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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系辨誣

solpee 2008. 8. 5. 15:14

 

조선시대인 1394년(태조 3)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 간 명(明)나라에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잘못 기록된 세계(世系)를 시정해달라고 주청(奏請)했던 사건.
고려시대인 1390년(공양왕 2) 이성계의 정적이었던 윤이(尹彛)·이초(李初)가 명나라로 도망가서 이성계를 제거할 목적으로 공양왕이 고려왕실의 후계가 아니라 이성계의 인척으로서 그와 공모하여 명나라를 치려 한다고 모함하고 이성계는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 했다. 명나라에서는 이 내용을 〈태조실록〉·〈대명회전 大明會典〉에 기록했다. 조선은 1394년 명나라 사신을 통해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종계(宗系)문제는 조선왕조의 합법성과 왕권확립에 관계된 중요한 문제였으므로 명나라 사신 황영기(黃永奇)의 귀국편에 변명주문(辨明奏文)을 지어 보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반응이 없자, 1402년(태종 2) 사은사 임빈(林彬)을 파견하여 주청문(奏請文)을 보냈으나, 명나라에서는 〈만력회전 萬曆會典〉 중수본에 변명사실을 부기하는 데 그쳤다. 이후 이것은 200여 년에 걸친 양국간의 외교문제가 되었고, 중종반정의 합법성 강조에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1518년(중종 13) 주청사 이계맹(李繼孟)이 돌아와 〈대명회전〉 〈조선국조 朝鮮國條〉의 주에 "이인임과 그의 아들 단(丹 : 이성계)이 홍무 6년에서 28년까지 4명의 왕을 시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자 중종은 남곤(南袞)·이자(李耔)를 보내 개정을 요구했다. 그후 〈대명회전〉 중찬이 있으리라는 소식을 듣고 1529년 유보(柳溥), 1539년 권벌(權), 1557년(명종 12) 조사수(趙士秀), 1563년 김주(金澍), 1573년(선조 6) 이후백(李後白)·윤근수(尹根壽), 1575년 홍성민(洪聖民) 등을 보내 거듭 개정을 주장했다. 1584년 황정욱(黃廷彧)이 중찬된 〈대명회전〉의 수정된 등본을 가지고 돌아와서 종계변무의 목적이 일단락되었다. 1587년 유홍(兪泓)이 중수된 〈대명회전〉 중 조선관계 부분 1질을 받아와 선조가 종묘사직에 친고(親告)했으며, 1589년 윤근수가 〈대명회전〉 전부를 받아옴으로써 종계변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

 

광국공신이란 중국의 공식 문서에 태조 이성계의 조상에 관한 종계(宗系)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는데 공이 큰 사람에게 내린 공신 책록이다.

 

일의 발단은 태조3년(1394)에 명사(明使) 황영기(黃永奇) 등 세 사람이 와서 해악산천(海岳山川)의 제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고제축문(告祭祝文) 내용중에 ‘고려의 배신(陪臣: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서 권세를 부리는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後孫)인 성계(成桂)는  云云’하는 구절이 있어 이 명사 편에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상세히 변무(辨誣)하는 글을 명나라로 보냈다.

 

그 후 태종 2년(1402)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다 돌아온 조온(趙溫), 공부(孔俯) 등이 고하기를 명(明)의 조훈조장(祖訓條章)‘이성계의 종계(宗系)가 이인임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고 아뢰었고, 그 후 대명회전(大明會典)에도 이렇게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로부터 태종-선조간 12대에 걸쳐 전후 15회의 사신을 보내는 등 186년 간의 각고의 노력 끝에 선조22년(1599)에 종계를 바로 잡고, 2년 뒤인 선조 24년에 그      동안 종계를 바로잡는데 공이 큰 19인을 골라 輸忠貢誠翼謨修紀 光國功臣(수충공성익모수기 광국공신)』(약칭: 광국공신)으로 책록한 것이다.

종계변무 사신 현황

순서

연대

정사

부사

서장관

비고

1

태종3년(1403)

  빈(李  彬)

민무휼(閔無恤)

 

종계변무주청사

2

중종12년(1517)

이계맹(李繼孟)

이사균(李思鈞)

이지방(李之芳)

책봉주청사겸

3

" 13 "(1518)

  곤(南  袞)

이자(李자)

  충(韓  忠)

종계변무주청사

4

" 31 "(1536)

  겸(宋  겸)

 

 

하성절사겸

5

" 34 "(1539)

  발(權  撥)

임 권(任 權)

 

동지사겸

6

" 35 "(1540)

김인손(金麟孫)

임백령(林百齡)

 

사은사겸

7

명종 6년(1551)

  두(韓  두)

 

 

동지사겸

8

" 10 "(1555)

  유(鄭  裕)

 

 

동지사겸

9

선조 6년(1573)

이후백(李後白)

윤근수(尹根壽)

윤탁연(尹卓然)

종계변무주청사

10

"  7 "(1574)

안자유(安自裕)

 

이언유(李彦愉)

동지사겸

11

" 10 "(1577)

윤두수(尹斗壽)

 

김성일(金誠一)

사은사겸

12

" 14 "(1581)

김계휘(金繼輝)

 

고경명(高敬命)

종계변무주청사

13

" 17 "(1584)

황정혹(黃廷或)

 

한응인(韓應寅)

종계변무주청사

14

" 20 "(1587)

  홍(兪  泓)

 

  섬(尹  暹)

사은사겸

15

" 22 "(1589)

  탁(鄭  琢)

권극지(權克智)

 

사은사겸

 

참고로 조선조 때 중국에 보내는 사신은 정기사절과 임시사절이 있는데 정기사절에는 정조사(正朝使: 정월 초하루에 중국 황제를 배알하는 사절, 세배사절), 성절사(聖節使: 중국 황제의 탄신일 경축사절), 천추사(千秋使: 중국 황후의 탄신일 경축사절), 동지사(冬至使: 동지를 전후해서 보내는 사절)가 있고, 임시사절에는 사은사(사은사: 중국 황제가 호의를 베풀었을 때 감사하는 인사를 드리기 위하여 보내는 사절), 주청사 또는 진주사(奏請使, 陳奏使: 중국 황제에게 상주할 일이나 보고할 일이 있을 때 보내는 사절), 진하사(進賀使: 중국 황실의 경사를 축하하려고 보내는 사절), 진위사 또는 진향사(進慰使, 進香使: 중국 황실의 상고를 위문하기 위하여 보내는 사절), 변무사(辯誣使: 중국의 오해를 해명하기 위하여 보내는 사절), 참핵사(參覈使: 조, 중간에 공동 논의 할 사항이 있을 때 보내는 사절) 등인데 종계변무사신은 임시사절의 변무사에 해당한다.

 

선조24년에 종계변무에 따른 공로자 19인에게 공신책록을 하였는데 공신명(功臣名)은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이며 보통 약해서 광국공신(光國功臣)이라 한다.

 

  광국공신 책록(光國功臣冊錄)현황(淸選考)

등급(인원)

공신명

1등(3인)

윤근수(尹根壽), 황정혹(黃廷或), 유  홍(兪  泓)

2등(7인)

홍성민(洪聖民), 이후백(李後白), 윤두수(尹斗壽), 한응인(韓應寅)

  섬(尹  暹), 윤  형(尹  炯), 홍순언(洪純彦)

3등(9인)

  주(金  澍), 이양원(李陽元), 황  림(黃  琳), 윤탁연(尹卓然)

  철(鄭  澈), 이산해(李山海), 기대승(奇大升), 유성룡(柳成龍)

  황(崔  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