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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의 建國과 後晉의 이상한 황제 계승/霜降節末候蟄蟲咸俯5日(陰10/2)戊午.

solpee 2021. 11. 5. 15:02

《後晉紀2 高祖 天福 2年》〈丁酉, 937年〉

 

 55. 이 해에 거란에서는 연호를 고쳐 회동이라 하고 국호를 대요라 하였으며, 공경과 여러 관직은 모두 중국을 모방하고 중국인들을 채용하였는데, 조연수를 추밀사로 삼고 얼마 안 있어 겸정사령으로 삼았다.

 55. 是歲,契丹改元會同,國號大遼,公卿庶官皆倣中國,參用中國人,以趙延壽為樞密使,尋兼政事令。〈為遼人用趙延壽以圖晉張本。

 

《後晉紀3 高祖 天福 5年》〈庚子· 940

 ㉟. 애초에, 황제는 안문관 북쪽을 잘라내어서 요에 뇌물로 주었는데, 이로부터 토욕혼은 모두 요에 속하였으며 그들의 탐욕과 학대를 고통스럽게 여겨서 중원에 귀부할 것을 생각하였는데, 성덕절도사 안중영이 다시 그들을 유혹하자 이에 토욕혼이 부락 1천여 장을 인솔하고 오대에서 도망해 왔다.

 ㉟. 初,帝割鴈門之北以賂契丹,〈見二百八十卷元年〉。由是吐谷渾皆屬契丹,苦其虐,思歸中國;成德節度使安重榮復誘之,〈復,扶又翻。誘,音酉〉。於是吐谷渾帥部落千餘帳自五臺來奔。〈歐陽修曰:吐谷渾本居青海,唐至德中為吐蕃所攻,部族分散,其內附者唐處之河西。唐末,其首領有赫連鐸為大同節度使,為晉王克用所破,部族益微,散處蔚州界中。余按唐高宗之時,吐谷渾為吐蕃所破,棄青海而內徙,至至德中,青海不復有吐谷渾。而吐蕃東吞河、隴,吐谷渾復東徙,居雲、蔚之間。自五臺來奔,蓋取飛狐道奔鎮州也。未白曰:吐谷渾謂之退渾,蓋語急而然。聖曆後,吐蕃陷安樂州,其眾東徙,散在朔方。赫連鐸以開成元年將本部三千帳來投豐州,文宗命振武節度使劉沔以善地處之。及沔移鎮河東,遂散居川界,音訛謂之退渾。其後吐谷渾白姓皆赫連之部落。赫連鐸為李克用所逐,歸幽州李匡儔,遂居蔚州界,部落代建,其氏不常。白承福自莊宗後為都督,依北山北石門為柵,賜其額為寧朔府,以都督為節度使〉。

 

 요에서는 크게 화가 나서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에게 배반한 사람을 불러들인 것을 나무랐다.

 契丹大怒,遣使讓帝以招納叛人。〈為契丹誚讓不已,帝憂悒而殂張本〉。

 

《後晉紀4 高祖 天福 7年》〈壬寅· 942

 

 ⑫. 거란에서는 진이 토욕혼을 초무하고 받아들여서 사자를 파견하여 와서 책망하였다.

 황제가 근심하며 계책 만들 방법을 알지 못하였는데, 5월 16일에 비로소 병이 났다.

 ⑫. 契丹以晉招納吐谷渾,遣使來讓。帝憂悒不知為計;五月,己亥,始有疾。〈悒,乙及翻。

 

 ⑮. 황제가 병석에 눕자 어느날 아침에 풍도가 홀로 마주하였다. 황제는 어린 아들인 석중예에게 명령하여 나가서 그에게 절을 하게하고 또 환관으로 하여금 석중예를 안고 풍도의 품속에 두게 하였는데 그의 생각은 대개 풍도에게 그를 보좌하여 세우게 하려는 것이었다.

 ⑮. 帝寢疾,一旦,馮道獨對。帝命幼子重睿出拜之,又令宦者抱重睿置道懷中,其意蓋欲道輔立之。〈重,直龍翻。考異曰:漢高祖實錄:「晉高祖大漸,召近臣屬之曰:『此天下,明宗之天下,寡人竊而處之久矣。寡人既謝,當歸許王,寡人之願也。』此說難信。今從薛史。〉

 

 6월 13일에 황제가 죽었다.

 풍도는 태평절도사· 시위마보도우후인 경연광과 더불어 논의하여서 국가에 많은 어려움이 있어서 의당 맏아들을 군주로 세워야 한다고 하여 마침내 광진윤인 제왕 석중귀를 받들어 후사로 삼았다.

 이날에 제왕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경연광은 자기의 공로라고 생각하고 비로소 용사하니 도하에 있는 사람들은 마주 보며 이야기할 수 없도록 하였다.

 六月,乙丑,帝殂。〈年五十一。五代會要,殂於鄴都大內之保昌殿。〉

道與天平節度使、侍衛馬步都虞候景延廣議,以國家多難,宜立長君,乃奉廣晉尹齊王重貴為嗣。〈晉高祖託孤於馮道,與吳主孫休託孤於濮陽興、張布之事略同。難,乃旦翻。〉是日,齊王即皇帝位。延廣以為己功,始用事,禁都下人無得偶語。〈以防姦人謀為變。〉

 

 애초에, 고조의 병이 위독하자 하동절도사 유지원에게 들어와서 정사를 보좌하라는 칙지가 있었는데 제왕이 이를 잠재웠으며, 유지원이 이 일로 말미암아서 제왕을 원망하였다.

 初,高祖疾亟,有旨召河東節度使劉知遠入輔政,齊王寢之;知遠由是怨齊王。〈為劉知遠不入援張本。

 

 ㊱. 황제가 애총에 즉위하면서 대신들이 '거란에 표문을 받들고 칭신하며 고애하는 문제' 를  논의하였는데, 경연광이 편지를 보내어 칭손할 수는 있으나 칭신해서는 안 된다고 요청하였다.

 이숭이 말하였다.

 "몸을 굽혀서 사직을 위하는 일인데 무슨 수치가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이와 같이 하시면 다른 날에 반드시 몸에 갑옷과 투구를 두르고 요와 더불어 싸워야 할 텐데, 그때에 후회한들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㊱. 帝之初即位也,大臣議奉表稱臣告哀於契丹,景延廣請致書稱孫而不稱臣。〈景延廣之議,因三年契丹主令高祖稱兒皇帝,用家人之禮致書也。〉李崧曰:「屈身以為社稷,何恥之有!〈為,于偽翻。〉陛下如此,他日必躬擐甲胄,〈擐,音宦。〉與契丹戰,於時悔無益矣。」〈於時者,於其時也。〉

 

 경연광이 굳게 다투자 풍도는 그 사이에서 확정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황제는 끝내 경연광의 의견을 좇았다. 요에서는 크게 화가 나서 사자를 파견하여 와서 책망하며 또 말하였다.

 "어찌하여 먼저 품의를 이어받지 않고, 갑자기 황제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단 말인가?"

 경연광이 다시 공손치 않은 말로 그에게 대답하였다.

 延廣固爭,馮道依違其間。帝卒從延廣議。〈卒,子恤翻。〉契丹大怒,遣使來責讓,且言:「何得不先承稟,遽即帝位﹖」延廣復以不遜語答之。

 

 요의 노룡절도사 조연수가 중원에서 진이 황제를 대신하려고 하여 누차 요에 유세하여 진을 공격하라고 하니 요황제가 자못 그럴 것이라고 여겼다.

 契丹盧龍節度使趙延壽欲代晉帝中國,〈趙延壽父子欲帝中國之心,已見於屯團柏之時。〉屢說契丹擊晉,契丹主頗然之。〈說,式芮翻。為契丹入寇張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