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潞王의 거저먹는 쿠데타 3/ 寒露節中候雀入大水爲蛤4日(陰9/11)丁酉

solpee 2021. 10. 14. 16:15

《後唐紀7 潞王 淸泰 元年》〈甲午, 934年〉

 

 ⑩. 3월에 제서를 내려서 강의성을 봉상행영도초토사로 삼고 왕사동으로 이를 돕게 하였다.

 24일에 노왕이 화주에 도착하여 약언조를 체포하여 그를 가두었다.

 25일에 문향에 도착하였다. 조정에서 앞뒤로 징발한 여러 군대는 서군을 만나자 모두 영접하여 항복하고 한 사람도 싸우는 사람이 없었다.

 25일에 문향에 도착하였다. 조정에서 앞뒤로 징발한 여러 군대는 서군을 만나자 모두 영접하여 항복하고 한 사람도 싸우는 사람이 없었다.

 26일에 강의성이 시위병을 이끌고 낙양을 출발하자 조서를 내려서 시위마군지휘사 안종진을 경성순감으로 삼았다. 안종진은 이미 노왕의 편지를 받은 터라 몰래 심복들을 벌려 놓았다.

 ⑩. 癸亥,制以康義誠為鳳翔行營都招討使,以王思同副之。

甲子,潞王至華州,獲藥彥稠,囚之。乙丑,至閿鄉。〈九域志:華州東至閿鄉九十里,自閿鄉東至陝州一百七十里。華,戶化翻。閿,武巾翻,亦作「閺」。〉朝廷前後所發諸軍,遇西軍皆迎降,無一人戰者。丙寅,康義誠引侍衛兵發洛陽,詔以侍衛馬軍指揮使安從進為京城巡檢;從進已受潞王書,潛布腹心矣。

 

 이날에 노왕이 영보에 도착하니 호국절도사 안언위와 광국절도사 안중패가 모두 항복하였으며, 오직 보의절도사 강사립만이 협성(삼문협)을 굳게 지키면서 강의성을 기달릴 것을 꾀하였다. 이보다 먼저 봉상의 500기병이 섬서를 지키면서 노왕의 선봉이 되어 성 아래에 도착하여 성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쳐 말하였다.

 "금군 10만이 이미 새로운 황제를 받들고 있으니 너희들 몇 명이 어찌 하겠는가? 다만 한 개의 성에 있는 사람에게 누를 끼쳐서 피를 땅에 바를 뿐이다."

 이에 봉성의 병졸들이 앞 다투어 나와서 영접하니 강사립도 금할 수 없자 하는 수 없이 역시 나와서 항복하였다.

 是日,潞王至靈寶,〈靈寶縣在陝州西四十五里。〉護國節度使安彥威、匡國節度使安重霸皆降,〈莊宗同光四年,安重霸以州降。重,宜龍翻。〉惟保義節度使康思立謀固守陜城以俟康義誠。〈陝,失冉翻。〉先是,捧聖五百騎戍陝西,為潞王前鋒,至城下,呼城上人曰:「禁軍十萬已奉新帝,爾輩數人奚為!徒累一城人塗地耳。」〈先,悉薦翻。累,力瑞翻。〉於是捧聖卒爭出迎,思立不能禁,不得已亦出迎。

 

 27일에 노왕이 섬에 도착하자 요좌들이 왕에게 유세하였다.

 "지금 대왕께서는 곧 경기에 도착하실 것인데 전해 듣건대 승여가 이미 파천하였다고 하니, 대왕께서는 의당 이곳에 조금만 머무르시면서 먼저 편지를 보내셔서 경성의 사서들을 위로하고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왕이 이를 좇아서 편지를 보내어 낙양의 문무사서들을 타일렀는데 오직 주홍소와 풍윤 두 족속만은 사면하지 않는 것 외에는 스스로 나머지 사람들은 걱정하거나 의심하지 말라고 하였다.

 丁卯,潞王至陜,僚佐說王曰:「今大王將乃京畿,傳聞乘輿已播遷,〈說,式芮翻。乘,繩證翻。〉大王宜少留於此,先移書慰安京城士庶。」王從之,移書諭洛陽文武士庶,惟朱夕昭、馮贇兩族不赦外,自餘勿有憂疑。

 

 강의성의 군사가 신안에 도착하자 거느린 장사들이 스스로 상호 결집하여 백 혹은 열씩 무리를 지어 갑옷과 병장기를 버리고 앞서기를 다투어 섬으로 가서 항복하였는데 끊임없이 계속 이어졌다. 강의성이 건호에 도착하니 휘하에는 겨우 수십 명만 있었으며, 노왕의 후기 10여 명을 만나자, 강의성은 차고 있던 활과 칼을 풀어서 신표로 삼고, 후기를 통하여 노왕에게 항복 받아 주기를 요청하였다.

 康義誠軍至新安,〈新安縣西距陝州二百餘里。〉所部將士自相結,百什為群,棄甲兵,爭先詣陝降,纍纍不絕。義誠至乾壕,〈九域志:陝州陝縣有乾壕鎮。乾,音干。〉麾下纔數十人;遇潞王侯騎十餘人,義誠解所佩弓劍為仩,因侯騎請降於潞王。

 

 28일에 민제는 노왕이 섬에 도착하였고 강의성의 군대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되고 놀라워서 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고 급히 사자를 파견하여 주홍소를 불러서 향할 곳을 모의하게 하니, 주홍소가 말하였다.

 "급히 나를 부르는 것은 나를 죄 주려는 것이다."

 우물에 가서 빠져 죽었다.

 戊辰,閔帝聞潞王至陝,義誠軍潰,憂駭不知所為,急遣〈【章:十二行本「遣」下有「中」字;乙十一行本同。】〉使召朱弘昭謀所向,弘昭曰:「急召我,欲罪之也。」赴井死。

 

 안종진은 주홍소가 죽었다는 서식을 듣고 풍빈을 잡아서 죽이고 그의 가족을 다 없앴으며, 주홍소와 풍빈의 수급을 노왕에게 전달하였다. 황제가 위주로 도망하려고 하여 맹한경을 불러 위주에 가서 먼저 머무를 곳을 준비하게 하였으나 맹한경은 부름에 호응하지 않고 단기로 섬으로 도망갔다.

 安從進聞弘昭死,殺馮貲於第,滅其族,〈考異曰:張昭閔帝實錄:「帝召弘昭不至,俄聞自殺,乃令從進殺貲。」按從進傳貲首於陝,則貲死非閔帝之命明矣。今不取。〉傳弘昭、貲首於潞王。帝欲奔魏州,召孟漢瓊使詣魏州為先置;〈先置者,先路置頓也。〉漢瓊不應召,單騎奔陝。

 

 애초에, 황제가 번진에 있으면서 아장인 모용선을 총애하고 신임하였었는데, 즉위하게 되자 공학지휘사로 삼았으며, 황제가 장차 북쪽으로 가서 하를 건너면서 은밀히 그와 더불어 모의하여 부병을 인솔하고 현무문을 지키게 하였다. 이날 저녁에 황제는 50기를 데리고 현무문을 나가면서 모용천에게 말하였다.

 "짐은 또 위주에 행차하여 서서히 부흥을 도모할 것이니 너는 말을 가지고 공학을 인솔하고 나를 좇으라."

 모용천이 말하였다.

 "살든지 죽든지 대가를 좇을 것입니다."

 마침내 겉으로 단결을 만들었지만 황제가 이미 나가자 즉시 문을 닫고 따라가지 않았다.

 初,帝在藩鎮,愛信牙將慕容遷,及即位,以為控鶴指揮使;帝將北渡河,密與之謀,使帥部兵守玄武門。〈玄武門,洛陽宮城北門。帥,讀曰率;下同。〉是夕,帝以五十騎出玄武門,謂遷曰:「朕且幸魏州,徐圖興復,汝帥有馬控鶴從我。」遷曰:「生死從大家。」乃陽為團結;帝既出,即闔門不行。〈史言自古以來,眾叛親離未有甚於此時。〉

 

 29일에 풍도 등이 조정에 들어와서 단문에 이르러서야 주홍소와 풍빈이 죽고 황제는 이미 북쪽으로 도주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풍도와 유후가 돌아가려고 하자 이우가 말하였다.

 "천자는 나갔고 우리들은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소. 지금 태후께서 궁궐 안에 계시니 우리들이 마땅히 중서에 가서 소황문을 파견하여 태후에게 나아가야 할지를 받아가지고 그런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신으로서 도리일 것이오."

 己巳,馮道等入朝,乃端門,聞朱、馮死,帝已北走;道及劉昫欲歸,〈昫,香句翻,又許羽翻。〉李愚曰:「天子之出,吾輩不預謀。今太后在,宮,吾輩當至中書,遣小黃門取太后進止,然後歸第,人臣之義也。」

 

 풍도가 말하였다.

 "주상께서는 사직 지키기를 잃고 잇지만, 신하들은 오직 임금만을 받들어야 하는데 임금이 없는데도 궁성에 들어온 것은 마땅한 바가 아닐까 두렵소. 노왕이 이미 곳곳에 방문을 붙이고 잇으니, 돌아가서 교령을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하오."

 마침내 돌아갔다.

 천궁사에 도착하였는데, 안종진이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였다.

 道曰:「主上失守社稷,人臣惟君是奉,無君而入宮城,恐非所宜。〈唐之兩都,三省及寺監皆在宮城之內。〉潞王已處處張榜,不若歸俟教令。」乃歸。至天宮寺,安從進遣人語之曰: 〈語,失倨翻。〉

 

 "노왕이 배나 빠른 속도로 와서 도착하였으니 상공께서는 의당 백관을 인솔하고 곡수에 가서 받들어 영접하시오."

 마침내 절 안에 머무르면서 백관을 소집하였다. 중서사인 노도가 도착하자 풍도가 말하였다.

 "사인들 기다린 지가 오래되었으며, 긴급한 것은 권진문서이니 의당 신속히 기초하여 갖추도록 하시오."

 노도가 말하였다.

 "노왕이 입조하면 백관들이 줄을 지어 영접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설령 폐위하고 세우는 일이 있다 해도 마땅히 태후의 교령을 기다려야 하는데 어찌 갑자기 등극하도록 권고하는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단 말입니까?"

 「潞王倍道而來,且至矣,相公宜帥百官至穀水奉迎。」〈穀水在洛陽城西。〉乃止於寺中,召百官。中書舍人盧導至,馮道曰:「俟舍人久矣, 所急者勸進文書,宜速具草。」〈草者,草創其辭。〉導曰:「潞王入朝,百官班迎可也;設有廢立,當俟太后教令,豈可遽議勸進乎﹖」

 

 풍도가 말하였다.

 "일은 마땅히 사실에 부합해야 하오."

 노도가 말하였다.

 "어찌 천자께서 밖에 잇는데 신하가 갑자기 대위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권고한단 말입니까? 만약 노왕이 절개를 지키며 북면을 하고 대의를 가지고 견책한다면 장차 무슨 말로 대답하겠습니까? 공이 백관을 인솔하고 궁문에 가서 명단을 올리고 안부를 묻는 것만 같지 못하고 태후에게 나아가야 할지를 가지고 가는 것이 좋겠소."

 道曰:「事當務實。」導 曰:「安有天子在外,人臣遽以大位勸人者邪!若潞王守節北面,以大義見責,將何辭以對!公不如帥百官詣宮門,進名問安,取太后進止,則去就善矣。」〈或問 馮道、李愚、盧導之論,其於新舊君之際孰為合於義乎﹖曰:皆非也。此如群奴之事主,家主死而有二子,其一養子也,其一親子也。養子與親子爭家政,養子勝而親子不勝,一奴曰,「皆郎君心,梧從其勝者而輔之;」一奴之心本亦附勝者,而不敢公言附欴也,曰:「吾將決諸主母。」馮道、李愚之謂也。或曰:盧導之言如何﹖曰:盧導之不肯草勸進文書,是也;若其持論,則猶李愚也。至於言去就之善,若是者得為善乎﹖其言之非殆有甚於李愚矣。曰:然則為馮道、李愚者當何如﹖曰:若漢人之論相,主在與在,主亡與亡可也;然亦僅可而已,未能盡相道也。夫子之言曰:「危而不持,顛而不扶,則將焉用彼相矣!」明乎此,則為相者貴於持危扶顛,不以但能盡死為貴也。〉

 

 풍도가 아직 대답하지 아니하였는데 안종찬이 누차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재촉하며 말하였다.

 "노왕이 도착하자 태후와 태비는 이미 중사를 파견하여 영접하고 위로하게 하는데, 어찌 백관들이 열을 지어 있지 않을 수 있겠소?"

 풍도 등이 즉시 분연히 달려갔다. 이미 그렇게 하고 났는데도 노왕이 아직 도착하지 않자 세 재상이 상양문 밖에서 쉬었는데 노도가 앞으로 지나가자 풍도가 다시 불러서 그에게 이야기하였으나 노도의 대답은 처음과 같았다. 이우가 말하였다.

 "사인의 말이 옳소. 우리들의 죄는 머리털을 뽑아 헤아려도 충분하지 않소."

 道未及對,從進屢遣人趣之曰:「潞王至矣,太后、太妃已遣中使迎勞矣,〈趣,讀曰促。勞,力到翻。〉安得百官無班!」道等即紛然而去。既而潞王未至,三相息於上陽門外,〈三相,馮道、李愚、劉昫也。上陽門,上陽宮門也。上陽宮在洛陽宮城西。〉盧導過於前,道復召而語之,〈復,扶又翻。語,牛倨翻。〉導對如初。李愚曰:「舍人之言是也。吾輩之罪,握髮不足數。」〈用戰國須賈之言。擢,拔也。數,所具翻。〉

 

 강의성이 섬에 가서 대죄하니, 노왕이 그를 책망하여서 말하였다.

 "선황께서 안가하고서 후사를 세우는 일은 여러 고을에게 달려 있고, 지금 화앙께서 양음에 계셔서 정사도 여러 공들에게서 나오고 있는데, 어찌하여 시종일관할 수 없어서 나의 동생을 빠뜨려서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단 말이오?"

 강의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죽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평소 그의 사람됨을 미워하였으나 아직 성급히 죽이고 싶지 않아서 또 그를 용서하였다. 마보도우후인 장종간과 좌용우통군인 왕경감이 부하들에게 붙잡히게 되어 노왕에게 항복하니, 동군이 모조리 항복하였다. 노왕이 태후에게 전문을 올려서 나아가야 할지 머물러야 할지를 받고서 드디어 섬에서 동쪽으로 갔다.

 康義誠至陝待罪,潞王責之曰:「先帝晏駕,立嗣在諸公;今上亮陰,政事出諸公,何為不能終始,陷吾弟至此乎﹖」義誠大懼,叩頭請死。王素惡其為人,〈惡,烏路翻。〉未欲遽誅,且宥之。馬步都虞候萇從簡、左龍武統軍王景戡皆為部下所執,降於潞王,東軍盡降。〈東軍,謂自洛陽來者。〉潞王上牋於太后取進止,遂自陝而東。

 

 여름, 4월 초하루에 아직 날이 밝지 않았는데, 민제는 위주 동쪽 몇 리에 도착하여 석경당을 만낫는데,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사직을 위한 큰 계책을 묻자, 석경당이 말하였다.

 "듣건대 강의성이 서쪽으로 토벌한다고 하는데 어찌 되었습니까?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강의성 역시 배반하고 떠나갔소."

 석경당이 머리를 숙이고 서너 번 길게 탄식하며 말하였다.

 "위주 자사 왕홍지는 오래된 장수이며 사정에 익숙하니, 청컨대 그와 더불어 도모하게 해 주십시오."

 夏,四月,庚午朔,未明,閔帝至衛州東數里,遇石敬瑭;〈石敬瑭自河東來朝,至此而遇帝。〉帝大喜,問以社稷大計,敬瑭曰:「聞康義誠西討,何如﹖陛下何為至此﹖」帝曰:「義誠亦叛去矣。」敬瑭俛首長歎數四,〈俛,音免。〉曰:「衛州刺史王弘贄,宿將習事,請與圖之。」〈王弘贄從敬班伐蜀,嘗為偏將。石敬瑭欲擁帝還衛州,以授夕贄,使為之所耳。〉

 

 마침내 왕홍지에게 가서 만나고 이를 묻자 왕홍지가 말하였다.

 "전 시대에는 천자가 파천한 일은 많았지만 그러나 모두에는 장상· 시위· 부고· 법물이 있었고 여러 아랫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러보게 한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이런 것이 없고 오직 50기만이 스스로 좇게 하고 있으니, 비록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장차 이를 어찌 하겠습니까?"

 석경당이 돌아와서 위주역에서 황제를 알현하고서 왕홍지의 말을 궁전고사 사수영에게 알렸다. 부홍진이 앞으로 가서 석경당을 책망하여 말하였다.

 乃往見弘贄問之,弘贄曰:「前代天子播遷多矣,然皆有將相、侍衛、府庫、法物、,使群下有所瞻仰;今皆無之,獨以五十騎自隨,雖有忠義之心,將若之何﹖」敬瑭還,見帝於衛州驛,〈自弘贄所還見帝。〉以弘贄之言告弓箭庫使沙守榮。奔洪進前責敬瑭曰:〈沙姓,古夙沙氏之後。史炤曰;奔,性也。古有賁姓,音奔,又音肥,後遂為奔。〉

 

 "공은 명종의 사랑하는 사위로 부귀는 서로 그와 더불어 함께하였으니 걱정 근심도 역시 의당 근심하여야 할 것이오. 지금 천자가 파천하여 뛰어 넘으면서 공에게 계책을 맡기고 부흥을 바라는데 마침내 이 네 가지를 가지고 핑계로 삼는다면 이는 곧 도적에게 붙어서 천자를 팔아먹으려고 하려는 것일 뿐이오."

 사수영이 차고 있던 칼을 빼들고 그를 찌르려고 하니 석경당의 가까운 장수인 진휘가 그를 구원하였고 사수영은 진휘와 더불어 싸우다가 죽고 분홍진도 역시 스스로의 목을 베었다. 석경당의 아내지휘사인 유지원이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서 황제 좌우의 사람들과 좇던 기병들을 모조리 죽이고 오직 황제만을 두고 떠나갔다. 석경당이 드디어 낙양으로 향하였다.

 「公明宗愛伲,〈以敬瑭尚明宗女也。〉富貴相與共之,憂患亦宜相恤。今天子播越,委計於公,冀圖興復,乃以此四者為辭,〈四者,謂敬瑭所言無將相、侍衛、府庫、法物從行幸也。〉是直欲附賊賣天子耳!」〈直指石敬瑭心術。〉守榮抽佩刀欲刺之,〈刺,七亦翻。〉敬瑭親將陳暉救之, 守榮與暉鬬死,洪進亦自刎。〈刎,扶粉翻。〉敬瑭牙內指揮使劉知遠引兵入,盡殺帝左右及從騎,獨置帝而去。〈考異曰:閔帝實錄:「庚午朔四鼓,帝至衛州東 七八里,遇敬瑭。」竇貞固晉高祖實錄:「始,帝欲與少主俱西,斷孟津,北據壺關,南向徵諸侯兵,乃啟問康義誠西討作何制置」云云。蘇逢吉漢高祖實錄:「是 夜偵知少帝伏甲欲與從臣謀害晉高祖,詐屏人對語,方坐庭廡。帝密遣御士石敢袖鎚立於後,俄頃伏甲者起,敢有勇力,擁晉祖入一室,以巨木塞門,敢力當其鋒, 死之。帝解佩刀,遇夜晦,以在地葦炬未然者奮擊之。眾謂短兵也,遂散走。帝乃匿身長垣下,聞帝親將李洪信謂人曰:『石太尉死矣。』帝隔垣呼洪信曰:『太尉無恙。』乃踰垣出就洪信兵,共護晉祖,殺建謀者,以少主授王弘贄。」南唐烈祖實錄:「弘贄曰:『今京國阽危,百官無主,必相率龎神器西向。公何不囚少帝西迎潞王,此萬全之計。』敬瑭然其語。」按為晉、漢實錄者必為二祖飾非。今從閔帝實錄。〉敬瑭遂趣洛陽。〈趣,七喻翻。〉

 

 이날에 태후는 내재사(황관들을 죽이고 당 소종 3년에 사인들로 바꿨다)로 하여금 건호에 가서 노왕을 영접하게 하며 왕은 신속히 낙양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是日,太后令內諸司至乾壕迎潞王,〈考異曰:廢帝實錄:「三十日,太后傳令至,井內司迎奉至乾壕,帝促令還京。」按長曆,三月辛丑朔,四月庚午朔;三月無三十日,廢帝實錄誤也。〉王亟遣還洛陽。

 

 애초에, 노왕이 하중에서 파직되어 사제에 돌아가면서 왕숙비가 자주 맹한경을 파견하여 그를 문안하고 위무하게 하였다. 맹한경은 왕에게 옛날에 은혜를 베푼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면지의 서쪽에 도착하여 왕을 알현하고 크게 통곡하며 진술하려고 하자 왕이 말하였다.

 "모든 일은 말하지 않아도 알만하다."

 이어서 스스로 종신들의 반열에 참여하였으나 왕이 즉시 명령하여 길모퉁이에서 목을 베게 하였다.

 初,潞王罷河中,歸私第,〈事見二百七十七卷明宗長興元年。〉王淑妃數遣孟漢瓊存撫之。〈數,所角翻。〉漢瓊自謂於王有舊恩,至澠池西,〈九域志:澠池在洛陽之西一百五十六里。澠,彌兗翻。澠池,縣名。〉見王大器,欲有所陳,王曰:「諸事不言可知。」仍自預從臣之烈,〈從,才用翻。〉王即命斬於路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