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태의 사망과 서위의 멸망/大雪節初候鶡旦不鳴4日(陰10/26)丁亥
《南北朝 梁紀22 敬帝 太平 元年》 (丙子、556)
㉜. 위의 안정문공 우문태가 돌아와서 건둔산에 도착하여 병이 들자, 역전으로 중산공 우문호를 불렀다. 우문호가 경주에 도착하여 우문태를 만나자, 우문태가 우문호에게 말하였다.
"내 여러 아들들이 모두 어린데다가 외적은 바야흐로 강성하여서 천하의 일을 너에게 그것을 부탁하니, 마땅히 노력하여서 내 뜻을 이루도록 하라."
10월 4일에 운양에서 죽었다. 우문호가 장안으로 돌아와서 상사를 공포하였다.
㉜. 魏安定文公宇文泰還至牽屯山而病,〈北巡而還也。杜佑曰︰牽屯在平涼郡高平縣,亦曰汧屯山,今謂之筓頭山。〉驛召中山公護。護至涇州,見泰,泰謂護曰︰「吾諸子皆幼,外寇方強,天下之事,屬之於汝,〈屬,之欲翻;下所屬同。〉宜努力以成吾志。」乙亥,卒於雲陽。〈年五十。雲陽縣,漢屬馮翊,魏收《志》屬北地郡;後周置雲陽郡,有雲陽宮。〉護還長安,發喪。
우문태는 영웅호걸들을 잘 활용하여 그들의 용력과 효용을 얻었고, 성격은 소박한 것을 좋아하여 허영이나 허식을 숭상하지 않았으며, 정사에 밝고 통달하였고 유학을 숭상하고 옛 것을 좋아하며 무릇 시행하고 설치한 것이 모두 삼대를 모방하여서 그렇게 하였다. 5일에 세자 우문각이 관직과 직위를 계승하여 태사·주국·대총재가 되었는데, 나가서 동주를 진수하니, 당시 나이가 15세였다.
泰能駕御英豪,得其力用,性好質素,不尚虛飾,明達政事,崇儒好古,凡所施設,皆依倣三代而爲之。〈好,呼到翻。〉丙子,世子覺嗣位,爲太師、柱國、大冢宰,出鎭同州,〈宇文泰輔政多居同州,以其地扼關、河之要,齊人或來侵軼,便於應接也。〉時年十五。
중산공 우문호는 지위가 본래 낮았으므로, 비록 우문태에게 부탁은 받았지만 여러 공들이 각기 정권을 잡으려고 기도하면서 복종하려 하지 않았다. 우문호가 대사구 우근에게 계책을 물으니 말하였다.
"저 우근은 일찍이 선공에게 보통과 다른 지우를 입어 은혜가 골육까지 깊사온데 지금의 일은 반드시 죽을 각오로 그것을 쟁취하여야 합니다. 만약 무리들이 대면하여 정책을 한다 하여도 공께서는 반드시 양위하여서는 안 됩니다."
中山公護,名位素卑,雖爲泰所屬,而羣公各圖執政,莫肯服從。護問計於大司寇于謹,謹曰︰「謹早蒙先公非常之知,恩深骨肉,今日之事,必以死爭之。若對衆定策,公必不得讓。」
다음날 여러 공들이 모여서 논의할 때 우근이 말하였다.
"옛날 황실이 기울어질 위기에 처하였었는데 안정공이 아니었으면 다시는 오늘이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공께서 하루아침에 세상을 등졌고, 계승한 아들이 비록 어리지만 중산공은 형의 아들과 가까이하고, 아울러 고탁을 받았으니 군국의 일은 이치로 보아 모름지기 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말과 얼굴빛이 상기되자, 무리들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다.
明日,羣公會議,謹曰︰「昔帝室傾危,非安定公無復今日。〈謂魏孝武帝爲高歡所逼,遁逃入關,宇文泰迎而輔之,以立國於關右。復,扶又翻。〉今公一旦違世,嗣子雖幼,中山公親其兄子,兼受顧託,軍國之事,理須歸之。」辭色抗厲,衆皆悚動。〈抗厲,舉聲高亢,且正色嚴厲也。〉
우문호가 말하였다.
"이것은 마침내 집안의 일이며, 저 우문호는 비록 용렬하고 우매하나 어찌 감히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우근은 평소 우문태와 더불어 동년배였으므로 우문호가 항상 그에게 절을 하였는데, 여기에 이르러 우근이 일어나서 말하였다.
"공께서 만약 군국을 다스린다면 저 우근 등은 모두 의지할 것입니다."
드디어 두 번 절하였다. 여러 공들이 우근에게서 압박을 받아서 또한 두 번 절하니, 이에 무리들의 의견이 비로소 결정되었다. 우문호가 안팎의 기강을 바로잡고 문무백관을 위무하고 복종하게 하니, 사람들의 마음이 드디어 안정되었다.
護曰︰「此乃家事,護雖庸昧,何敢有辭。」謹素與泰等夷,護常拜之,至是,謹起而言曰︰「公若統理軍國,謹等皆有所依。」遂再拜。羣公迫於謹,亦再拜,於是衆議始定。護綱紀內外,撫循文武,人心遂安。
㊵. 위의 우문호는 周公(우문각 우문태의 아들)이 어리고 약하기 땝문에 일찍이 주군의 지위에 등극시켜서 백성들의 마음을 안장시키려고 하여 30일에 위의 공제(서위 말제 탁발곽 20세)가 조서를 내려 주공에게 황제의 자리를 선양(北魏 386~556, 18대)하게 하였다. 대종백 조귀로 하여금 부절을 가지고 표책을 받들게 하고, 제북공 타갑ㄹ적에게 황제의 옥새와 인수를 바치게 하였으며, 공제는 나가서 대사마부에 거주하였다.
㊵. 魏宇文護以周公幼弱,欲早使正位以定人心,庚子,以魏恭帝詔禪位于周,〈魏道武帝以晉孝武太元二十一年改元皇始,歷十二世至孝武帝永熙三年西遷,魏遂分爲東、西。西魏又歷三世,凡十五世,一百六十年而亡。〉使大宗伯趙貴持節奉册,濟北公迪致皇帝璽紱;恭帝出居大司馬府。〈濟,子禮翻。璽,斯氏翻。紱,音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