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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世晃

solpee 2009. 1. 7. 21:56

<김홍도 스승 강세황의 '행서작품' 공개>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9.01.07 13:11 | 최종수정 2009.01.07 14:02



(익산=연합뉴스) 임 청 기자 = 조선 숙ㆍ정조 때의 인물로 김홍도(金弘道)의 스승으로 알려진 표암 강세황(姜世晃) 선생의 행서(行書. 획을 약간 흘려서 쓰는 체) 작품이 공개됐다.

전북 향토문화연구회 김인기(71.고서화 수집가) 이사는 "30여 년 전 경남 진주에서 사들인 고서화를 정리하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김홍도의 스승이었던 표암의 행서작품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중국의 '사기(史記)'를 인용한 이 작품의 글귀는 '史記 稱. 秦仲知 百鳥之音. 與之語皆鷹飽宣聞. 雀呼知前有'.

이 작품을 감정한 원광대 서예학과 조수현 교수는 "사기에 이르기를 진 나라 때에는 대개 백조(많은 새)의 소리를 알아들었다. 말이란 모두가 (물고기처럼) 베풀고 듣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새도 먼저 아느니라"라고 뜻을 풀이했다.

조 교수는 "한마디로 인간의 삶을 새의 울음소리에 빗대어 표현한 작품으로 단박 미가 스민 표암의 뛰어난 작품"이라면서 "78세의 일기로 세상을 뜬 강세황 선생이 말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고 평가했다.

당시 한성부 호조와 병조 참판에 이어 판윤(判尹)을 역임했던 강세황은 이익과 심사정, 강희언 등과 친밀했으며, 특히 김홍도와 신위(申緯)에게 직접 그림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다.

특히 조선 후기때 남종 문인화가를 주도해 진경산수화, 풍속화의 발전과 새로운 서양화풍의 수용에도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로 알려졌다.

 


표암 강세황 자화상

시대를 가로질러 세상 껴안은 '표암'
詩 . 書 . 畵   '三絶'의 유려한 화풍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단원 김홍도를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김홍도의 스승이 누구이며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 그의 스승이 무명의 평범한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제대로 소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홍도가 어린 시절 고향인 경기도 안산에서 모시고 공부했던 스승은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다. 그는 시 . 서예 . 회화에 모두 빼어났던 삼절(三絶)로 18세기를 조선을 대표하는 문인이었다. 문화사적으로 제자인 김홍도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발군의 인물이었다. 그야말로 그 스승에 그 제자였던 셈이다.

그의 맑고 우아한 시문, 물 흐르듯 유려한 행서, 다양한 분야의 그림들은 한결같이 강세황 자신만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 특히 표암의 회화는 남종화풍의 사의산수화(寫意山水畵)를 비롯하여 진경산수화, 산수인물화, 풍속인물화, 화조화, 사군자화,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아우르며 그의 폭넓은 관심과 자유롭고 진취적이었던 작화태도를 보여준다. 30대에 제작된 '지상편도'와 '산수도권' 등 그림과 글씨들은 그가 이미 청장년기에 독자적인 화풍과 유려하고 힘찬 사체를를 확립하였음을 말해준다. 40대에 개성을 여행하고 그린 '송도기행첩'은 그가 중년기에 진경과 서양화법에 깊은 관심을 지녔음을 드러내며 특히 서양의 원근법을 당대 누구보다 앞장서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말년인 70세 때의 '자화상'은 얼굴의 살결과 수염의 사실적인 정밀묘사와 눈동자의 기운 생동하는 표현이 압권이다.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경향인 남종화의 정착, 진경산수화의 유행, 풍속화의 발달, 서양화법의 수용 등은 김홍도, 신위, 최북 등에게 영향을 미치며 당대의 화단을 대표했던 강세황과 직간접적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 
                                                                            - 안휘준 서울대 교수

18세기의 영 . 정조대는 아름다운 시대였다. 진정으로 우리를 소중히 여기는 자존의식이 강했고, 진정한 자존을 위해 자기와 남을 돌아보는 지혜가 있었다. 보수와 진보가 서로 엇갈려 교차하며 진솔한 삶의 현장에서 만났고, 상층의 귀족과 하층의 서민이 진실한 인간의식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며 의미있게 소통했다. 표암 강세황은 시서화(詩書畵)의 예술 형식을 통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표암은 18세기의 한가운데를 온몸으로 가로질러 살았다.

30년간 김홍도 가르쳐

진보적인 노론이 집권하자 보수적인 명문가의 막내였던 표암은 서울의 기와집을 나와 안산의 초가집에서 30년의 처절한 밑바닥 삶을 살았다. 그 속에서 표암은 생생한 삶의 현장과 꾸밈없는 인간의 진실을 경험했다. 시대가 비록 자신을 버리고 비켜갔지만, 표암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인간 속으로 들어가 천품으로 타고난 시서화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가령 1747년6월, 표암은 복날을 맞아 친구들과 함께 개장국을 끓여 소주와 노래를 즐긴 뒤 귀남이라는 아이 종까지 묘사한 풍속화를 그리고, 장쾌한 행서로 '그윽한 정자의 우아한 모임(玄亭勝集)'이라는 제목을 써넣었다. 그리고 다시 "자세하게 그림으로 옮겨서 돌려보고 자랑하네"라는 시를 지어 친구들의 시와 함께 유려한 행서로 아름답게 장식했다.

일상의 생생한 삶 속에서 상하(上下)와 고금(古今)은 물론 아속(雅俗)까지 융합된 새로운 시서화가 태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일상의 삶에 대한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말해준다. 표암은 선배들이 일구었던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전통을 더욱 진솔한 삶의 자리에서 끌어안고, 다시 어린 단원 김홍도를 30여년간 가르치며 정조대왕의 절대적인 후원에 힘입어 최고의 풍속화가로 길러냈다. 그리고 손자뻘의 지체 낮은 화원에 불과한 단원의 풍속화를 보고 최고 입신의 경지라고 극찬하는 단원론과 풍속화론을 선물했다.

이것은 단순히 '실학(實學)'이라는 이름 아래 서구 근대의 열등한 아류처럼 이분법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영 . 정조대의 두터운 깊이와 따스한 숨결을 말해준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그동안 서양화법을 구사한 대표적인 작품처럼 소개돼 왔던 표암의 '영통동구(靈通洞口)'도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사실 이 그림은 영통동구를 지나가다가 "웅장하고 거대한 돌들이 어지럽게 널렸는데, 크기가 집채만하고 푸른 이끼가 덮여서 보자마자 눈이 아찔한" 광경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의 매력은 거대한 바위에 널린 하찮기 그지없는 이끼까지 포착한 현실적이고 정취적인 문인의 시적 감각이지, 결코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서양화법의 견고한 시각적 질서가 아니다.

청나라 황제도 극찬

물론 표암은 서양화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영통동구'는 서양화법의 초점(焦點) 투시법과 음영법을 시도한 것도 아니고, 그것이 잘 보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시점을 좁히지 않는 우리의 산점(散點) 투시법과 한 면이 밝으면 다른 면이 어두운 음양적 명암법을 통해 형사(形似)를 넘어선 전신(傳神)의 경지를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의 특징을 서양화법으로 읽는 것은 정당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참신한 작품을 오히려 미숙하고 어설픈 아류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시대로부터 버림받았던 표암은 그러한 정신적 초월의 내공으로 자신을 단련하며 현실을 견딜 수 있었다. 그 결과 만년에는 영조와 정조의 탕평정치로 벼슬길에 나간 뒤, 청나라 황제의 극찬을 받을 정도로 국제적인 안목을 키우고 추사 시대에 더욱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예술세계의 문턱까지 이미 넘어서고 있었다. 그림을 통해 사람을 보고, 사람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은 우리의 오랜 예술 전통이었다. 
                                                                                - 강관식 한성대교수

18세기 명작 '강세황 초상화', 정조의 지시로 19일만에 완성

'표암 강세황 초상화의 제작 비용은 400만원(요즘 시세), 화가 일당는 8만원 + 숙식제공'.
조선시대 초상화의 제작과정을 자세히 적은 기록이 발견됐다. 재료 구입비에서부터 제작기간 . 구입처 . 인건비 . 사례비 . 배접 장인의 이름까지 꼼꼼히 밝히는 문서가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문건의 제목은 '계추기사(癸秋記事)'. 18세기 문인예술가 표암 강세황 초상화 '강세황 칠십일세상(姜世晃七十一歲像 . 보물 590-2호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제작노트로, 그의 셋째아들 강관이 적은 것이다.

'계추기사'는 한국 미술사에서 초상화 명작으로 꼽히는 '강세황칠십일세상'이 조선 후기의 유명한 초상화가 화산관 이명기(李命基)의 작품임을 확인해 주면서 그간 미상이었던 그의 탄생 연도를 1756년으로 밝히고 있다.

그림은 표암이 기로소(耆老所 . 정2품 이상 벼슬을 한 70세 이상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에 들어가게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정조가 '초상화를 그리라'는 전교를 내리면서 제작됐다. 그림과 그림을 넣는 궤를 완성하는 데 총 19일이 걸린 초상화 제작과정을 표암의 3남 강관이 1783년 음력 8월 7일 행서체로 꼼꼼히 기록했다. 다음은 이태호 교수의 논문 '조선 후기 초상화의 제작 공정과 그 비용'에 등장하는 '계추기사' 풀이 요약에 따르면, '계추기사'에 명시된 비용은 총 37냥이며 표암측이 당대 명문가에서 최고급 중국산 비단 배접 도구와 재료를 빌려다 쓴 뒤 사례비를 전달했다고 친다면 전체 초상화 제작 가격은 50냥 안팎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를 쌀값 기준으로 환산하면 요즘 돈으로 400만원 정도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명기가 열흘간 표암 집에 머물며 받은 사례비 10냥을 환산해보면 일당은 8만원이라고 계산한 이교수는 이명기가 표암 초상을 그릴 당시에는 불과 28세여서 사례비가 적었던듯 하다고 덧붙였다.

조선후기 화가 조희룡은 저서에서 '그림값으로 300냥을 받은 단원이 200냥으로 매화 분재를 구하고 80냥으로 술을 들여와 잔치를 열고 20냥은 살림에 보태라고 집에 주었다'고 언급했다는 것. 또 요즘으로 치면 이명기가 국가 공무원으로서 어명을 받아 그렸기 때문에 사례비가 적었을 수도 있다.

이태호 교수는 '계추기사'는 조선 후기 초상화 제작 과정을 상세히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표구 기술사 연구의 첫 장을 여는 귀중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조선일보)


벽오청서도


영통동구


연강제색도


녹죽


백석담도




표암 선생1713(숙종 39)~1791(정조 15)은 사연이 많은 분인데 아버님이 예조판서(문교부장관)를 할때 형님이 과거에서 부정을 저질렀답니다다. 체면이 소중했던 조선에서 이런 민망한 꼴을 당하면 , 형제는 물론 사촌, 심하면 팔촌 형제까지도 덩달아 시험을 보지 못했지요. 부끄러워서... 그것도 평생 시험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선비지만 벼슬할 길이 없고, 그럴 생각도 아예 못하니까 그저 학문과 시서화, 거문고 등에 마음을 붙이고,그래서 김홍도의 선생님이 되었던 거지요.

그러나 벼술만 없을 뿐 실력은 오히려 쟁쟁해서 , 이를테면 오늘날 한 시대를 이끌어 가는 최고의 예술 평론가와 비슷한 분이셨습니다. 당신이 직접 자기 초상 자화상을 그리신 거에요. 이 분이 원래 이렇게 재주가 많았던 선비랍니다. 강세황 선생의 글에 보면 '내가 몸집도 작고 얼굴도 잘 생긴 편이 못돼서 사람들이 종종 나를 앝잡아 보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내 안에 있는 대단한 학식과 기특한 포부가 있다고 자부하는 까닭에, 그런 말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써 놓은 것이 있을 정도로 학술과 예술이 뛰어나신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림에 스스로 지은 화제를 자필로 쓴 것이 재미있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사람 누구인고? 수염과 눈섭이 새하얀데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몸에는 평복을 입었으니
이로써 마음은 산림에 가 있으되 조정의 벼슬아치가 되어있는 것을 알겠도다.
가슴속에는 수천권의 책을 읽은 학문이 있고,
또 소매속의 손을 꺼내어 붓을 잡고 휘두르면
태산, 화산,승산,형산,항산 등 중국의 오악을 뒤흔들 만한 실력이 있건마는
사람들이 어찌 알리요?
나 혼자 재미있어 그려봤다!
노인네 나이는 칠십이고 노인네 호는 노죽인데
그 초상화 제가 그리고 , 찬문도 제가 썼다]

즉, 북치고 장구치고 혼자 다 했다고 너스래를 떨었다네요.
이렇게 장난스럽게 그릴 수 있는 그 분의 밝은 성격은, 그의 부친이 70이 다 되어서 얻은 3남6년중의 막내이기에 천성이 밝은 데다 사랑도 많이 받고 자란 이유인가 봅니다.

 

                                                           오주석의 "한국의 美" 중에서

 

 

한국서예와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한국서예
우리 나라는 중국 문화를 직접 ?아들인 나라이기에 종족과 언어만 다를 뿐이지 모든 문물 제도는 중국과 대략 같게 수천년을 살아온 게 사실이다.
나는 대만에 갔을 때 우선 고궁 박물관을 찾아보고 서화, 도자기 등을 위시하여 모든 것을 살펴보며 하나하나 우리 것을 연상하느라 바빴다.
또 중국 대륙을 돌아다니며 그 곳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건축. 도성(都城). 능원(陵園) 등 명소 고적을 살펴볼 때 역시 우리 나라의 문화유산이 생각나 시종 비교하여 보느라 여념이 없을 지경이었다.
저 중국으로 말하면 국토의 넓이로는 우리의 몇 배인지 말할 수 없고 역사상 제반 자취도 대단하며 현재의 인구도 12억을 산(算)하고 그 곳에 사는 종족도 56종족이라니 모든 것이 우리와 어찌 견주어 말하랴.
그러나 넓고 크고 많은 것은 한 마디로 우리와 비교가 어려우나 문화유산으로 말하면 조그마한 우리 나라로서도 짜임새 있고 아름다운 점에서 볼 때 하나도 손색이 없게 느껴 자위할 만하였다.
중국 관광에서 본 수많고 한없는 것을 어찌 다 말할까마는 그 중 비림(碑林)을 본 것이 가장 인상적이어서 적어 보겠다. 비림(碑林)은 많은 비가 몰려 있어서 '비림(碑林)' 이라 일컫는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산재한 것을 모아서 큰 집 속에 보관한 것이다. 안근례비(顔勤禮碑)를 비롯하여 수많은 천하 명보(名寶)를 한눈으로 단숨에 볼 때 그저 황홀할 뿐이다. 특히 서학도(書學徒)로서는 감탄할 따름이었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이 있으니 우리 나라도 산재한 국보급 금석(金石)을 큰 집을 짓고 한 곳에 모아 보관도 안전하게 하며 감상도 편리하게 하였으면 하였다. 관광에서 얻은 소득이 이만큼 지대하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다음에 역사적으로 뚜렷한 서적(書蹟)과 서가(書家)에 대하여 소개하겠다.

삼국시대(三國時代)
광개토경호태왕릉비(廣開土境好太王陵碑) : 예서(隸書)9414) 고구려(高句麗) 방엄질후(方嚴質厚) 파책(波책)이 없는 고예(古隸)
신라(新羅) 북한산진흥왕순수비(北漢山眞興王巡狩碑) : 육조(六朝)
백제(百濟) 무녕왕릉(武寧王陵) 지석(誌石) : 육조(六朝)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성주사(聖住寺) 사적비편(事蹟碑片) : 근엄단아(謹嚴端雅) 안진경다보탑체(顔眞卿多寶塔體)
단속사신행선사비(斷俗寺神行禪師碑) : 석영업 서(釋靈業 書) 행초(行草) 왕희지체(王羲之體)
쌍계사비(雙溪寺碑) 최치원 서(崔致遠 書) 구양순(歐陽詢), 유공권체(柳公權體)

고려시대(高麗時代)
백월서운비(白月栖雲碑) : 김생(金生) 집자(集字) 행초(行草)
봉암사정진대사비(鳳巖寺靜眞大師碑) : 장단설. 서(張端說. 書) 우세남체(虞世南體)
현화사비(玄化寺碑) : 채충순 .서(蔡忠順 . 書) 구양순체(歐陽詢體)
거둔사승묘선사비(居둔寺勝妙禪師碑) :  김거웅. 서(金巨雄. 書) 구양순체(歐陽詢體)
현화사개창비(玄化寺開創碑) : 백현예. 서(白玄禮. 書) 구양순체(歐陽詢體)
법천사지광국사비(法泉寺智光國寺碑) : 안민후. 서(安民厚. 書) 구양순체(歐陽詢體)
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 ;  오언후. 서(吳彦侯. 書) 구양순체(歐陽詢體)
문수사장경비(文殊寺藏經碑) ; 이암. 서(李암. 書) 해행체(楷行體)
고려시대만 해도 육필로 남은 것은 근소하고 금석문만 남아 있다.그리고 고려는 불교를 숭봉(崇奉)한 까닭에 불찰에 궁비(穹碑)가 많이 있고 서체는 구양순체가 대종을 이루었다.

조선시대(朝鮮時代)
초엽에는 왕희지 조맹부 서체가 성행하여 그 여운이 중엽까지도 전수되다가 안진경체가 싹트기 시작하여 몇몇 작가의 출현을 보겠고 계속해서 안체에 관심이 커서 사육신 신도비(神道碑), 이충무공 신도비, 송우암묘비 등 유명한 금석문의 집자가 발현되었으니 이는 한국서예사상 일대 획기적인 변혁이라 할 수 있다. 말엽에 이르러서는 청조의 영향을 받아 다양해지며 전(篆), 예(隸), 해(楷), 행(行), 초(草) 전반에 걸쳐 새로운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고려 이전은 연대가 오래되어 육필이 거의 없어 금석문만 가지고 글씨의 성쇠를 알게 된다. 조선조에는 임란 전의 유적으로는 간찰(簡札)이 어느정도 남아 있고 그 이후는 간찰이 많아 그 연구에 있어서 간찰의 비중이 매우 크다.
조선조 서예는 작가 본위로 소개하겠다.

정도전(鄭道傳)  삼봉(三峯) 조체(趙體)
성석린(成石璘)  독곡(獨谷) 조체(趙體) 건원릉비(建元陵碑)
권근(權近)        양촌(陽村)
설경수(설慶壽)  용재(용齋) 왕법(王法) 용문사정지국사비(龍門寺正智國師碑)
공부(孔俯)        어촌(漁村) 예해초(隸楷草), 이색신도비(李穡神道碑). 무학선사탑비(無學禪師
                      塔碑)
석만우(釋卍雨)  천봉(千峰) 안평대군 소상팔경시권(瀟湘八景詩卷)
권홍(權弘)        송운헌(松雲軒) 전예(篆隸) 헌릉비음(獻陵碑陰) 성균관비(成均館碑)
신색(申穡)        암헌(巖軒) 조법(趙法) 숭례문(崇禮門)
김숙자(金叔滋)  강호산인(江湖散人)
강석덕(姜碩德)  전예(篆隸)
정척(鄭陟)        정암(整庵) 새보(璽寶) 관인(官印)
성개(成槪)        수헌(睡軒) 유법(柳法) 성령대군(誠寧大君) 이종신도비(李種神道碑)
안숭선(安崇善)  옹재(雍齋) 왕법(王法)
정인지(鄭麟趾)  학역재(學易齋) 조법(趙法)
이영서(李永瑞)  희현당(希賢堂) 팔경시권(八景詩卷)
문종(文宗)        조법입신(趙法入神)
이용(李瑢)        안평대군 자(字) 청지(淸之) 호(號)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 매죽헌(梅竹軒)
                       왕법(王法) 조법(趙法) 화금(畵琴) 문종2년 동활자서사(銅活字書寫) 임신자(
                       壬申字) 몽유도원도발문(夢遊桃源圖跋文)
박팽년(朴彭年)  취금헌(醉琴軒) 조법(趙法) 몽유도원도서(夢遊桃源圖序)
성삼문成三問)   매죽헌(梅竹軒) 조법(趙法)
이개(李塏)        백옥헌(白玉軒) 조법(趙法)
이현로(李賢老)  조법(趙法) 몽유도원도부(夢遊桃源圖賦)
강희안(姜希顔)  인재(人齋 시서화(詩書畵) 왕(王) 조법(趙法) 을해자(乙亥字)
성임(成任)        안법(顔法), 홍화문(弘化門)
정난종(鄭蘭宗)  허백당(虛白堂) 왕법(王法) 을유자(乙酉字)
성종(成宗)        조법(趙法)
김구(金絿)        자암(自庵) 회소풍(懷素風) 광초(狂草) 인수체(人壽體) 안평대군. 김구(金絿)
                       양사언(楊士彦). 한호(韓濩 사대가(四大家)
성수침(成守琛)  청송당(聽松堂) 문징명법(文徵明法)
이황(李滉)        퇴계(退溪) 왕법(王法)
황기지(黃耆志)  노고산(老孤山) 왕법(王法) 회소풍(懷素風) 광초(狂草) 초성(草聖)
김인후(金麟厚)  하서(河西) 안법(顔法) 초(草)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 왕법(王法) 초(草)
양사언(楊士彦)  봉래(蓬萊) 해초(楷草) 안법(顔法)
석휴정(釋休靜)  청허당(淸虛堂) 서산대사 천의무봉필법(天衣無縫筆法)
송준길(宋浚吉)  동춘(同春) 조법(趙法)
송시열(宋時烈)  우암(尤庵) 안법(顔法)
성혼(成渾)        우계(牛溪) 안법(顔法)
윤근수(尹根壽)  월정(月汀) 왕법(王法) 영화체(永和體)
이산해(李山海)  아계(鵝溪) 왕법(王法) 정암(靜庵) 조광조비(趙光祖碑). 회재(晦齋) 이언적비(李
                       彦迪碑)
김현성(金玄成)  남창(南窓) 송설체(松雪體)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 숭인전비
                       (崇仁殿碑)
한호(韓濩)        석봉(石峯) 사자관(寫字官)
김상헌(金尙憲)  청음(淸陰) 동기창법(董其昌法)
신익성(申翊聖)  동회(東淮) 전예(篆隸)
허목(許穆)        미수(眉수) 전(篆)
김수증(金壽增)  곡운(谷雲) 예전(隸篆)
이우(李우)        관난정(觀난亭) 낭선군(朗善君) 선조손(宣祖孫)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
윤순(尹淳)        백하(白下) 행(行)
이간(李간)        최락당(最樂堂) 낭원군(朗原君) 선조손(宣祖孫) 전예(篆隸)
이광사(李匡師)  원교(圓嶠) 해행(楷行) 초(草) 백하문인(白下門人)
이인상(李麟祥)  능호관(凌壺觀) 삼절(三絶)
강세황(姜世晃)  표암(豹庵) 삼절(三絶) 왕.미.조법(王. 米.趙法)
정조(正祖)        홍재(弘齋) 만천명월주인(萬川明月主人) 홍재전서(弘齋全書)
유한지(兪漢芝)  기원(綺園) 전예(篆隸)
정약용(丁若鏞)  다산(茶山 행서(行書)
신위(申緯)        자하(紫霞) 동기창(董其昌) 삼절(三絶)
조광진(曺匡振)  눌인(訥人) 유석암(劉石庵) 예서(隸書)
권돈인(權敦仁)  이재(彛齋) 추사서풍(秋史書風)
김정희(金正喜)  추사(秋史) 완당(阮堂) 추사서체(秋史書體)
전기(田琦)        고람(古藍) 전예해행(篆隸楷行 화(畵)
오경석(吳慶錫)  역매(亦梅0 삼한금석(三韓金石)
윤용구(尹用求)  해관(海觀) 구법(軀法)
민형식(閔衡植)  우하(又荷) 안법(顔法)
김돈희(金敦熙)  성당(惺堂) 각체(各體)
김용진(金容鎭)  영운(潁雲) 안법(顔法) 예(隸)
오세창(吳世昌)  위창(葦蒼) 전(篆)
손재형(孫在馨)  소전(素筌) 전(篆)
유희강(柳熙綱)  검여(劍如) 육조(六朝)

학술이나 예술이나 배우고 연구하려면 그 원천을 찾아야 함은 더 말할 나위 없지만 글씨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옛날에는 인쇄술이 발달되지 못하였지만 현대는 이의 발달로 진서귀적이 얼마든지 나와 공부하기가 편리해졌다. 원천을 찾아 고법을 배우되 당대 이전으로 올라가야 창작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법첩을 공부함에 있어서는 많은 종류를 욕심내서 쓰는 것 보다 가지 수를 정선하여 일생을 두고 공부하는 것이 좋다. 우리 나라 금석문은 모두 중국 서법에 의거하고 우러나온 것이므로 참고에 그치는 것이 합당할 줄로 안다.
우리 나라의 서예는 중국 서예에 근거를 두어야 함은 물론이겠지만 우리의 특수사정으로 국문 글씨를 쓰는데 주력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러나 국문 글씨만 썼다고 서예가라고 하기는 힘들 것으로 안다.

완당선생(阮堂先生)
완당 김정희 선생의 본관은 경주요 자는 원춘(元春)이요 호는 완당(阮堂) 이외에 추사(秋史),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와 별서(別署)를 모두 합치면 수백을 꼽을 것이다.
정조 10년(1876)에 판서 노경의 아들로 회임 24개월 만에 태어났다고 하며 백부 노영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순조 9년에 생원이 되고 18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說書) 검열 대교(待敎), 충청우도 암행어사, 의정부 검상, 성균관 대사성 등을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24세 때에 생부를 따라 북경에 가서 그곳 거유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 등과 교유하여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1840년 윤상도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1848년에 석방되었으나 1851년 헌종의 묘천 문재 때 그 주창자로 북청에 유배. 그 다음에 풀려났다.
학문에 있어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요도(要道)임을 주장하고 그것을 훈고(訓誥)로써 실천하는데 있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역대의 명필을 연구, 그 장점을 모아서 독특한 일체를 이루어 대성하니 이를 추사체라 일컫게 되었다. 그중 예서 행서는 전무후무한 경지를 열었다. 이는 심오하고 해박한 학문의 배경과 원천 없이는 불가능한 결과라 하겠다.
문인화 또한 서법과 학문의 저력에서 우러나 탈속 비범하여 추종를 불허한다. 금석학에 주력하여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이 있으며,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였다.
완당의 대가를 이룬 세 가지 연유를 들면 (1)명문가에 출생 (2)고증학의 성세 (3)장수하였던 것을 말하겠다. 그외에 천부적인 재질은 더 말할 나위 없다.
그의 서예를 서체별로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전서(篆書)
완당의 전서는 많지 않으나 주역상경과 장서목록 일부가 전서로 되어 있다. 그 유필은 철선전(鐵線篆)으로 고문과 소전을 혼합하여 원만한 장봉이다. 장엄한 태세를 잃지 않을 뿐 아니라 탈속하였다.

2. 예서(隸書)
완당의 글씨 중에 예서와 행서가 대종을 이뤘다. 그리고 가장 많이 전한다. 서경예(西京隸) 즉 전한예(前漢隸) 동경예(東京隸) 즉 후한예(後漢隸)로 구분하였으니 서경예는 파세(波勢)가 없고 동경예는 파책(波책)이 있다. 완당의 예는 서경예에 주력한 듯하다.
서시우아(書示佑兒) 중 일구(一句)를 보면

隸書 是書法祖家 若欲留心書道 不可不知隸矣.........(중략)

라 하였고 또

又非有胸中文字香書卷氣 不能現發於腕下指頭..........(중략)

라 하였으니, 예서(隸書)는 바로 서법의 조가(祖家)이다. 만약 서도에 마음을 두고자 하면 예서를 몰라서는 아니된다. 더구나 가슴속에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가 들어있지 않으면 능히 완하(腕下)와 지두(指頭)에 발현되지 않는다 라고 하여 문자향. 서권기의 중요성을 서시(書示)하였다. 이와 같이 예서의 진수를 피력하였고 서법의 조종(祖宗)으로 예서를 들었다. 무릇 서도에 뜻을 두었다면 반드시 예서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는 안 된다고까지 강조하였으니 바로 완당 서법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예서의 방경 고졸(方勁古拙)함과 청고 고아(淸高古雅)한 필의와 흉중에 문자향. 서권기가 들어 있어야만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이 완당 서법의 정체(正體)이기도 하다.

3. 해서(楷書)
   해서에 있어서 서시우아(書示佑兒)에

  書法 非醴泉銘 無以入手.........(중략)

라고 하였는데 이는 서법은 예천명이 아니면 손을 들여 놓을 수가 없다 한 것이니, 완당의 해서관(楷書觀)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초학(初學)에 있어서 예천(醴泉). 화도(化度) 등 비(碑)에 입수(入手)할 것을 역설하였다.
채상국(蔡相國)은 완당이 6, 7세 때 쓴 입춘첩을 보고는 훗날 이름을 날릴 것을 점쳤다고 하는데 그가 8세 때 쓴 서간문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그의 이론가 서법을 보면 전. 예. 행. 초의 특징이 종합되어야 비로소 해서가 될 수 있다는데 주목해야 될 것이다. 완당의 해서는 이왕(二王). 구. 저(歐.楮). 안진경의 법을 배워 근원을 삼았고 소식. 황정견. 유용. 옹방강 등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며, 육조해서의 필법과 관심 또한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4. 행서(行書)
완당의 행서는 서체 연변(演變)에 따라 해서에 바탕을 두었음을 더 말할 나위 없다. 구. 저와 안진경을 거쳐 소식. 황정견. 문징명. 심주. 동기창. 유용. 옹방강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이 미치지 아니한 것이 없다.
그는 행서의 원칙을 이왕(二王)에 두고 그후 제가(諸家)의 장점을 취하고 더욱 육조 비판(碑版)의 깊은 맛을 더하여 완당 서법이 나타난 것이다. 그가 연경(燕京)에서 옹방강과 필담한 묵적(墨蹟)으로 볼 때 그가 24세 때의 행서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옹(翁)과 대비하여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청년의 서(書)와 노필(老筆)의 대비도 되려니와 여기서 완당의 행서가 비상함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5. 초서(草書)
   완당의 논고인서(論古人書) 중 초서에 관하여

   白陽山人草法 有孫虔禮揚少師規度 是草法正宗也 草法不由孫揚
   皆作一鎭宅符 東人尤甚 無非惡札耳

라는 대문이 있으니, 즉 백양산인(白陽山人: 陳淳) 의 초서 쓰는 법에 손과정(孫過庭). 양무구(揚无咎)의 규법이 있으니, 이는 바로 초법(草法)의 정종(正宗)이다 초법이 손. 양을 말미암지 않는다면 모두 진택부(鎭宅符: 집 지키는 부적)를 만들 뿐인데, 동쪽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욱 심하여 악찰(惡札: 졸렬한 편지나 글씨)이 아닌 것이 없다고 단정하였다.
 성친왕(成親王)의 글씨를 논함에

   草法尤長於孫虔禮舊法 一洗惡札之鎭宅符俗習 可爲後民之式

이라 하여 성친왕(成親王)의 초법이 손과정의 법을 따랐기 때문에 진택부같은 속(俗)된 버릇을 씻어내니 뒷 사람의 법식이 될 만하다고 지적하였다.

6. 전각(篆刻)
   완당의 전각은 노경에 들 수록 자각풍(自刻風)의 졸박 청수(拙樸淸瘦)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그 많은 별호와 문자인(文字印)등이 모두 자각으로 고문(古文). 기자(奇字). 무전(繆篆). 예서(隸書). 초상인(肖像印) 등에 이르기까지 구비하고 있어서 이 분야에 있어서도 한국 전각의 선구를 이루었다.
전각이 문인이나 서화가들 손으로 직접 주도(奏刀)된 까닭은 비단 장인(匠人)에 의한 속기(俗氣)를 피하려는데 그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의 고상한 풍취를 그 전각에 발휘해 보려는 의욕이기도 하다.
특히  화가로서 전각을 겸한다면 더욱 좋은 일이며 불연(不然)이라도 안목은 지녀야 하겠다. 낙관이 작품에 있어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니 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따라서 작품이 죽고 사는 관건이니 만큼 매우 유념해야 할 일이다. 수장인(收藏人) 또한 낙관인만 못지 않아 그 진장품(珍藏品)의 품위도 결정짓는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