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愍帝 即位/寒露節初候鴻雁來賓4日(陰9/6)壬辰

solpee 2021. 10. 10. 20:42

《後唐紀7 明宗 長興 4》〈癸巳, 933年〉

 

 ㊺. 12월 1일에 비로소 명종을 발상하고 송왕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㊺. 十二月,癸卯朔,始發明宗喪,〈戊戌至癸卯,六日始發喪,亂故也。〉宋王即皇帝位。〈諱從厚,明宗第五子也。明宗殂四日而後宋王至,至三日始發喪即位。〉

 

 

 ㊻. 진왕 이종영이 이미 죽었는데, 주홍실의 처가 궁궐에 들어가니 사의인 왕씨가 말을 하다가 진왕에까지 미치자 왕씨가 말하였다.

 "진왕은 아들이 되어 좌우에서 병시중을 들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화를 받는 곳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이거시 죄인입니다. 만약 대역죄인이라고 말한다면 큰 모함입니다. 주사도는 왕의 은덕을 가장 많이 입었는데 이때를 당하여 그를 위해 변명을 하지 아니하였으니 애석합니다."

 ㊻. 秦王從榮既死,朱洪實妻入宮,司依王氏〈【章:十二行本「氏」下有「與之」二字;乙十一行本同。】〉語及秦王,〈唐制:內職有六尚,猶外朝之六尚書也;有二十四司,猶二十四曹郎也。司衣屬尚服局,掌宮內御服、首飾,整比以時進奉。〉王氏曰:「秦王為人子,不在左右侍疾,致人歸禍,是其罪也;若云大逆,則厚誣矣。朱司徒最受王恩,〈朱洪實蓋加檢校司徒,故稱之。〉當時不為之辨,惜哉!」〈為之,于偽翻;下同。〉

 

 주홍실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강의성과 더불어 그가 말한 것을 가지고 민제에게 아뢰고, 또 왕씨는 이종영에게 사사롭게 그를 위하여 궁궐 안의 일을 염탐하였다고 말하였다.

 9일에 왕씨에게 죽음을 내렸다. 일이 왕숙비에게 연관이 되엇는데, 왕숙비는 평소 이종영에게 후하게 하였으므로 황제는 이로 말미암아 그를 의심하였다.

 洪實聞之,大懼,與康義誠以其語白閔帝,且言王氏私於從榮,為之詗宮中事,辛亥,賜王氏死。事連王淑妃,淑素厚於從榮,〈歐史曰:初,明宗後宮有生子者,命妃母之,是為許王從益。從益乳母司衣王氏,見明宗已老而秦王握兵,心欲自託為後計,乃曰「兒思秦王」;是時從益已四歲,又數教從益自言求見秦王,明宗遣乳嫗將兒往來秦府,遂與從榮私通,從榮因使伺察宮中動靜。事連王淑妃,由是故也。詗,火迥翻,又休正翻。〉帝由是疑之。〈從榮已死,往事何足復論!況國難甫定,人心疑阻,宜示寬大,使各自安。帝多疑而少斷,此其所以不得令終也。〉

 

 

 ㊼. 14일에 천웅 좌도압아 송령순을 자주 자사로 삼았다. 주홍소는 진왕을 죽이고 황제를 세운 것이 자기의 공로라고 하였는데, 송령순이 황제이 좌우에서 가장 오랫동안 모셨고 평소 황제에게 가까이하고 신임을 얻어서 주홍소는 옛 사람이 황제의 측근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니 그러므로 그를 내보낸 것이다. 황제는 기뻐하지 않았으나 그를 어찌할 수 없었다.

 ㊼. 丙辰,以天雄左都押牙宋令詢為磁州刺史。〈磁,牆之翻。〉朱弘昭以誅秦王立帝為己功,欲專朝政;令詢侍帝左右最久,雅為帝所親信,〈雅,素也。〉弘昭不欲舊人在帝側,故出之。帝不悅而無〈【章:十二行本「無」下有「如」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熊校同。】〉之何。

 

 

 ㊽. 맹지상은 명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좌들에게 말하였다.

 "송왕은 어리고 나약한데다 정사를 하는 사람들이 모두 서리 출신의 소인들이니, 그것이 어지러워지는 것은 앉아서 기다릴 만하오."

 29일에 황제는 비로소 중흥전에 나아갔다.

 ㊽.孟知祥聞明宗殂,謂僚佐曰:「宋王幼弱,為政者皆胥史小人,〈朱弘昭、馮贇先皆以胥史事明宗於潛躍,遂階柄用,故為孟知祥所侮易。〉其亂可坐俟也。」

 

 황제는 스스로 역월지제(漢과 晉의 상제를 계승 한 달을 1일로 27일 복을 입고 끝내는 제례)로 끝내고 즉시 학사들을 소집하여 《정관정요》, 《태종실록》을 읽게 하여 잘 다스려지는 정치를 이루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나 그 요지를 알지 못하였고 너그럽고 부드러우니 결단성이 부족하였다.

 辛未,帝始御中興殿。帝自終易月之制,〈循漢、晉喪制,以日易月,二十七日而釋服。〉即召學士讀貞觀政要、太宗實錄,有致治之志;然不知其要,寬柔少斷。〈治,直吏翻。斷,丁亂翻。〉

 

 이우는 사사로이 같은 반열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임금이 불러들여 묻는다 해도 우리들에게 미치는 일이 적지만 지위는 높고 책임은 무거워졌으니, 일 역시 걱정거리를 감당해야 하게 되었소."

 무리들이 걱정하고 탄식하며 감히 응답하지 못하였다.

 李愚私謂同列曰:「吾君延訪,鮮及吾輩,位高責重,事亦堪憂。」眾惕息不敢應。〈李愚時為相,言帝不謀政於宰相,而專與樞密、宣徽等議事也。鮮,息淺翻。惕,他歷翻。

 

《後唐紀7 潞王 淸泰 元年》〈甲午, 934年〉

 

 ①. 봄, 정월 7일에 민제가 크게 사면하고 연호를 고쳐 응순이라 하였다.

 11일에 하양절도사· 겸시위도지휘사인 강의성에게 경시중을 덧붙여 주고 판육군제위사로 삼았다.

 ①. 春,正月,戊寅,閔帝大赦,改元應順。〈取應天順人為義,非繼體之君所以紀元也。〉

壬午,加河陽節度使兼侍衛都指揮使康義誠兼侍中,判六軍諸衛事。

 

 ⑦. 봉상절도사· 겸시주인 노왕 이종가는 석경당과 함께 젊어서 명제를 좇아 정벌하였으며 공로와 명성을 가지고 있어서 무리들의 마음을 얻었다.

 주홍소와 풍빈은 지이와 명망이 두 사람 보다 아래로 심히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조정의 권력을 잡게 되자 모두가 그들을 시기하였다.

 ⑦. 鳳翔節度使兼侍中潞王從珂,與石敬班少從明帝征伐,有功名,得眾心;〈少,詩照翻。〉朱弘昭、馮贇位望素出二人下遠甚,一旦執朝政,皆忌之。〈忌從珂及敬瑭也。朝,直遙翻。〉

 

 명종이 병이 들자 노왕은 누차 그의 부인을 파견하여 들어가서 돌보며 시중들도록 하였으며, 명종이 죽게 되자 노왕이 병을 핑계 삼아 오지 않았는데 사신으로 봉상에 갔었던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이 스스로 노왕에게서 음사를 엿보았다고 말하였다.

 明宗有疾,潞王屢遣其夫人入省侍;〈省,悉景翻。〉及明宗殂,潞王辭疾不來,〈以主少國疑也,其相猜阻之迹見矣。〉使臣至鳳翔者或自言伺得潞王陰事。〈此小人之交鬬者迎合執政意嚮。使,疏吏翻。伺,相吏翻。〉

 

 당시에 노왕의 맏아들인 이중길은 공학도지휘사가 되었는데, 주홍소와 풍빈이 그에게 금병을 맡기려고 하지 않았으며, 28일에 내보내어 박주단련사로 삼았다. 노왕에게는 딸 이혜명이 있었고 비구니가 되어 낙양에 았었는데, 역시 불러서 금중에 들어오게 하였다. 노왕이 이 일로 말미암아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時潞王長子重吉為控鶴都指揮使,朱、馮不欲其典禁兵,己亥,出為亳州團練使。潞王有女惠明為尼,在洛陽,亦召入禁中。潞王由是疑懼。〈為潞王舉兵張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