]ㆍ송이[松蕈]ㆍ왕골[莞草], 입초(笠草) 풀로 갓을 만들 수 있다 해서 이렇게 이름 지었다. 산수유(山茱萸)ㆍ인삼(人蔘)ㆍ복령(茯笭), 철(鐵) 고을 동쪽 건천(乾川)에서 난다. 잣[海松子]ㆍ지치[紫草]ㆍ옻[漆]ㆍ지황(地黃)ㆍ맥문동(麥門冬).

【봉수】 방산 봉수(方山烽燧) 고을 동쪽 13리에 있으며, 동쪽으로 경주 주사산(慶州朱砂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성황당(城隍堂)에 응한다. 소산 봉수(所山烽燧) 고을 동쪽 47리에 있으며, 동쪽으로 경주 안강현(慶州安康縣) 형산(兄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성황당에 응한다. 성산 봉수(城山烽燧) 고을 서쪽 23리에 있으며, 동쪽으로 성황당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의흥현 여질동산(義興縣餘叱同山)에 응한다. 성황당 봉수 고을 서쪽 10리에 있으며, 동쪽으로 소산과 방산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하양현 시산(河陽縣匙山)과 이 고을 성산에 응한다.

【누정】 명원루(明遠樓) 객사 동남쪽에 있으며, 삼면이 모두 넓고, 아래에는 큰 냇물이 있어 남쪽으로 흐른다.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맑은 시내 석벽이 이 고을을 안고 돌다가, 다시 새로운 누각이 우뚝 섰는데 눈이 훤하게 열리네. 남쪽 밭두둑 누른 구름은 곡식 익은 것 알겠고, 서쪽 산 모퉁이 시원한 기운 아침이 분명하구나. 풍류있는 태수는 2천 석이고, 잠깐 만난 옛 친구 술이 3백 잔일세. 밤은 깊은데 옥피리 불며불며, 높이 밝은 달 휘어잡고 함께 배회하고 싶네.” 하였다. ○ 고려 최원우(崔元祐)의 시에, “날마다 여기 올라 돌아가기를 잊었으니, 눈에 띄는 기이한 경치 차례로 열려오네. 어느 곳 먼 멧부리 구름밖에 나와 있고, 때때로 날려오는 빗방울 들 가에 떨어지네. 서늘한 저녁 무렵 기둥에 의지하니 바람이 모자에 불고, 고요한 밤에 퉁소를 부니 달빛은 술잔에 가득하네. 흐르는 물 또한 사람이 사랑함을 알아서, 누 앞에 바싹 와서 일부러 배회하네.” 하였다. ○ 이용(李容)의 시에, “새로운 누각 우뚝한데 나는 새 돌아오고, 여기 오르니 좋은 회포 저절로 열려오네. 딴 고을 사는 옛 친구 다시 만나기 어렵고, 올해의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다네. 시내가 비었으니 물 그림자는 노래하는 부채를 흔들고, 산이 가까우니 가을 빛은 술잔에 떨어지네. 2년 동안 적은 녹봉으로 무슨 일을 이루었는가. 천 리 밖에 혼자 서서 부질없이 배회하네.” 하였다.

『신증』 서거정(徐居正)의 기문에, “영천(永川)은 경상도에서 제일 아름다운 군으로서 우리 고향 대구와 멀지 않다. 무진년에 내가 태수 손선생(孫先生) 사성(士成)을 뵙고 말하기를, ‘이 군(郡)을 영(永)이라고 일컫는 이수에서 취한 뜻이니, 대개 이수(二水)는 근원이 모자산(母子山)에서 나와서 두 갈래로 나뉘어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흐르다가 이 고을 앞에 이르러 하나로 합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은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나를 끌고 높은 데 올라 바라보매, 내 시험삼아 좋은 산천의 경치를 대략을 그리고 여기에 누(樓)까지도 써 보았으나 몹시 화려한 글이 되지 못했다. 그 뒤 임오년 가을에 내가 사신이 되어서 영지군(永知郡)에 이르니, 지군(知郡) 김선생(金先生)이 나를 맞아 함께 누각에 올라 종일토록 술 마시고 글을 읊었다. 누의 건물이 크고 넓으며 단청 빛이 아름다워 옛날과 다르니, 이는 전 태수 정차공(鄭次恭)공이 중수한 것이다. 을미년에 내가 사신이 되어 다시 이곳에 왔었고, 그 뒤 무술년 가을에 남도(南道)를 순찰하면서 이름난 누각을 두루 찾았으니, 진주(晉州) 촉석루(矗石樓)ㆍ안동(安東) 영호루(映湖樓)ㆍ밀양(密陽) 영남루(嶺南樓)ㆍ울산(蔚山) 대화루(大和樓)ㆍ양산(梁山) 쌍벽루(雙碧樓)ㆍ김해(金海) 연자루(燕子樓) 등은 모두 이름난 곳들인데 이 누의 경치도 또한 이 누각들과 비슷할 뿐 아니라, 명원루가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재상 김극련(金克鍊)후가 번잡한 일을 잘 처리하는 재능이 있어 동서쪽의 별실을 고쳐 지었는데, 모양을 옳게 하였기로 내 몹시 칭찬했었다. 그 뒤 오래 되어 임인년 가을에 신윤종(申允宗)후가 원으로 나갔는데, 부임한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정치가 잘 되고 사람들이 화합하여 까다롭게 하지 않고서도 저절로 엄하게 되었다. 이에 동쪽 별실을 고쳐 짓고 거기에 조그만 마루를 붙여 지어서 이름을 청량당(淸涼堂)이라고 하였다. 또 서쪽 별실을 만들어 크게 마루를 붙여 지은 다음, 이것을 쌍청당(雙淸堂)이라고 했는데 모두 몹시 정미했다. 을사년에 개연히 이 누를 새로 고칠 생각이 있어 낡은 곳을 보충하고 찌그러진 곳은 고치며, 또 단청을 새로하니 정하고 빛나기가 전보다 백 배는 더했다. 따로이 포주(庖廚) 아홉을 만드니 누각의 제도가 이에 이르러서 크게 고쳐졌다. 그 동안에 조카 팽소(彭召)가 나에게 기문을 쓰기를 청하기로 나는 말하기를, ‘이 명원루가 생긴 지 이미 오래라서 고려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고을을 지난 사람으로 영웅 호걸과 문인 재사(才士)가 그 몇 명인지 알지 못하건만 아직까지 기문을 지은 이가 없었는데, 내가 어떤 사람이길래 뻔뻔스럽게 이를 짓겠는가.’ 하고 여러 날을 끌어 왔었다. 이제 다시 누차 청하니 사양할 길이 없어 이에 기문을 쓰는 것이다. 내 일찍이 명원(明遠)의 뜻을 이 고을의 한두 부로들에게 물었더니 절간의 복잡한 말을 하므로 나는 한 번 웃고 그만두었다. 내 생각건대 한유(韓愈)의 시에, ‘먼 곳을 보는 눈이 쌍으로 밝은 것을 더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명원의 뜻은 혹시 여기에서 나온 것인가. 보건대 그림 그린 기둥, 나는 듯한 대들보와 겹으로 된 처마, 구부러진 난간이 팔면으로 활짝 열려 있어 사방에서 바라다 보아도 모두 통해서 명랑하고 상쾌하며, 크고 넓어서 위로 하늘에 닿아 별을 딸만하고 아래로 땅에 닿지 않았는데, 맑은 냇물을 움킬 만하다. 하늘과 땅이 맑고 편안하며 바람과 달이 활짝 개서 사계절의 아침과 저녁이 광명하고 맑은 기운이 길이길이 발과 책상 가운데 있고, 풍속의 티를 벗어나고 세상 티끌을 끊어 한 점 티도 그 사이에 없으니 이른바 명(明)이라는 것이요, 바라다보면 모든 산이 둘러싸이고 여러 산봉우리가 높고 높아서, 푸르게 튀어나고 푸르게 솟아 있는 것이 연기와 구름 아득한 안개 속에 출몰하여 저 멀리 몇 백 리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다. 긴 숲과 큰 들판은 꾸불꾸불 평탄하며, 누른 밭두둑 푸른 풀밭은 가로세로 뻗쳐 있어 하늘이 길어도 끝이 없고 새가 날아도 다하지 못하여 저 멀리 그 끝간 데를 알지 못하겠으니, 이른바 원(遠)이라는 것이다. 이 누에 오른 이는 장막속에 칼을 차고 창을 든 대부가 아니면 반드시 진신(搢紳)의 의관을 한 군자들로서, 모두 고명하고 원대한 의견이 있는 사람들이라, 눈을 들어 멀리 명원한 뜻을 보게 되니, 반드시 마음으로 터득하고 스스로 얻을 것이다. 전후에 원이 된 자가 또한 모두 밝게[明] 판단한는 재주와 크고 먼[遠] 그릇이 있어서, 비록 조그만 일을 경영하는 데도 역시 여러모로 계획해서 혹은 보충하고 혹은 더하며, 혹은 수리하고 혹은 고쳤으니, 그 마음 쓰는 것이 역시 부지런하지 않은가. 아, 명원이란 뜻을 크다고 할 것이다. 사람이 막힌 데를 보면 밝지 못하고 밝지 못하면 멀지 못할 것이니, 군자가 고명(高明)하고 궁원(窮遠)한 데 거하여 먼데를 보는 것이 오직 밝은 연후에라야 가히 이치가 통달하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니, 누라고 유독 그렇지 않겠는가. 신후(申侯)가 군을 다스린지 6년에 여기에 종사해서 정치를 잘한다고 조정에 알려지자 칭찬하고 멀지 않아 불러 들이게 되었으니, 명성이 더욱 밝게 나타나고 먼 곳에 전해졌음이 의심 없을 것이다. 내가 태사(太史)의 장(長)이 되었으니 불가불 대서특필하여 찬미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우선 이렇게 써서 기문을 삼노라.” 하였다.

이요루(二樂樓) 보통원(普通院)에 있다. 동수루(東水樓) 고을 서쪽 청통역(淸通驛)의 동남쪽 절벽 위에 있다. 두 물이 그 남쪽으로 합하여 흐른다. 문회루(文會樓) 남정원(南亭院)에 있다. ○ 최원우(崔元祐)의 시에, “숲 밖엔 긴 내요, 들 밖엔 산인데, 누에 의지하여 사람은 그림 속에 있구나. 이미 재주 있는 사람들 올라보는 곳에, 구름과 물건 천년에 정히 한가하지 않네.” 하였다. 『신증』 청량당(淸涼堂) 명원루 동쪽에 있다. ○ 조위(曹偉)의 시에, “새로이 화려한 집을 지어 물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내 여기 올라서서 있은 지 오래어라. 더운 바람 꽃다운 풀 개인 냇물 멀었고, 떨어지는 해 외로운 구름 새만 홀로 날고 있네. 산 안개 몽롱하여 주렴밖에 떨어지고, 버들 꽃 어지러이 모자 가에 불어오네. 밤이 깊자 달이 난간 위에 올라오니, 한결같은 청량(淸涼)한 맛 홀로 알고만 있네.” 하였다. 쌍청당(雙淸堂) 명원루 서쪽에 있다.

【학교】 향교 고을 북쪽 2리에 있다.

【역원】 청통역(淸通驛) 고을 서쪽 3리에 있다. 청경역(淸景驛) 고을 동쪽 38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신역(新驛)이라고 일컬었다. 장수역(長壽驛) 신녕현(新寧縣) 서쪽 5리에 있는데 군에서의 거리가 42리이다. 찰방(察訪)이 있고 본도(本道)의 속역(屬驛)이 14이니, 청통(淸通)ㆍ아화(阿火)ㆍ모량(毛良)ㆍ사리(沙里)ㆍ압량(押梁)ㆍ우곡(牛谷)ㆍ부평(富平)ㆍ청경(淸景)ㆍ구어(仇於)ㆍ화양(華陽)ㆍ의곡(義谷)ㆍ인비(仁庇)ㆍ경역(鏡驛)ㆍ조역(朝驛)이다. ○ 찰방 1인. 제천원(濟川院)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적률원(赤栗院)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요간원(要看院) 고을 동쪽49 리에 있다. 오읍포원(烏邑浦院) 고을 동쪽 12리에 있다. 신원(新院) 고을 동쪽 28리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임하원(臨河院)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길상원(吉祥院) 고을 서쪽 10리에 있다. 시천원(匙川院)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영등원(永登院) 고을 북쪽 24리에 있다.

【불우】 정각사(鼎脚寺)ㆍ공 덕사(功德寺) 모두 모자산(母子山)에 있다. 『신증』 운부사(雲浮寺)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혼자서 운부사를 찾아가니, 중의 방 고요해서 의지할 만하네. 골짜기 깊어 수레와 말이 적고, 중은 늙어 해는 더디 가네. 대나무 그림자 빈 걸상을 침노하고, 솔바람은 엷은 옷에 불어오네. 산신령 응당 어둡지 않으니, 집 짓는 것이 필경 시기대로 될 것이다.” 하였다. 백지사(柏旨寺) 『신증』유방선의 시에, “병을 피해서 산사에 와 있으니, 산중 일마다 신기로워라. 들나물 밥 싸먹기 부드럽고, 시내 고사리 국 속에 살쪄 있네. 방이 따뜻하니 아침 잠 편안하고, 등잔불 밝으니 밤 이야기 늦었어라. 중과 같이 있으니 마음 속되지 않아, 반쪽 달에 돌아갈 것 잊었네.” 하였다. 거조사(居祖寺)ㆍ은해성(銀海城)ㆍ원명사(圓明寺)ㆍ안흥사(安興寺)ㆍ상원사(上元寺) 모두 공산에 있다. 죽방사(竹防寺) 죽방산에 있다. 부귀사(富貴寺) 공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여단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태조지(太祖旨) 고을 서쪽 30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전하는 말에, 고려 태조가 견훤에게 패해서 퇴병하여 공산 밑 한 조그만 봉우리에서 보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영주성(永州城) 남정원(南亭院) 서쪽에 있는데, 고려 고종(高宗) 때에 동경적(東京賊) 최산(崔山)과 이유(李儒)가 난을 꾸미므로 임금이 이자성(李子晟)을 보내서 치게 했다. 자성이 밤을 세워 달려가서 영주성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적이 자성의 군사가 먼데서 급히 왔다하여 그 군사가 피로했을 때를 타서 공격하고자 하여 남교(南郊)에 주둔했다. 관군이 성에 올라 이것을 바라보다가 자성에게 고하기를, “우리 군사가 더위를 무릅 쓰고 멀리 왔고 적의 형세는 성하고 또 날카로워 가히 적을 당하지 못하겠으니 마땅히 성문을 닫고 군사를 쉬게 했다가 며칠 후에 그들과 싸우게 하옵소서.” 했다. 자성이 말하기를, “그것은 옳지 않다. 대체 피로한 군사가 쉬게 되면 더욱 게을러진다. 만일 여러 날을 끌게 되면 적이 우리 실정을 알게되어 딴 변이 생길까 두려우니 급히 공격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문을 열고 뛰쳐나가서 적이 진을 치기 전에 급히 쳐서 크게 격파하니 적의 시체가 수십 리에 깔렸다.

고읍성(古邑城) 고을 서쪽 2리에 있다. ○ 이첨(李詹)의 기문에, “《춘추》에 성에 대해 쓴 것이 24곳이 되는데, 모두 허여하지 않는 것은, 곧 시기가 아니요 의리에 해로우며 또 그 제도가 아니라 해서 그런 것이다. 비록 그렇지 않더라도 또한 쓴 것은 백성을 수고롭게 한 것을 중한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비록 공자(孔子)가 지금 세상에 났더라도 성이 제도에 어긋나지 않고 역사가 때를 어기지 않았으며 일이 의리에 맞게 되면, 반드시 특별히 써서 상주고 아름답게 여길 것이니, 어찌 그대로 두고 말겠는가. 임술년 봄에 이지중(李止中)후가 나가서 영주(永州)를 다스릴 때,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왜적이 침입해 왔다. 이 뒤로 모두 36차례나 계속하여 침입해오니, 영주 백성들이 모두 강을 건너 서쪽으로 도망해서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살면서, 동쪽으로 돌아올 뜻이 없었다. 그러나 이후가 이 성을 쌓는다는 말을 듣자 서로 이끌고 와서 역사에 참여하여 얼마 안 되어 성이 이루어졌다. 때에 마침 난리가 있으므로 이후는 지킬 준비를 한 다음 무리에게 명하여 성으로 들어가 군사를 거느리고 기다리고 있으니, 인심이 이미 견고해져서 적들이 어찌하지 못했다. 역사는 늦은 가을에 시작하여 중동(仲冬)에 완성했으니, 진실로 그 때를 얻었다 할 것이요, 편안한 도민들로 하여금 그 수고로움을 잊게 하여 급하고 빠르지 않게 하였으니, 의리가 진실로 그 속에 있다 할 것이요, 3리밖에 되지 않는 성이 백치(百雉)에 지나지 않으나 또한 제도에 맞지 않는다고 할 수가 없다. 이 세 가지가 이미 갖추어졌는데 당시 세상의 태사씨(太史氏)가 영주의 성을 쓸 줄을 모른 것은 잘못이 아닌가. 성을 쓴다는 것은 옛 법을 완전히 하는 것이요, 쌓은 걸 쓰는 것은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니, 이 성은 우연히 이후의 손으로 이루어져서 일시의 계획과 터를 닦는데 비로소 옛 기물(器物)을 얻었으니 반드시 그 옛터라고 한다면 단연코 이 성을 써야 할 것이다. 성은 고을 서쪽 청통역(淸通驛) 위에 있는데, 3면이 높고 끊어져 있으며 오직 남쪽만이 올라갈 수 있다. 이후는 나와 동방급제(同榜笈第)한 벗으로 그가 이런 큰 역사를 했다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또 아무런 허물도 짓지 않았다 하기로, 그 기문을 구하는데 있어 감히 내가 글이 졸렬하다고 해서 사양하지 못했노라.” 하였다.

도동폐현(道同廢縣)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본래 신라 도동화현(刀冬火縣)이니, 경덕왕(景德王)이 고쳐서 도동(道同)이라 하여 임고군(臨皐郡)의 영현을 삼았었는데, 고려 초년에 인하여 소속시켰다. 임천폐현(臨川廢縣) 본래 골화소국(骨火小國)인데 신라 조분왕(助賁王) 때에 이곳을 쳐서 빼앗아 가지고 현(縣)을 두었었다. 경덕왕이 임천(臨川)으로 고쳐서 임고군의 영현을 삼았다. 고려 초년에 인하여 붙였으니 고을 동남쪽 5리에 있다. ○ 김유신(金庾信)이 고려를 칠 계획으로 골화관(骨火館)에 나와 잤는데 바로 이곳이다. 《삼국유사(三國遺史)》에 있다. 면백현(黽白縣) 본래 신라의 매숙차현(買熟次縣)이던 것을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신녕현(新寧縣)에 소속시켰다. 전하(殿下) 6년에 와서 붙였다. 고신녕(古新寧) 신녕현(新寧縣) 동쪽 25리에 있다.

【명환】 본조 정차공(鄭次恭).

【인물】 고려 황보능장(皇甫能長) 태조(太祖) 때 사람이며, 금강성장군(金剛城將軍)이 되어 공이 있다. 자기가 일으킨 땅 골화(骨火)ㆍ도동(道同) 등 현을 합쳐서 영주(永州)를 만들었다. 본조 이승손(李承孫) 세종조(世宗朝) 때 과거에 뽑혀 벼슬이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성정(成靖)이다. 이응(李膺) 과거에 뽑혀 벼슬이 병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경(貞景)이다. 이순몽(李順蒙) 응(膺)의 아들인데, 벼슬이 영중추원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위양(威襄)이다. 이종검(李宗儉)ㆍ이종겸(李宗謙) 경기 용인(京畿龍仁) 우거(寓居) 편에 자세하다.

【우거】 고려 정몽주(鄭夢周) 고을 동쪽 우항리(亐項里)에서 났으며, 영일(迎日) 인물(人物) 편에 자세하다.

【효자】 본조 이감(李敢) 벼슬이 밀양 부사(密陽府使)에 이르렀다. 부모를 위하여 여막에서 3년을 사니 선덕(宣德) 병오년에 정문을 세웠다. 양배(楊培) 벼슬이 동래 병마사(東萊兵馬使)에 이르고, 부모를 위하여 3년 동안 여막에서 살아서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신증』 【열녀】 본조 이씨(李氏) 권성필(權成弼)의 아내이다. 연산조(燕山朝) 때 남편이 죽임을 당하자 이씨는 관비(官婢)로 있으면서 자기 남편이 죄 없이 죽었다하여 일찍이 자결하려 하는 것을 그 어머니가 말렸었다. 사람이 그를 겁탈하려하였으나 이씨는 항상 조그만 칼을 차고 자기 몸을 방비해서 마침내 범하지 못했다. 금상(今上) 2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누고옥적성요두(樓高玉笛聲搖斗) 이징(李澄)의 시에, “누가 높아 옥피리 소리 별을 흔들고, 하늘이 가까우니 달 그림자 술잔에 거꾸러지네.” 하였다. 차어소점연롱저(叉魚小店煙籠渚) 정조(鄭慥)의 시에, “고기 잡는 조그만 주막 연기가 물가에 덮여 있고, 손님을 대한 높은 마루에 달이 술잔에 들어오네.” 하였다. 야평운츤지(野平雲襯地)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들이 평평하니 구름이 땅에 가깝고, 내가 머니 물이 하늘에 떴네.” 하였다. 강류부진겸천거(江流不盡兼天去)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강 흐름이 다하지 않아 하늘과 함께 가고, 산 빛 평평하게 나뉘니 땅을 말아 오네.” 하였다. 여염희소불의군(閭閻稀少不宜郡) 유방선의 신녕현(新寧縣) 시에, “민가가 드물게 있으니 고을 되기 마땅치 않고, 수목이 울창하니 도리어 마을과 같네.” 하였다. 계도누전각불류(溪到樓前却不流) 홍여방(洪汝方)의 신녕현 시에, “시내가 누 앞에 이르러 문득 흐르지 않고, 빙빙 돌아 맑게 머무는 것은 누구를 위함인가. 제 마음은 이로부터 가득 찬 뒤에 흐르려 함이라. 이름 내기 급급해 하는 것 비웃는 듯하네.” 하였다. 계함월색정진심(溪涵月色淨塵心) 윤자영(尹子濚)의 신녕현 시에, “이른 저녁 찬 매미 먼 숲에서 울제, 앉아 있노라니 풍치가 족히 옷깃을 열어주네. 주원(周原)에는 감히 황화(皇華)의 시를 이었고, 단보(單父)에는 오히려 복천(宓賤)의 거문고를 자랑하네. 대나무는 가을 바람 이끌어서 손의 꿈을 맑게 하고, 시내는 달빛을 머금어 세상 마음 씻어주네. 고향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취미 많으니, 우습다, 장생(莊生)의 월음(越吟)을 읊음이여.” 하였다. 요체만환소소계(繞砌灣環小小溪) 서거정의 신녕현 시에, “뜰을 두르고 언덕을 감아돈 조그만 시내에, 만 줄기 푸른 대나무 가지가 나지막 해라. 한 마루 정다운 생각 물보다도 맑으니, 가지가지 그윽한 새들 제 멋대로 울고 있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내동(內東) 끝이 10리이다. 내서(內西) 끝이 10리이다. 완산(完山)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추곡(追谷)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고촌(古村) 동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50리이다. 원당(元堂) 동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칠백(七百)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이다. 거여(巨餘)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이다. 고현(古峴)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이다. 북습(北習) 서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이다. 산저(山底) 서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5리이다. 아천(阿川)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즐림(櫛林) 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명산(鳴山) 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5리이다. 자천(慈川) 북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80리이다. 구천(仇川) 북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1백 리이다. 비태곡(比台谷)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후곡(厚谷) 처음은 30리, 끝은 50리이다. 부곡(釜谷) 처음은 15리, 끝은 25리이다. 모사동(毛沙洞)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창수(蒼水)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환귀(還歸)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성곽】 읍성(邑城) 선조(宣祖) 24년에 쌓았다. 둘레 1천 9백 2척이며 우물 세 개가 있다. 고읍성(古邑城) 서쪽 2리에 있는데, 고려 신우(辛禑) 8년에 쌓았다. 둘레가 1천 3백 척이며, 우물 세 개가 있다. 임천고현성(臨川古縣城) 남정원(南亭院) 서쪽에 있는데, 읍에서 동남쪽으로 5리 떨어져 있다. 고려 고종 20년에 이자성(李子晟)이 이 성에 의거하여 동경(東京)의 적을 대파하였다. 금강성(金剛城) 동쪽에 옛터가 있는데 곧 동현성(同縣城)이라 일컫는다.

【봉수】 구토현(仇吐峴)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창고】 읍창(邑倉) 두 개가 있다. 북창(北倉) 동쪽으로 40리에 있다. 자창(慈倉) 북쪽으로 60리에 있다. 동창(東倉)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남창(南倉) 남쪽으로 35리에 있다. 산창(山倉) 칠곡(漆谷) 가산산성(架山山城)에 있다.

사원】 임고서원(臨皐書院) 명종(明宗) 을묘년에 세웠으며, 선조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정몽주 문묘 조에 보라. 황보인(皇甫仁) 자는 사겸(四兼)이요, 호는 지봉(芝峯)이며, 영천인(永川人)이다. 단종(端宗) 계유년에 화를 입었으며,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장현광(張顯光) 성주(星州) 조에 보라. ○ 도잠서원(道岑書院) 광해주 계축년에 세웠으며, 숙종 무오년에 사액하였다. 조호익(曹好益) 자는 사우(士友)요, 호는 지산(芝山)이며, 창녕인(昌寧人)이다. 벼슬은 안주목사(安州牧使)였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3권 

  

 경상도(慶尙道)

 

영일현(迎日縣)


동쪽으로 해안까지 14리이고, 장기현(長鬐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 경주부(慶州府) 경계까지 10리이며, 서쪽으로 경주부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으로 흥해군(興海郡) 경계까지 25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8백 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근오지현(斤烏支縣)으로 일명 오량우현(烏良友縣)이라고도 했다. 경덕왕(景德王) 때 임정현(臨汀縣)이라 개칭하여 의창군(義昌郡)의 속현으로 하였고, 고려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때는 경주에 속했다. 공양왕(恭讓王)이 감무를 두어 군을 관장한 만호가 겸하게 했고, 본조 태종 때, 진을 두어 병마사가 지현사(知縣事)를 겸하게 했으며, 세종(世宗) 때, 병마첨절제사로 개칭했다가 후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근오지현(斤烏支縣)ㆍ임정현(臨汀縣)ㆍ오천현(烏川縣)ㆍ오량우현(烏良友縣).

【성씨】 본현 정(鄭)ㆍ성(成)ㆍ주(周), 주(朱)ㆍ김(金)ㆍ최(崔) 모두 내성(來姓)이다.

【형승】 해적들이 내왕하는 요충지이다 이숭인(李崇仁)의 〈신성기(新城記)〉에 있다.

【산천】 운제산(雲梯山) 현의 남쪽 12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진전산(陳田山) 현의 동남쪽 30리에 있다. 대흥산(大興山) 현의 북쪽 23리에 있다. 사화랑산(沙火郞山)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사현(沙峴) 현의 동쪽 17리에 있다. 동을배곶(冬乙背串) 현의 동쪽 73리에 있다. 장기현(長鬐縣) 조에도 있다. 향점(杏岾)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바다 현의 동쪽 14리에 있다. 주진(注津) 현의 북쪽 15리, 즉 경주 안강현(安康縣) 형산포(兄山浦) 하류에 있으며, 동쪽은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매년 겨울이면 청어가 반드시 맨 먼저 여기에서 잡힌다 하는데, 먼저 나라에 진헌한 다음에야 모든 읍에서 그것을 잡았다. 잡히는 것의 많고 적음으로 그 해의 풍흉을 짐작했다 한다. 임곡포(林谷浦) 현의 동쪽 27리에 있다. 통양포(通洋浦) 현의 북쪽 22리에 있으며 옛날에는 만호영(萬戶營)이 있었으나 지금은 흥해군(興海郡) 칠포(漆浦)로 옮겼다. 벌지(伐池) 현의 동쪽 3리에 있다. 죽도(竹島) 현의 북쪽 16리에 있으며 대밭이 있다.

【토산】 꿀[蜂蜜], 죽전(竹箭) 대흥산(大興山)에서 난다. 송이[松蕈]ㆍ해달ㆍ방어(魴魚)ㆍ연어(鰱魚)ㆍ전복[鰒]ㆍ방풍(防風)ㆍ넙치[廣魚]ㆍ대구(大口)ㆍ홍합(紅蛤)ㆍ은어[銀口魚]ㆍ청어(靑魚)ㆍ김[海衣]ㆍ미역[藿], 벼룻돌[礪石] 운제산(雲梯山)에서 나는데 그 품질이 아주 좋다. 황어(黃魚)ㆍ전어(錢魚)ㆍ상어[鯊魚]ㆍ송어(松魚)ㆍ홍어(洪魚)ㆍ고등어[古刀魚].

【성곽】 읍성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2천 9백 40자, 높이는 12자이고 안에 3개의 우물이 있다. ○ 이숭인(李崇仁)의 기문에, “일찍이 《맹자》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못하단 대목이 있었다. 그렇다면 성곽(城廓)이나 성지(城池)가 다스리는데 있어서는 말단적인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춘추》의, ‘호뢰(虎牢)에 성을 쌓다.’란 대문[策]을 읽음에 이르러서 그 서법(書法)을 보면 옳게 여기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 성현의 말씀들은 본말과 선후의 순서가 있으니, 어느 것이고 세도를 위해 마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내가 중원(中原)에 봉사(奉使)한 적이 두 번이었는데, 지나는 길에 비록 몇 집 안 되는 고을이라도 역시 모두 보장하는 것이 있음을 보았다. 지형을 점거하고 성을 쌓는 일을 어찌 적게 여길 수 있겠는가. 우리 동방에도 국가제도가 있고 중국을 배울 줄 알았지만, 소박 간략하고 문채가 적어, 선조(先祖) 이래로 백성을 휴양하고 생식함에 있어서 백성들이 태평한 그 속에 살고 죽고 한 지 4백 년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 문(文)으로 다스림을 제어할 수 없었고, 무(武)로는 난을 평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다 섬의 고약한 것들이 감히 연변에 침입하였으니. 경인년에 침입한 왜적이 바로 그것이다. 짓밟혀서 경신ㆍ신유년 두 해 동안에 병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 치안이 극진하게 되면 사세가 어지러워지지 않을 수 없으니, 또한 적을 막고 방비하는데 있어 그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일(迎日)은 계림(鷄林)의 속현으로, 동쪽 해안에 위치해 있고, 그 치역(治域)은 또 통진포(通津浦)에 임하고 있으니, 실로 해적들이 내왕하는 요충이다. 경인년에 병들기 시작함으로부터 30년이 지났으니 생산하고 모은 것이 쓰러버린 듯하였다. 기사년에 삼도 도체찰사가 현의 옛 치역을 지나다가 두루두루 살펴보고 위연(喟然)히 탄식하며, ‘이것을 어찌 왜적에게 주어서 그들의 좋은 일이 되게 할 수가 있겠느냐.’ 하고는 축성(築城)에 관한 일을 논의하였으나 얼마 후엔 지반이 좁은 것같다 하며 구촌(丘村)에 장소를 옮겨 흙으로 쌓기에 힘썼지만 비가 오면 무너졌다.

경오년 오월에, 익양(益陽) 최후(崔侯)가 만부장(萬夫長)으로 여기에 오게 되어 현의 일을 겸하여 맡게 되자, 정령(政令)이 크게 실행되어 백성들이 그의 밑에서 일하기를 즐겼다. 최후가 이에 도관찰사에게, ‘우리 고을이 힘입어 존재하는 바는 성인데, 성이 이미 무너졌으니, 이는 우리 고을이 없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라고 말했다. 관찰사도 최후의 말을 옳게 여기고, 옆 고을에 명령을 내려 천여 명의 인부를 동원하고, 인해서 전 선공령(繕工令) 정인생(鄭麟生)을 시켜 최후와 함께 일을 감독하게 했다. 최후는, 생각하기를, ‘공은 오래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니, 그러기엔 돌로 쌓는 것이 낫다.’ 하고 이에 선부(船夫)를 보내어 형산(兄山)의 돌을 떠서 날라다가 성을 쌓으니, 두 길 남짓하고 둘레는 모두 몇 리나 되었다. 남북에 두개의 문을 두었는데, 문에는 각각 문루(門樓)를 세웠으니, 남쪽의 것은 대개 손님과 나그네를 맞이하고 갈고 심는 것을 시찰하는 것이요, 북쪽은 바다를 내다보고 간악한 도적을 살피자는 것이었다. 7월에 착공하여 9월에 준공하니, 이때부터 읍성에는 전에 떠났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오고, 새로 오는 자도 연이어서 성 둘레에는 황폐한 전답이 없어졌다.

금년 가을, 최후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기문을 써주오.’ 하고 또 말하기를, ‘두 문루를 이름지으라.’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최후가 바야흐로 성군(聖君)과 현상(賢相)이 새로운 정치를 시도하고 있는 때를 만나서, 조정에서 뽑혀 이 먼 곳 백성을 맡아서 위문하고 보호하는 방법과 막고 보위하는 제도가 모두 칭찬하여 말할 만하니, 모든 역사에 실려 있는 바에 비교해 보면 그의 발길이 미친 바는 하나도 부끄러울 것 없는 것이다. 나는 병들었고, 게을러졌다. 비록 그러나 남의 잘한 일을 말하기 좋아함은 본시 나의 뜻이다. 뿐만 아니라, 최후의 선친 시어(侍御)는 내가 제생(諸生)으로 있을 제 모시었으니, 그러므로 최후의 청함에 사양하지 못하겠노라. 문루(門樓)의 이름을 지으라는 일은, 내 병이 조금 낳으면 말을 타고 놀러 가서 최후를 따라 누 위에 올라가서 지도를 살펴 보고, 또 지형을 파악한 다음, 그때 가서 마땅히 붓에 먹물 찍어서 쓰려 한다. 최후의 이름은 자원(自源)이요, 벼슬 품계는 봉순대부(奉順大夫)이다. 훤출한 마음으로 공을 세우고 이름내기를 좋아한다. 도관찰사는 낙안 김씨(樂安金氏)로 이름은 주(湊)이고, 도체찰사(都體察使)는 종실(宗室)로 이름은 강(康)이다.” 하였다.

【봉수】 동을배곶(冬乙背串) 봉수 동쪽으로 장기현(長鬐縣) 장곡(獐谷)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흥해군(興海郡) 지을산(知乙山)에 응한다. 사화랑산(沙火郞山) 봉수 서쪽으로 경주 형산(兄山)에 응하고, 동쪽으론 장기현 뇌성산(磊城山)에 응한다.

【누정】 의운정(倚雲亭) 객관의 북쪽에 있다.

인빈당(寅賓堂) 의운정의 서쪽에 있다. 성화(成化) 경자년에 현감 어득호(魚得湖)가 세웠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기문에, “동녘 바닷가에 고을이 있으니, 그 이름은 영일(迎日), 혹은 임정(臨汀)이라 하는데, 대개 신라 동편 가에 위치한다. 신라 초기엔 혼돈(渾沌)이 개착(開鑿)되지 않은지라. 제도가 들을 만한 것이 없더니, 그 중엽에 이르러 현군(賢君)이 잇달아 일어나서 처음으로 중국과 통하여 상고하고 연구해서 날로 문화가 발전하여 아침 해와 같은 것은 《국어(國語)》에 실린 것과 같고, 춘분(春分)에 아침 해를 맞고[賓出], 추분(秋分)에 저녁 해를 보내던[餞納] 일들은 〈요전(堯典)〉에 적혀 있다. 이는 옛 제왕들이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에게 때를 정하여 주었던[授入時] 일인 줄로 여겨지는 바, 그 정치라는 것은 이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비록 조종(祖宗)에는 이런 일이 없었어도 또한 옳은 것을 따라서 하는 것이다. 관제에는 태사(太史 천문(天文)과 역사를 맡은 벼슬)를 두어 대(臺)를 높이고, 별을 관측[瞻星]하여 역상(曆象)과 규측(圭測)의 제도가 따라서 점점 갖추어졌으니, 그때에 있어서는 이 현(縣)이 그 양곡(暘谷)의 차례에 당해 있으므로, 이름을 영일(迎日)이라고 한 것은 이 까닭이었다. 그런데 고려 태조(太祖)는 국가가 교체되는 즈음에 있어서 임정(臨汀)이란 이름을 버리고 지금의 이름으로 복귀시켰으니, 어찌 까닭 없는 일이라 하겠는가.

일찍이 듣건대, 현의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도기야(都祈野)가 있고 일월지(日月池)가 있어서 지금까지 사람들은 신라 때 제천(祭天)하던 곳이라 하니, 이것이 그 명확한 증거인데, 속설에 전하는 바 영오(迎烏)와 세오(細烏) 부부의 이야기는 어쩌면 그렇게 적당하지 아니한가. 신라 사람들의 괴상한 일 좋아함이 이와 같아 증빙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성화(成化) 13년 중원(中原) 출신 어득호(魚得湖) 후(侯)는 무예와 관리의 재능으로 이곳에 인을 맡아 가지고 와서 덕망이 두터우니, 사람들이 믿으며 바다는 편안하고 농사도 풍년이 들었다. 늘 의운정을 배회하면서 훌륭한 경개를 구경하더니, 또 빈객으로 놀러 오는 이들을 이곳에서 따뜻하게 하고 시원하게 해주기 위해 다시 정자 오른편에 당(堂)을 지어 냉방과 난방을 갖추기도 했다. 바르고 꾸미는 것이 끝나자 나한테 기문을 써 달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내 일찍이 울산(蔚山)에 부임하여 군사를 사열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현에 이르러서 소위 의운정에 올랐는데, 고을 사람들 말에, 이것은 옛날 이사군(李使君) 지명(知命)이 세운 것이라 한다. 내 멀리 바라보니, 남쪽으로 5리쯤 떨어진 곳에 산이 있었는데, 운제산(雲梯山)이라 한다. 높이 솟아 있고 나무가 울창하였으며, 구름을 뿜고 안개를 빨아들이는데 산중에는 소성거사(小性居士)의 유적이 있다 한다. 동북쪽으로 7리를 가면 큰 바다가 있는데, 거센 파도가 하늘에 맞닿았고, 신기루가 저자를 이루었으니, 곧 일본의 서녘 바다이다. 산과 바다의 사이에는 전원이 넓고 크고, 내와 못이 있으며, 겹겹이 쌓인 곳에 언덕이 있어 그 이름 피막(皮幕)이요, 정자 있어 그 이름 대송(大松)이다. 모래톱은 흰빛을 발하고, 송죽(松竹)은 푸른빛을 보내며, 뽕나무와 삼으로 울타리하여 멀고 가까운 것 비추고 둘려서 한데 어울리고 서로 도와서 이 성문 밖에 재주를 펼쳐 놓았다. 저물어 자고 다음날 이른 새벽, 정자 위에 기대서서 고개 들고 동녘을 바라보니 구름과 물이 한 빛이라, 날이 샐락말락할 무렵이었다. 금시에 분홍빛이 수십장 치솟더니, 태양이 용솟음치며 하늘에 떠오른다. 나는 깜짝 놀라, ‘오늘의 장관이야 말로 정말 고을의 이름과 부합되는도다.’ 라고 탄식했다.

이후는 선배이며 또 호걸스런 선비이다. 그래서 그의 규획한 바가 이와 같이 천기의 깊은 데까지 볼 줄 알았다 하겠다. 지금의 어후는 이후보다 약 40년 뒤에 왔지만, 이후가 미처 못한 것을 윤색(潤色)하였으니, 이 당(堂)의 이름을 굳이 누정(樓亭)의 이름과 같게 할 필요는 없고 인빈당(寅賓堂)이라고 편액을 써서 현의 이름에 짝지어 본다. 아, 천하에 해변이 한 군데가 아니건만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우이[嵎夷]를 측후소(測候所)로 하였고, 우리나라에서도 해변이 한 군데가 아니지만 계림(鷄林)의 임정(臨汀)을 해 맞는 곳으로 삼았으며, 어후가 비록 희씨(羲氏), 화씨(和氏) 같은 측후관도 아니지만 6년 동안을 어느 하루도 부상에서 돋는 해를 맞이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 내가 한 말이 적중했다고 하지 않겠는가. 어후께서 만약 마음에 드신다면 이 기문을 전해도 좋고, 아니면 다시 당세의 훌륭한 문장가를 구하여 기록함이 좋을까 한다.” 하였다.

대송정(大松亭) 현의 동쪽으로 7리 떨어진 곳에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베개 삼아 백사장이 있는데 푸른 소나무 수백 그루가 그 사장을 덮고 있다.

【학교】 향교 현의 북쪽으로 5리에 있다.

【역원】 대송역(大松驛) 현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혜제원(惠濟院) 현의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있다. 아미라원(阿彌羅院) 현의 북쪽으로 12리에 있다. 주진원(注津院) 주진(注津)의 북녘 기슭에 있다.

【불우】 원효사(元孝寺)ㆍ오어사(吾魚寺) 모두 운제산(雲梯山)의 동쪽 항사동(恒沙洞)에 있다. ○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신라 때, 중 원효(元曉)가 혜공(惠公)과 함께 물고기를 잡아서 먹다가 물 속에 똥을 누었더니 그 물고기가 문득 살아났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내고기(吾魚)’라고 말하고, 절을 짓고 인해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한다. 자장사(慈藏寺) 운제산(雲梯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의 동쪽으로 8리 떨어진 곳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대왕암(大王巖) 운제산 산마루에 있으며, 현에서 남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있다. 바위 틈에서 샘물이 솟아 나는데, 가뭄에 비를 빌면 곧 비가 내렸다 한다.

일월지(日月池) 현의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도기야(都祈野)에 있다. ○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때에 동해 가에 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남편은 영오랑(迎烏郞)이라 했고, 아내는 세오녀(細烏女)라 했다. 하루는 영오가 바닷가에서 해조(海藻)를 뜯다가 갑자기 표류하여 일본의 작은 섬에 이르러서 왕이 되었고, 아내는 그 남편을 찾아 일본에 가서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게 되자, 태양을 관측하는 자가 왕에게, “영오와 세오는 해와 달의 정기를 탄 사람들인데, 이번에 일본에 갔기 때문에 이런 괴변이 있는 것입니다.” 라고 아뢰니,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두 사람을 데려오라 했다. 그랬더니 영오는 말하기를, “내가 하늘에 이르러 곧 세오가 짠 비단을 부칠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하오.” 하여 사자가 돌아와 그 말대로 아뢰어 못[池]에서 제사하니 해와 달이 다시 빛을 내었다. 드디어 그 비단을 어고(御庫)에 두고는 따라서 그 못을 이름 지어 일월지(日月池)라 했고, 현의 이름을 영일(迎日)이라 했다 한다. ○ 이제 상고해 보면 고려 초에 임정현(臨汀縣)의 이름을 고쳐 영일현(迎日縣)이라 했으니, 신라 아달라왕 때에 비롯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영오의 이야기는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와 권근(權近)의 《동국사략(東國史略)》에는 보이지 않고 다만 《삼국유사》에만 수록돼 있으니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고읍성(古邑城) 현의 북쪽 7리 떨어진 곳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는 9백 자이나 지금은 없어졌다. 도지부곡(都只部曲)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고현성(古縣城) 현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았다. 둘레가 1천 척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명환】 고려 이인부(李仁夫) 통양포(通洋浦)의 만호로서 현의 감무를 지냈다. 군사에 정숙(整肅)히 했고, 정치를 공평히 하고, 송사(訟事)를 이치에 합하게 하니, 비록 우부(愚婦)라 해도 그의 덕망에 감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인부의 아버지가 군사에 죄를 지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기를 간청하고 옷을 벗고 형을 받으려 하니 그것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인물】 고려 정습명(鄭襲明) 성격이 대범하고 기이하며 위대하였고, 힘써 배워 글을 잘하고 향공(鄕貢)에 급제하였다. 인종(仁宗)조에 여러 번 벼슬하여 예부 시랑(禮部侍郞)에 이르렀고, 의종(毅宗)이 즉위하자 추밀원 지주사에 올랐다. 선조(先朝)의 부탁이 있다고 하여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왕이 그를 꺼리는 데다가 김존중(金存中)과 정함(鄭諴)이 밤낮으로 그를 헐뜯었다. 마침 습명이 병을 고하자, 김존중에게 임시로 그 직을 대신하게 하니, 습명이 왕의 뜻을 알아차려 독약을 먹고 죽었다. 정몽주(鄭夢周) 습명(襲明)의 후예이다. 사람됨이 매우 호방하고 뛰어나며, 충효(忠孝)의 대절(大節)이 있었다.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는데, 성리학(性理學)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깊이 얻은 바가 있었다. 공민왕(恭愍王) 9년에 과거에 응시하여 잇따라 삼장(三場)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드디어 제1인자로 발탁되었다. 예문관 검열에 뽑혀 보임되었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삼한 삼중대광 수문하시중 판도평의사(三韓三重大匡守門下侍中判都評議使司)에 이르렀고, 익양군 충의백(益陽郡忠義伯)에 봉해졌다. 그때엔 국가에 변고가 많았고, 기무(機務)가 번다하였으나, 큰 일을 처리하고 큰 의혹을 처결하는데 말소리와 얼굴빛을 동요하지 아니하고, 왼편과 말하고 오른편에 대답하는데 모두가 합당하게 처사하였다. 많이 갱신하고 시설하였는데 당시에 왕좌(王佐)의 재주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뒤에 우리 태조(太祖)를 방해하고자 꾀하다가 조영규(趙英珪)에게 피살되었다. 본조에서는 그 충절을 가상하게 여겨,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익양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益陽府院君)을 내리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으며, 그의 자손을 등용하게 하였다. 아들 종성(宗誠)은 벼슬이 이조 참의에 이르렀고, 종본(宗本)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이르렀다. 정사도(鄭思道) 나이 19세에 과거 급제하여 감찰규정(監察糾正)과 성균관 사예를 역임했고, 대언(代言)에 발탁되어 지신사(知申事)에 올랐으며, 일성군(日城君)에 봉해졌다.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모든 천신(天神)에게 빌어 청하는 일이 있는 경우엔, 왕은 반드시 정사도를 임명하였으니, 그 정직함을 취택함이었다.

『신증』 【효자】 본조 전희(田禧) 부모가 죽자 3년 동안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살았고, 뒤에는 그대로 무덤 곁에 살면서 조석으로 곡을 하며 제사하기를 오랜 뒤에도 처음과 같았다. 일이 알려지자 정려하였다.

【제영】 일금상기재초루(一襟爽氣在譙樓) 설장수(偰長壽)의 시에, “산나물, 물고기로 진수성찬을 벌여 놓고, 들바가지에 촌막걸리로 오래 못 돌아간 정 위로하네. 한밤에 깊은 시름 나그네 꿈을 쫓으니, 한소매 시원한 바람 문루에 감도누나. 흥이 나면 붓을 들어 시편을 거듭읊고, 늙어가며 정에 겨워 눈물 자주 흘리네. 이 설음 씻을 길 종당엔 희망 있으련만, 하늘이 기꺼이 이 몸을 구제해 줄 것인지.” 하였다.

일성장적석양루(一聲長笛夕陽樓) 정흥(鄭興)의 시에, “고향이 황폐한 것을 노인들은 부끄럽다지만, 나는 기이한 경관을 사랑해서 또 좀 머물겠네. 두어 폭의 외로운 범선 남포 언덕이요, 한 가락 긴 피리 석양의 다락일세. 부생(浮生)이란 뒤숭숭한 것, 나그네도 다감하고, 지난 일은 유유한 것, 강만이 흐르누나. 흥폐가 본시 오가는 것이라면, 이번엔 백성에게 부요하기 기대하네.” 하였다.

거해만만제천원(巨海漫漫際天遠) 유관(柳觀)의 시에, “앉아서 청산을 마주하면, 다시 부끄러워지네. 하는 일없이 녹만 축내며 오래도 머물러 있네. 시를 지으려다 못 이루고 되려 붓을 던지고, 경개 즐겨 구경하다가 돌아갈 것 잊고 홀로 누대에 기대본다. 큰 바다는 넓고 넓어 하늘에 닿은듯 멀고, 장강(長江)은 출렁출렁 성을 끼고 흘러가네. 야인(野人)의 정회로 푸른 물결 달빛 아래에 오래 앉았으니, 파도 위의 백구야 너는 나를 이해하려느냐.” 하였다.

야활천수벽(野闊天垂碧) 정예(鄭枻)의 시에, “넓은 바다 고현(古縣)에 이어 있으니, 연기와 물결 먼 하늘에 닿았도다. 들이 넓으니 하늘은 푸른 들과 맞닿았고, 파도가 맑으니 해가 붉은 빛을 물들였네. 섬의 왜적들 모두 자취를 감추어서, 마을 풍속 다 농사 일로 돌아갔네. 성지(城池)의 견고함이 무엇에 필요하랴. 인화(人和)만이 성화(聖化)에 통하는 길인 것을.” 하였다.

강원수탄공(江遠水呑空) 강진덕(姜進德)의 시에, “땅이 외지니 연기가 바다에 닿았고, 강이 멀리 흘러 물이 하늘을 삼킨 듯하이. 들이 넓어서 봄바람 담담하고, 처마가 비었으니 아침 햇살 붉게 비친다. 옛날에 일찍이 백전(百戰)을 겪었더니, 이제는 삼농(三農 평지ㆍ산ㆍ못에서 경영하는 농업의 총칭)으로 돌아갔네. 성군의 은택은 동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러서, 변방의 구석까지 대도가 절로 통하였구나.”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끝이 5리이다. 서면 처음은 7리, 끝은 15리이다. 남면 처음은 7리, 끝은 15리이다. 고현(古縣) 동남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20리이다. 역면(驛面) 동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5리이다. 고읍(古邑) 북쪽으로 처음은 7리, 끝은 15리이다. 부산(夫山) 동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70리인데, 장기현 북쪽 경계를 넘어서 동을배곶의 바닷가에 있다. ○ 도지(都只)부곡은 북쪽으로 8리에 있다.

【진보】 혁폐 통양포진(通洋浦鎭) 북쪽으로 22리에 있으며 수군만호를 두었다가, 뒤에 흥해군(興海郡) 칠포에 옮겼다.

【창고】 읍창(邑倉)ㆍ포항창(浦項倉) 북쪽으로 20리, 통양포 주진(注津) 하류에 있다. 영종(英宗) 8년에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북관(北關)의 자본으로 창(倉)을 설치하였으며, 별장을 두어서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본도 감사 조현명(趙顯命)의 청에 따른 것이었다.

【진도】 주진(注津) 북쪽으로 15리, 경주 형산포(兄山浦) 하류이며 흥해로 통한다.

【사원】 오천서원(烏川書院) 선조 무자년에 세웠으며 광해주 임자년에 사액하였다. 정습명(鄭襲明) 영일 사람이다. 고려 의종(毅宗) 신묘년에 약을 마시고 죽었으며, 벼슬은 추밀원 지주사였다. 정몽주 습명의 후손이다. 문묘 편을 보라. 정사도(鄭思道) 고려 때 사람이며,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이고, 오천군(烏天君)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정철(鄭澈)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이며, 본관은 영일이다. 벼슬은 좌의정이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이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 위 두 사람은 영조 경신년에 별사(別祠)를 세워 그들을 배향하였다.



[주D-001]대문[策] : 책(策)이라는 말은 대쪽이란 말이다. 예전에 종이를 발명하기 이전에는 흔히 대쪽에다가 글을 써서 간(簡)이니 책이니 하였던 것이니, 즉 한 장이란 말과 같은 것이나 원래 한 개의 대쪽에 많은 말을 쓰기 어려워서 한 마디나 한 대문밖에 써지지 않는다.

[주D-002]서법(書法) : 《춘추(春秋)》는 원래 공자가 그 시대 2백 40년간의 정치적인 사건을 포폄(褒貶)하기 위하여 쓴 것이었다. 그 한 대문 한 구절에 쓰는 방법에 따라 칭찬[褒]하고 비난[貶]하는 뜻을 보였는데 그것은 쓰는 방법[書法]이라 하였었다.

[주D-003]혼돈(混沌)이……않은지라 : 혼돈이란 말은 태초에 천지가 아직도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았다는 말인데 혼돈이 개착되지 않았다는 말이 즉 천지가 구분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주D-004]《국어(國語)》 : 《국어(國語)》는 춘추 시대에 일어난 일들을 그 나라로 구분하여 기술한 것인데 누구의 저작인지 알지 못한다. 좌구명(左邱明)의 작이라 함은 의심스럽다.

[주D-005]등주(登州)와 내주(萊州) : 중국 산동반도의 동쪽 끝에 있는 고을들이다.

[주D-006]왕좌(王佐)의 재주 : 왕(王)은 인의와 도덕으로 천하를 통치한다는 것인데, 그 왕천하를 도와서 인의 도덕을 잘 펼 수 있게 하는 사람을 왕좌의 재주라고 한다.


 

영일현읍지(1832)

 

<군명>

근오지 임정 오천 오량우

 

<성씨>

성 주 주 김 최  병래

이 권 유 진 정 신 백

***오천(영일, 연일) 정씨가 맨 먼저 나온다.

 

<신증 오천서원>

재현동십리고현성

고려지주사형양공정습명

문충공포은정몽주소향야

만력사십일 선액

 

<塚墓>

고려추림원지주사형양공

정습명묘 재현남구읍성내

 

<新增 文忠洞>

雲梯山下有文忠洞

俗傳鄭夢周誕(?)生之地

廟基礎石宛

在其東十里許 有靑林里 內 圃隱舊坵

咸傅林行狀鄭夢周慶州府迎日縣人也

中居于永川

운제산 아래에 문충동이 있다.

민간에 정몽주의 탄생지라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문충동에 지금 포은을 모시던 예전) 사당의 주춧돌이 완연하게 (남아)있다.

문충동의 동쪽 10리 거리에 청림리가 있고, 그 마을에 포은의 옛 고향

(나고 자란 生長地가 아니라 본관의 고향, 관향, 포은의 선대가 살던 터)이 있다.

함부림이 지은 행장에 정몽주는 '경주부 영일현인'이라고 하였다.

중간에(오천 정씨 시조 정습명 이후 정몽주 탄생까지의 중간 시기에 오천 정씨 포은의 선대가)

영천에 (이주하여) 세거하였다.

 

***1832년 읍지 편찬 당시에 사당 주춧돌이 완연하다고 하였다.

포은의 선대가 살던 관향이 오천(구체적으로 영일현치 동쪽 10리 지점의 청림리 일대)이기에

 '문충사'라는 이름의 사당이 신라 고찰 오어사가 있는 운제산 입구,

비교적 한적하고 조용한

현 문충리에 세워졌고, 그래서 마을 이름도 문충동이 되었고,

그 사당터에 문충공의 혼백이 사시니 그 자리를

세상 사람들이 쉽게 정몽주 탄생지라고 전한 것이다.

사당 이름이 문충이었던 것은 포은의 시호가 문충이고,

마을 이름이 문충이고, 또 현재 임고서원에 있는 사당 이름이 문충사인 점을 감안하면

여기에 문충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함부림 행장의 경주부영일현인 이라는 표현은 관향(그 사람의 뿌리, 정체성)이

경주부에 소속된 영일현이라는 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읍지(승람을 바탕으로 편찬)에서 

그 고을의 성씨(토착, 유입 세력-본관)를 기록하고, 그 성씨의 인물을 그 고을(관향)의 인물조에서 소개한다.

관향은 본래 신라-후삼국-고려 이래로 그 지방의 유력 토착 세력(호족)이 세거해오던 지방(고을)을 말하는 것이다.

포은 당시에도 포은을 목은 이색이 정오천이라고 불렀다. 포은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관향(정체성, 뿌리)으로

그 사람을 부른다.

 

지금도 경주 김씨 같으면 경주인 김누구라고 말한다. 이성계는 전주 이씨로,

그 선대가 삼척으로 이주하고, 다시 함흥으로 이주하였고, 함흥에서 이성계가 태어났다(용비어천가).

그렇지만,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고향(관향)은 전주이기에 전주를 한 고조 유방의 고향인 풍폐에 비유하여

'풍폐지향'이라고 부르고, 태조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인 경기전이 전주에 있다.

그러나, 함흥의 이칭인 함녕이 조선 건국시 국가 이름으로 조선과 같이 후보에 올랐거나

함흥에도 태조가 살던 집이 있고, 사당이 세워졌던 것과 포은을 비유하면 쉽사리 이해가 간다.

영천은 포은의 나고 자란 곳(생장지)이고, 오천은 포은의 고향(관향)인 것이다.

 

이름 대신에 호, 자로 상대를 존중해 부르고,  

관향으로 자신이나 상대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부르는 것이다.

 

***'중간에 영천에 살았다(中居于永川)'는 구절을 함부림의 행장에 나오는 구절로 읽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함부림의 행장에 이런 말이 나오지도 않거니와, 

 '함부림 행장 정몽주 경주부 영일현인也'에서

 '也'자가 문장이 끝남을 표시하는 語氣詞(마침표)이기 때문이다. 

'중거우영천'이라는 문장을

정몽주가 문충동에서 탄생하고 자라다가 중간에 영천으로 이거하였다고 해석하는 것은

한문 문장의 문맥 해석에 미숙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문충동 앞에 新增이라고 붙인 것은 문충동에 관한 정보를 읍지 편찬한 19세기 전반에 새로 보충하였다는 뜻.

18세기에 영천에 살았던 이름난 유학자 정만양, 정규양 형제는 시조 정습명의 묘단을 복원하였다.

이 무렵에 오어사 입구 운제산 아래 한적한 곳에 포은의 혼백을 제향하는 사당 문충사(임고서원의 사당 이름도 문충사)를 아마도 세웠을 것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문충리가 되었고, 주민들은 사당이 폐허가 되어도 포은의 혼백이 살던 동네를

포은의 탄생지로 인지하고 이야기를 전하고 있던 것을

1831년 읍지 편찬자가 새로 이런 인문지리 정보를 보충한 것이다.

 

 

 

<청림>

在縣東十里李光岳

 縣時

夢有丈人來見田 縣東十里

卽是我家而毁敗已久 無處安居云

因問舊蹟靑林圃隱舊地

故卽建烏川書院于其地

中移于古縣城 今有碑閣

(청림리)는 영일현치 동쪽 10리(거리)에 있다.

이광악이 영일현에 (현감으로 선조 때 부임하여)왔을 때 꿈에 장인이 와서 밭을 보여주며

고을 동쪽 10리 (지점에 있던), 나의 집이 허물어진 지 오래라서

(내 혼백이) 편히 안식할 곳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옛 흔적을 (고을 사람들에게)물었는데,

(그곳은) 청림리인데 포은의 (선대가 살던) 옛 땅(관향)이었다.

그래서 곧 오천서원을 그 땅에 세웠는데, 중간에 고현성으로 서원을 옮겼다.

지금은 그곳에 비각이 있다.

 

***현감 이광악의 장인이 살던 집이 있는 청림이 포은의 선대가 살던 관향임을 물어보고 알게 되어

시조 정습명, 정몽주, 정사도, 송강 정철(정사도, 정철 2인은 別祀를 세워 뒤에 배향)

오천 정씨 4분의 유현들을 모시는 오천서원을 선조 때 건립하였고

광해군 때 사액서원이 되었다.

뒤에 고현성(조선초기의 석성 축성 이전의 현치가 있던 토성)으로 서원을 옮겼고 다시 원리로 옮겨서

지금(1832년)엔 유허비각이 있다고 한 것이다. 포은선생유허비는 17세기에 세움.

 

***

-4월1일에 고밀현(高密縣)에서 꾀꼬리 소리를 들으며-


日午來過古縣城。한낮에 고현성(古縣城)9)을 지나서 오면

綠陰深處暑風凉。푸른 그늘 짙은 곳 바람 시원해

慇懃拂壁題詩句。은근히 벽을 털고 시구(詩句) 적으니

起取流鶯第一聲。꾀꼬리 고운소리 먼저 들리네.

《영일읍지》 

 

이 시의 제목에 고밀현이라 한 것은 영천의 다른 이름인 고울일 것이다. 울과 밀이 뜻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시가 포은의 시가 확실하다면 포은 당시에는 고울을 고밀로 불렀을 것이다.

호족 황보 능장(영천 황보씨 시조)이 후삼국시대에 골화, 도동 등의 현을 통폐합하여

영주(영천, 혹은 고울)로 하였다.

 

포은의 위 시(영일현읍지에 실려 있다고 한다)에 고현성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석벽에 살며시 시를 적었다는 구절이 있다.

영천에 임천고현(포은이 탄생 성장한 임고면 우항리 옆에 고경면이 있고, 이 일대가 신라말-후삼국시대

영천의 호족인 황보 능장이 쌓은 금강성?이 있고, 황보 능장이 골화, 도동 등의 현을 통폐합하여 영주(영천)으로 삼았다.

 

고려말 정몽주가 생장지에서 동남쪽(오늘날 고경면, 3사관학교 근처)의 임천 고현성에 꾀꼬리 울고 버들가지 푸른 봄날에

소풍 다녀오다 감흥이 일어나서 임고천 석벽에 풀을 헤치고 시를 적었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포은의 시에서 말하는 고현성은 영천 임천 고현성임을 알 수 있다.

아래의 신증동국여지승람 영천군 기사를 참고할 것.

 

임고천 석벽 이야기는 정몽주의 다른 시에도 등장하는 영천의 특이한 경관.

 

 

물론, 여기 영일현읍지에서 말하는 고현성은 오늘날의 청림동(구정리?)에 있던 것으로 조선초기 석성을 쌓기 이전에

신라-고려 이래의 현치가 있던 토성을 말한다. 

 

 고려 황보능장(皇甫能長) 태조(太祖) 때 사람이며, 금강성장군(金剛城將軍)이 되어 공이 있다. 자기가 일으킨 땅 골화(骨火)ㆍ도동(道同) 등 현을 합쳐서 영주(永州)를 만들었다

도동폐현(道同廢縣)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본래 신라 도동화현(刀冬火縣)이니, 경덕왕(景德王)이 고쳐서 도동(道同)이라 하여 임고군(臨皐郡)의 영현을 삼았었는데, 고려 초년에 인하여 소속시켰다. 임천폐현(臨川廢縣) 본래 골화소국(骨火小國)인데 신라 조분왕(助賁王) 때에 이곳을 쳐서 빼앗아 가지고 현(縣)을 두었었다. 경덕왕이 임천(臨川)으로 고쳐서 임고군의 영현을 삼았다. 고려 초년에 인하여 붙였으니 고을 동남쪽 5리에 있다.

임천고현성(臨川古縣城) 남정원(南亭院) 서쪽에 있는데, 읍에서 동남쪽으로 5리 떨어져 있다. 고려 고종 20년에 이자성(李子晟)이 이 성에 의거하여 동경(東京)의 적을 대파하였다. 금강성(金剛城) 동쪽에 옛터가 있는데 곧 동현성(同縣城)이라 일컫는다.

 

<인물>

고려 정습명

정몽주

습명지후 - 종성 이조참의 종본 성균관사예

***관향(본래 그 고을 토착세력 파악 목적)이 영일(오천) 정씨인 인물들을 소개(인문 지리 정보).

 

 

영천군읍지(1831)

 

<연혁>

절야화-임고(경덕왕)-도동, 임천 2현 합 위 영주(혹운 고울부)(려초)

-치자사(성종)-속경주(현종)- 감무(명종) 후 승위 지주사-영천(태종13, 속현 신녕현)

 

<군명>

절야화 임고 영주 익양 영양 고울 영천

 

<성씨>

황보 이 윤 신 송 김 극 유 최 심 병래

이 박 정 사(신녕) 조 정 서 권 안 성 박 손 신 곽 류 전 노 조

***영천 관향(고려 초 이래의 토착 세력)인 황보, 이씨 등이 등장

 

<인물>

 

정몽주

生於郡北愚巷里

事蹟在麗史列傳

又見迎日縣誌

영천군치 (동)북우항리에서 (정몽주)가 태어났다.

(정몽주의 일생)사적은 <<고려사>> <열전> 정몽주편에 실려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영일현 <인물>조나 <<영일현읍지>>를 보라.

 

 

***정몽주가 고을 북(동북)쪽 우항리에서 탄생하였다고 적시.

인물 소개는 고려사 열전과 영일현지(신증동국여지승람영일현, 이를 바탕으로 정리된 영일현읍지 등)에서

자세히 소개하였으니 그곳을 보라고 하였다. 그 고을을 관향으로 하는 인물들은 그 관향 인물조에서 소개.

 

황보능장

골화 도동 등 합 위 영주

 

李宗儉 李宗謙

詳見龍仁寓居下

 

***이종검 형제가 영천 이씨로 영천에서 소개하나 용인에서 태어나고 살았으므로

영천에서 나고 자란 포은을 관향인 영일현지 인물조에서 소개한 것처럼

용인 우거조(신증동국여지승람)를 보라고 한 것이다.

 

<임고서원>

재 군북 아천리

문충공포은정몽주향사지소

가정계축건우부래산하

사액

만력임진훼우왜변 임인중건도일동사 문복사액임고서원

숭정임오배향문강공장현광

건륭병오추배충정공황보인

 

***임고서원은 소수서원 다음으로 한국 2째로 설립.

 포은의 生長地(명종실록 명종9년조 기사 볼 것. 고향, 관향이 아니라 탄생하고 성장한 곳,

여기에 있는 집을 보통 舊居, 舊家 등으로 표현)인 우항리에 설립되고 사액서원이 된

임고서원(퇴계의 후원과 주도)이 포은 생장지 마을 앞 고천가 부래산 아래에 세워지고

사당에 영정이 비치됨. 임란으로 소실되자 포은 부모의 묘소가 있는

양항리로 옮겨 세웠다.  이때 장현광이 상량문을 쓰고 건립을 주도.

장현광은 생전에 서원에서 강학, 사후 배향.

관향이 영천인 황보 인(세조에게 죽임 당함)을 오천서원에 포은, 송강을 배향하듯이 임고서원에

건륭 병오 가을에 추가로 배향.

 

 

영일정씨 辛酉譜

8-9세 무렵 영천으로 이주

***영일 정씨 신유보가 언제 간행되었는지?

무슨 근거로 8-9세 무렵에 영천으로 이주했다고 하는 지 모르겠다.

아직, 족보를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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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仁壽-조裕-부云瓘

모영천이씨-膳官署承約之女也

生而秀異 肩上有黑子七 列如北斗形

 

포은의 행장, 연보에는 포은의 생애에 대하여 아주 세밀하게 기록.

탄생 성장한 어린 시절의 기록도 그렇다.

 

어머니의 태몽과 초명 몽란,

 

탄생시 몸의 북두칠성 모양의 7개 검은 점.

 

9세시 어머니의 대낮에 포은이 우항리 친가 정원의 배나무에 올라간 일과 흑룡 꿈과 몽룡.

 

대략 15-18세(주자가례 관례에 15-20세가 되면 관례를 한다고 했고, 19세에 부친이 별세하고 주자가례에 따라

여묘살이를 한 사실로 미루어 관례는 15-18세라고 볼 수 있다.)에 관례.

 

관례에 따라 아명 몽룡에서 龍자를 떼고 周자를 붙임.

유학의 시조 공자가 내가 늙고 쇠하여 오래도록 주공을 꿈에서 

다시 뵙지 못했다('夢見周公')고 한 <<논어>> <술이편>의 구절에서

관례를 집행한 영천의 성리학과 주자가례에 밝은 분

(아마 우항리 일대에 세거하는 오천 정씨 포은의 집안 사람일 것이다)

이 '몽주'라고 작명한 것이다.

주자가례에 따라 이 때, '達可'라는 자가 부여 되었을 것이다.

 

19세에 부친상에 <<주자가례>> 예제대로 3년 시묘살이를 마침.

 

함부림의 행장에서는 모친상이라고 했으나 유성룡이 여러 자료들을 비교 검토하여

부친상으로 바로 잡음(포은선생연보고이).

 

향시(監試)에서 3등으로 합격하고

김득배, 한방신이 좌주가 된 백일장에서 연거푸 3번 일등을 하여 장원급제하였다.

 

관직 생활을 하기 시작 24세 무렵. 

 

만약 포은이 외가에서 나거나, 오천에서 어릴 때 자라다가 영천으로 이주했다면

포은의 어린날 생애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런 사건들이 연보나 행장에 등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유성룡은 포은문집 3본(신계, 개성, 교서관)과 <<고려사>>, 시문들을 2-3번 심사숙고하여 연보를 작성하였는데,

<주자연보>의 예에 따라 특별히 기록할 만한 사건이 없더라도 연도는 명기하였다고 하면서

일년 단위로 연도를 명기했다.

 

포은 선생의 생장지(나고 자란 곳)가 영천이고, 고향(관향)이 오천이다.

포은 선생의 관향, 오천에 남아 있는 오천 정씨와 포은 선생 관련

여러가지 자취들을 잘 모으고 알리어

포은 선생의 생애와 사상과 업적에서 오늘 우리들의 삶에 교훈을 얻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바탕으로 삼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포항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명원루(明遠樓)

                                                                         鄭夢周(정몽주)

 

淸溪石壁抱州回(청계석벽포주회) : 바위벽 맑은 냇물 고을을 돌아 흐르고

更起新樓眼豁開(갱기신루안활개) : 새로 지은 누각에서 일어나보니 눈 앞이 훤히 보인다

南畝黃雲知歲熟(남무황운지세숙) : 남쪽 밭에 누런 구름 곡식이 익었고

西山爽氣覺朝來(서산상기각조래) : 서산의 삽상한 기운 아침에 몰려온다

 

風流太守二千石(풍류태수이천석) : 풍류 즐기는 태수는 이천석의 돈을 쓰고

邂逅故人三百杯(해후고인삼백배) : 오랜만에 만난 친구 술 삼백 잔은 마신다네

直欲夜深吹玉笛(직욕야심취옥적) : 밤 깊어 옥피리 불며

高攀明月共徘徊(고반명월공배회) : 높이 밝은 달 잡아 함께 배회하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