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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다산, 유배지서 아내 치마 잘라 만든 `하피첩`

solpee 2008. 10. 9. 11:11

다산, 유배지서 아내 치마 잘라 만든 '하피첩'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은 각별한 가족 사랑으로 유명하다. 다산의 가족 사랑을 대표하는 유산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가계(家戒.집안의 가르침)다. 그 가운데서도 부인이 시집올 때 가져온 붉은 치마에 쓴 것이 유명하다. 기록으로만 전해오던 그 가계가 석 점의 하피첩(霞帖)으로 약 200년 만에 발견됐다.

"하늘이나 사람에게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자연히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안정되어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우러나온다."

 

 

"전체적으로 완전해도 구멍 하나만 새면 깨진 항아리이듯이

 모든 말을 다 미덥게 하다가 한마디만 거짓말을 해도

 도깨비처럼 되니 늘 말을 조심하라."

"근(勤.부지런함)과 검(儉.검소함),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

"흉년이 들어 하늘을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

 굶어 죽는 사람은 대체로 게으르다.

 하늘은 게으른 사람에게 벌을 내려 죽인다."



다산이 아들에게 보낸 가계엔 엄격한 가르침과 따뜻한 사랑이 가득하다. 학문. 효도부터 재물. 음식까지 세심하게 충고했다. 명분보다 실리를 주장했던 실학자 다산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다산은 모두 넉 점의 소책자(첩)를 만들어 멀리 떨어져 살던 두 아들에게 보냈다.

그중 이번에 석 점이 처음 발견된 것이다.

다산은 글씨를 쓴 작은 천 조각(12×20㎝)을 한지(16×25㎝) 위에 하나하나 붙여 하피첩을 만들었다. 1권 17장, 2권 15장, 3권 14장 등 총 46장으로 구성됐다. 다산은 첩을 만들고 3년 후 남은 치마 조각에 매화. 참새 그림이 있는 작은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주기도 했다. 현재 고려대박물관에 소장된 '매조도(梅鳥圖)'다. '매조도'에도 '하피첩'을 만든 경위가 실려 있다.

서지학자 김영복(문우서림 대표)씨는 "'하피첩'과 '매조도'의 재질을 비교한 결과 똑같은 명주로 확인됐다"며 "다산문집에 실린 가계와 하피첩 내용이 일치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름만 알려졌을 뿐 실물을 볼 수 없었던 '하피첩'은 아들에 대한 다산의 애틋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다산연구소 박석무 소장은 "가족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500여 권의 책을 남긴 다산의 학문도 존재할 수 없었다"며 "다산의 충고는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오늘날 더욱 유효하다"고 말했다.

'하피첩'은 다음달 2일 KBS-1TV 'TV쇼 진품명품'에서 공개된다. 개인사업가 이강석씨가 2년 전 고물상 할머니로부터 우연히 건네받았다. 감정가는 1억원이다.

박정호 기자 <
jhlogos@joongang.co.kr>

◆ 하피첩

=하피는 조선시대 왕실 비(妃). 빈(嬪)들이 입던 옷.

다산은 아내 홍씨가 보낸 치마가 붉은색이라 하피(붉은 노을색 옷)라고 했다. 전남 강진에서 유배 중이던 다산은 1810년 한양에 있던 아내가 보내준 치마에 글을 써서 '하피첩'이란 이름을 달았다. 다산이 남긴 문집에는 부인이 치마를 강진에 있던 남편에게 보내고, 다산이 이를 잘라 하피첩을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부부의 정' 위에 눌러쓴 자식 사랑

다산의 '하피첩'은 여러 모로 학계와 애호가들의 관심을 끌만하다.

우선 역사적으로 유명한 유산이 200년간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KBS1 'TV쇼 진품명품'에 유물을 의뢰한 소장자 이강석씨는 "2년 전 경기도 수원의 한 공사장에서 파지를 수집하는 할머니의 수레에서 물건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는 "글씨를 보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공사장에 쌓여 있던 파지와 하피첩을 바꿨다"고 말했다.

다산의 후손들은 당연히 하피첩을 소중하게 간직했을 것이다.

다산이 딸에게 보낸 '매조도'는 후손들의 손을 거쳐 고려대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다산이 딸에게 준 '매조도'.

봄날 꽃이 활짝 핀 매화가지에 날아와 앉은 새를 그렸다.

시집간 딸이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담았다.

 

 

다산연구소 박석무 소장은 "다산이 딸에게 남긴 '매조도'는 다산의 외손자이자 학자였던 윤정기(1814~79) 집안을 거쳐 고려대에 들어간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정작 가계(家戒)의 본문에 해당되는 글은 그동안 행방이 묘연했다.

다산의 두 아들은 학연(1783~1859), 학유(1786~1855)다. 대학자였던 아버지의 명성에 가려 덜 알려졌지만 그들 역시 학자이자 문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둘째 학연은 '농가월령가'의 저자로 알려졌다. 박석무 소장은 "이번 하피첩이 지금까지 어떻게 전해졌는지 남은 기록이 없다"고 말했다.

또 다산은 왜 아내가 보낸 치마에 '가계'를 남겼을까.

성균관대 임형택(한문교육) 교수는 "사대부가 아내의 치마에 글을 남기는 것은 유례가 드문 일"이라며 "다산은 아내가 '부부의 정'을 기억해달라고 보내온 치마에 자녀에 대한 애정을 덧붙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 14세에 한 살 많은 아내(풍산 홍씨)와 결혼했던 다산은 1801년 황사영 백서사건(황사영이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막아달라고 청나라 베이징에 있던 프랑스 주교에게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려다가 발각돼 처형된 사건)으로 전남 강진에서 18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다산문집에는 하피첩을 포함해 총 9편의 가계가 실려있다.


서지학자들은 다산의 여러 가지 필체를 골고루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하피첩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김영복씨는 "이번 가계에는 다산 글씨에선 거의 볼 수 없었던 전서(篆書)가 포함됐다"며 "크기.모양 등을 다양하게 시도한 다산의 필치를 연구하는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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