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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寒圖

solpee 2009. 5. 9. 08:27

 

玩堂 歲寒圖

 

 

 

 

‘세한도’는 논어의 宗旨에 따른 소식(蘇軾)의 삼청도(三淸圖)가 비롯이다.

추운 겨울에도 변함이 없는 松竹의 常靑과 梅蘭의 오한을 받들은 의취(意趣)다.

곧 군자는 역경에서도 그 절조(節操)를 지킴에 비긴 표백(表白)인 것이다.

 

완당의 ‘세한도’는 완당의 작품 ‘부작난도(不作蘭圖)’에서 화제(畵題)로 썼던

 ‘오직 하나일 뿐 둘 이상은 있을 수 없다’ 의 회심작이다.

 

천지가 백설로 덮인 납작한 토담집 안팎에 네 그루의 소나무가 그려진 단출한 꾸임새이나,

고고한 구도와 노건(老健)한 선화(線畵)와 고졸(古拙)한 격조가 넘치는 자화상이다.

 

그림 속에 시가 있고 도(道)가 스며 정(情)이 넘실거린다.

이는 높깊은 학문과 남다른 견문과 타고 난 대수(大手)가 아니고는 다다르지 못할 절경이다.

 

물론 소나무는 의표(意表)의 상징이요, 토담집은 적거(謫居)의 실상(實相)이요,

혈창(穴窓)은 고고(枯稿)의 숨통이다.

 

명문(名門)의 완당이라 ‘세한도’를 구성하면서 체념을 되새겨

기구한 현실을 자위했을 것은 산산이 부질없다.

 

안의 노송은 자기(自己)의 표상이니 아름드리 밑그루의 대담한 용사(用捨)는 치뻗다가 갈라진 안산한 일지(一枝)와 좋은 대비가 된다.

 

그 꿈틀거리는 용사(龍蛇), 창창한 침엽(針葉),

자못 의연한 기상으로 해서 사뭇 안간힘이 시퍼렇다.

 

모진 풍설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조절(操節)하는 완당의 자존(自存)이 도사렸다.

한편 밖에 나란한 소나무는 그 앉힘부터가 오롯하다.

 

물론 권세와 이해를 초월한 문개(問客)의 나툼이다.

싫으면 뱉고 달면 삼키는 세파와는 진작에 담을 싼 꿋꿋한 자세인 것이다.

 

이 중의 하나가 이상적임에 분명하다….

 

- 斗溪 이병도 -

 

 



그림 아래쪽 유인(遊印)은 그 인문(印文)이 장무상망(長毋相忘) 으로 「서로 오래 잊지 말자」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

 

 

子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論語, 子罕篇

 

한겨울 추운날씨가 되어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거대한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한겨울에 홀로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는 소나무의 모습에서 추사 김정희의 歲寒圖에서 인용된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라는 말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다.

 

인생사에 대한 공자의 고찰이 들어있는 子罕篇의 ‘罕(한)’자는 그물이라는 뜻도 있으나 주로 ‘드물 한’으로 쓰이는데 영어의 ‘seldom'이나 'rarely'. 'scarecely'와 같이 부정적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논어 子罕篇에서 “罕言利與命與仁”이라고 한 것은 “공자는 이익과 천명과 인에 대하여는 거의 말씀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與는 영어의 and의 뜻임).

 

‘柏’이라는 한자는 잣나무나 측백나무를 뜻하는데 실제로 잣나무와 측백나무는 모양이 많이 다른데 한자로는 같은 ‘柏’자를 쓰고 있다. 서지문 교수는 여기의 ‘柏’을 측백나무로 보고 있는데 잣나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같은 소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바늘잎이 2개씩 뭉쳐나는 것이 소나무이고, 바늘잎이 다섯 개씩 뭉쳐나는 것이 잣나무이다(이런 이유로 잣나무를 五葉松으로 부르기도 함). 리기다소나무는 바늘잎이 3개이다.

 

荀子에도 “歲不寒, 無以知松柏”(추운 때가 아니면 소나무 잣나무의 남다름을 알아볼 수 없다)이라는 말이 있는데 위 논어의 구절과 비슷한 뜻이다. 荀子는 이어서 “어려운 일이 닥치지 않으면 군자를 알아볼 수 없다”고도 말했다. 불의의 시대에 의를 지킨 사람들도 한겨울의 소나무처럼 그 기개가 찬연히 빛난다.

 

소나무하면 생각나는 것이 秋史 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이다. 세한도는 추사가 유배지인 제주도 대정마을에서 그린 그림이다. 세한도는 당시 추사가 ‘추운 시절을 그린 그림’이다.

 

 

              [세한도] 국보 제180호.

 

이 그림은 추사가 1844년(헌종 10년) 제주도 대정고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아무도 찾지 않는 이곳에 북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李尙迪)의 인품을 송백(松柏)의 지조에 비유하며 그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다. 옆으로 긴 화면에는 집 한 채와 주위에 송백 두 그루씩이 대칭을 이루어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여백으로 되었다.

 

그림을 보면 넓은 공간에 자그마한 집과 아름드리 송백만이 매우 간략하게 그려져 있어 추운 시절의 황량한 느낌이 잘 나타나 있다. 삼각형의 안정된 구도 속에 꼿꼿하고 굳센 필치와 메마르고 차가운 먹색이 어우러져 고고(孤高)한 문기(文氣)를 강렬하게 발산하고 있다. 세한도는 조선시대 문인화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른편 상단에는 추사체로 '세한도(歲寒圖)'라는 화제와 "우선시상완당(藕船是賞阮堂)"이라는 글과 관지(款識)를 적었고, 그림의 왼편에 쓰여있는 추사의 발문() 에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글귀를 인용하여 권력과 이익에 좌우되는 세상인심과, 그 가운데서도 스승을 잊지 않고 중국에서 구한 귀한 서책을 멀리 귀양간 스승에게 보낸 이상적의 마음 씀씀이를 칭찬하였다.

 

 

       

             [세한도의 화발(畵跋)]

 

세한도의 화발 중에서 공자의 자한편의 구절과 관계있는 부분만 읽어보자.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이 글을 오주석은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수 있다.' 고 하셨다.

소나무, 잣나무는 본래 사계절 없이 잎이 지지 않는 것이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 데도 성인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다만 시들지 않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헌종 6년(1840) 안동 김씨와의 권력싸움에서 밀려나 제주도로 유배오게된 추사 김정희는 유배초기 표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후 강도순의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는데 현재 추사적거지로 지정된 곳은 1948년 4.3항쟁때 강도순의 집이 불에 타 없어져서 1984년 강도순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어진 곳입니다. 대정읍성 동문자리안쪽에 자리잡은 이곳은 기념관과 함께 초가 4채가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고, 기념관에는 시와 서화 등 작품 탁본 64점과 민구류 142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세한도의 산실 제주도 추사적거지]

 

어쨌든 소나무는 우리민족의 애틋한 사랑을 받고 있는 민족나무라 할만하다. 그러나 우리 소나무의 영어 이름이 ‘재패니즈 레드파인(Japanese Red Pine)’ 즉 ‘일본 붉은소나무’란 뜻으로 되어 있다. 우리의 소나무를 Korean Red Pine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릴 방법은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