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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詩와 雜諺/立冬節初候水始氷2日(陰10/4 )庚申.

solpee 2021. 11. 8. 05:53

雜詩와 雜諺

 

不寐(잠 못 이루며)

                                                 李恒福(1556∼1618(명종 11∼광해군 10))

 

世亂疎儒術 : 어지러운 세상, 공자 가르침 멀고

時危忌太言 : 시절 위태로워 중요한 말을 꺼리는구나

不眠憂社稷 : 잠 못 이루고 나라 걱정하면서도

無力濟黎元 : 창생들을 구제할 만한 힘도 없도다

 

草草新年夢 : 초조해 하는 것은 새해의 꿈

蕭蕭古驛軒 : 쓸쓸한 것은 옛 역사로다

家鄕已千里 : 고향집 벌써 천리나 멀어

誰肯問寒暄 : 그 누가 내 안부를 물어줄거나

 

오늘의 孟子

 1. 좁으면서도 넓은 이야기

  齊宣王問曰:  「文王之囿方七十里, 有諸? 」 孟子對曰:  「於傳有之. 」

 제선왕이 물었다.

 "문왕의 사냥터는 사방 70 리였다고 하는데 정말입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그렇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曰:  「若是其大乎? 」 曰:  「民猶以爲小也. 」 曰:  「寡人之囿方四十里, 民猶以爲大, 何也? 」 曰:  「文王之囿方七十里, 芻蕘者往焉, 雉ꟙ者往焉, 與民同之. 民以爲小, 不亦宜乎?

 "그렇게나 컸었습니까?"

 "백성들은 오히려 작다고 하였습니다."

  왕이 말했다.

 "저의 사냥터는 사방 40 리인데 백성들은 크다고 합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문왕의 사냥터는 70 리가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나무꾼은 나무를 하고, 사냥꾼은 사냥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백성과 함께 이용하니 백성들이 작다고 한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臣始至於境, 問國之大禁, 然後敢入. 臣聞郊關之內有囿方四十里, 殺其麋鹿者如殺人之罪. 則是方四十里, 爲阱於國中. 民以爲大, 不亦宜乎? 」

 제가 [이 나라에 올 때] 처음 국경에 도달해서, 나라에서 크게 금지하는 것을 물어본 후에야 들어왔습니다. 제가 듣자니 성밖에 사방 40 리의 사냥터가 있는데, 그곳의 사슴을 잡는 자는 살인죄와 같이 취급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나라 안에 사방 40 리의 함정을 파 놓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백성이 그것이 크다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2. 참 용기

  齊宣王問曰:  「交鄰國有道乎? 」 孟子對曰:  「有. 惟仁者爲能以大事小, 是故湯事葛, 文王事昆夷; 惟智者爲能以小事大, 故大王事獯鬻, 句踐事吳.

 제선왕이 물었다.

 "이웃 나라와 사귀는 데 무슨 도리가 있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있습니다.

 오직 어진 사람만이 큰 나라를 가지고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탕 임금이 [소국인] 갈 나라를 섬겼고, 문왕이 곤이(라는 나라)를 섬겼습니다.

 오직 지혜로운 사람만이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왕이 훈육을 섬기고, 구천이 오나라를 섬겼습니다.  

 

以大事小者, 樂天者也; 以小事大者, 畏天者也. 樂天者保天下, 畏天者保其國. 詩云:  ‘畏天之威, 于時保之.’」

 대국으로서 소국을 [넘보지 않고] 섬기는 것은 하늘의 뜻을 즐기는 자이고,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기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하늘의 뜻을 즐기는 자는 천하를 가질 것이며,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는 자기 나라를 보존하게 됩니다.

 시경에 말하기를,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지금 나라를 보전한다.'고 하였습니다."

 

* 品石亭記(돌도 칭찬만 하게)

                                                                       정약용

 

 초천의 농막으로 돌아온 뒤, 나는 날마다 형제, 친척들과 유산의 정자에 모여서 술과 참외를 먹고 마시며 떠드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술이 거나해지자 어떤 이가 술병을 치고 책상을 두드리며 일어나 말했다.

 “누구누구는 이익을 추구하여 부끄러운 줄 모르는데도 권세와 명예를 걸머쥐었으니 분통이 터질 노릇이요, 누구누구는 욕심이 담담하여 자취를 숨겨 멀리 숨겨버렸으니, 끝내 묻혀버리고 출세하지 못하니 애석한 일입니다.”

 余旣歸苕川之墅。日歟昆弟親戚。會于酉山之亭。飮酒啖瓜。讙呼爲樂。酒旣酣。有擊壺拍案而起者曰。某人嗜利無恥。兜攬勢榮。可痛也。某人恬澹遠跡。湮晦不達。可惜也。

 

 내가 술 한 잔을 부어 꿇어앉으며 청하기를,

 “예전에 반고는 옛 사람들을 품평하다가 종내에는 두헌의 죄에 연좌되었고, 허수는 당대의 인물들을 품평하다가 결국 조조에게 협박을 당했습니다.

 사람은 품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까닭에 삼가 벌주를 드립니다.”

余酌一琖。跽而請曰。昔班固品往古之人。而終連竇憲之累。許劭品當時之人。而卒被曹操之刦。人不可品也。敬用罰之。

 

 얼마를 지나자 또 어떤 이가 쯧쯧찟찟하고 혀를 차며 일어나 말하기를

 “저 말은 장에 내가는 쌀 짐도 지지 못하면서 꼴만 축내고, 저 개는 담장을 뚫고 넘어오는 도적도 지키지 못하면서 뼈다귀만 바라고 있구나.”

라고 하였다. 나는 다시 한 잔을 부어 들고 꿇어앉아 청하였다.

 “예전에 맹정승(맹사성)은, 어느 소가 더 나으냐고 묻는 말에 소가 들으면 기분 상할까 하여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짐승도 품평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까닭에 삼가 벌주를 드립니다.”

 旣而有喞喞嘖嘖而起者曰。彼馬乎。不能販米之載而費芻豆。彼狗乎。不能穿踰之守而望骨鯁。余又酌一琖。跽而請曰。昔孟相國不答二牛之優劣。獸不可品也。敬用罰之。

 

 여러 손님들이 낯을 찡그리고 불쾌해하며,

 “그대의 정자에서 놀기가 참으로 힘들구려! 우리가 앞으로는 입을 꿰매고 혀를 묶어두고 있으리까?”

하였다. 내가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종일토록 큰소리로 지껄여도 막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위해 제가 먼저 해보지요.

 諸公蹙然弗悅曰。難乎游於子之亭矣。吾將緘口而結舌乎。余曰是何言也。有終日叫呶而莫之禁者。請爲諸公先之。

 

 부암의 바위는 삼엄하게 우뚝 서서 북쪽으로는 고랑의 성난 물결을 막아주고 남쪽으로는 필탄의 흰 모래사장을 펼쳐놓으니, 이것은 바위가 이 정자에 대해 공이 있는 것입니다.

 鳧巖之石。崒然森竦。北排臯狼之恕濤。南鋪筆灘之明沙。是石之有功於斯亭者也。

 

 남자주의 바위는 돌무더기가 쌓인 것이 죽 늘어서서 깃이나 띠처럼 둘러싼 두 물을 갈라 오강의 배를 받아들이니, 이것은 바위가 이 정자에 대해 다정한 점입니다.

 藍洲之石。磊砢歷落。分二水之襟帶。納五江之帆檣。是石之有情於斯亭者也。

 

 석호의 바위는 붉고 푸른 온갖 모양을 만들어내는데, 새벽이면 환한 아침노을에 물들고 저녁이면 석양에 안겨 정자마루의 서까래를 비춥니다. 그러면 상쾌한 기운이 저절로 생기니 이것은 바위가 이 정자에 아취를 더해주는 것입니다.

 대체로 사물 중에 지각이 없는 것이 돌입니다. 종일토록 품평해도 화낼 줄을 모릅니다. 누가 그대들에게 입을 꿰매고 혀를 묶어 두라고 했습니까?”

하였다.

 石湖之石。紫綠萬狀。曉挹明霞。夕擁餘靄。照映軒楣。爽氣自生。是石之有趣於斯亭者也。夫物之無知者石也。終日評品而莫之怒焉。孰謂子緘口而結舌哉。

 

 

 그러자 어떤 이가

 “예전에 유후 장량은 황석을 황석공의 후신이라 여겨서 제사를 지냈고, 원장 미불은 바위를 좋아한 나머지 공경하여 절까지 하였었네. 자네가 바위를 품평하니 유독 어찌된 일인가?”

하고 나를 나무랐다. 내가

 “좋은 말씀! 바로 그렇기에 제가 칭찬만 하였지요 언제 모욕하며 불손하게 말한 적이 있었소이까?”

하고 대답하였다.

 정자에는 이름이 없었으나 이때부터 품석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때 논란한 내용을 기록하여 이 정자의 記文으로 삼는다.

 有難于余者曰。昔留侯葆石而祠之。元章肅石而拜之。子之品石。獨奈何哉。余曰善。夫如是也。故吾固譽之矣。何嘗慢侮不恭乎哉。亭故無名。自玆名之曰品石亭。錄其所與答難者以爲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