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有離散之怨,國有露根之漸(백성들은 원망이 가득하고, 나라의 뿌리가 들어나고 있다)/立秋節中候白露降初日(陰6/23)丁亥
《晉紀60 武帝 泰始 2年》 (丙戌, 266)
⑫. 오의 황제는 육개를 좌승상으로 삼고, 만욱을 우승상으로 삼았다. 오의 주군이 다른 사람이 쳐다보는 것을 싫어하여 여러 신하들은 모시고 있으면 감히 눈을 들어 쳐다보지 못하였다.
육개가 말하였다.
"군주와 신하는 서로 알지 못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 만약에 갑자기 의외의 일이 있게 된다 하여도 달려가야 할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황제는 마침내 육개가 스스로 쳐다보는 것을 허락하였지만 다른 사람은 옛날과 같았다.
⑫. 吳主以陸凱爲左丞相,萬彧爲右丞相。吳主惡人視己,羣臣侍見,莫敢舉目。〈惡,烏路翻。見,賢遍翻。〉陸凱曰:「君臣無不相識之道,若猝有不虞,不知所赴。」吳主乃聽凱自視,而他人如故。〈唯凱得視之,他人仍舊不得視也。〉
오의 황제는 무창에서 살게 되니, 양주의 백성들이 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황제가 사용할 물건을 공급하게 되자 이를 아주 고통스러워하였고,또한 사치하는 것에도 절도가 없어서 공공기관이든 민간이든 다 궁핍하였다. 육개가 상소하였다.
吳主居武昌,揚州之民泝流供給,甚苦之,〈吳武昌屬荊州,而丹陽、宣城、毗陵、吳、吳興、會稽、東陽、新都、臨海、建安、豫章、臨川、鄱陽、廬陵皆屬揚州,故苦於西上,泝流以供給。〉又奢侈無度,公私窮匱。凱上疏曰:
"지금 사방의 변경에 아무 일도 없으니, 마땅히 백성들을 잘 기르고 재물을 풍요롭게 하는데 힘써야 할 것인데, 오히려 지국히 사치스럽고 아주 욕심을 부리고 있습니다. 재앙이 없는데도 백성들의 목숨은 다 없어지고, 아무 일도 하는 것이 없는데도 나라의 재물은 텅비었으니, 신은 가만히 이것을 걱정합니다.
「今四邊無事,當務養民豐財,而更窮奢極欲;無災而民命盡,無爲而國財空,臣竊憂之。
옛날에 한실이 이미 쇠퇴하자 세 집안들이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曹氏·劉氏가 모두 올바른 도를 잃게 되자 晉이 소유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눈앞에 닥친 분명한 중거입니다. 신은 어리석지만 그러나 폐하를 위하여 우리 국가를 애석하게 생각할 뿐입니다.
昔漢室旣衰,三家鼎立;今曹、劉失道,皆爲晉有,此目前之明驗也。臣愚但爲陛下惜國家耳。
무창의 토지는 위험하고 돌도 많은 척박한 곳이니 제왕 된 사람이 도읍할 곳은 아닙니다. 또한 어린아이들이 노래를 부릅니다. '차라리 건업의 물을 마실지언정 무창의 물고기는 먹지 않겠다. 차라리 건업으로 돌아가서 죽을지언정 무창에 머물며 살지 않겠다.' 이러한 것들로 본다면 사람들의 마음과 하늘의 뜻을 충분히 알 것입니다.
武昌土地危險塉确,〈塉,秦昔翻,土薄也。确,克角翻,山多大石也。〉非王者之都;且童謠云:『寧飲建業水,不食武昌魚;寧還建業死,不止武昌居。』〈此苦於泝流供給而爲是謠也。〉以此觀之,足明人心與天意矣。
지금 나라에는 1년을 먹을 곡식이 저축되어 있지 아니하고, 백성들은 가족이 흩어지게 된 원한을 갖고 있으니 나라에는 뿌리가 점점 드러나고 있고, 관리들은 가혹하고 급하게 일을 처리하기에 힘쓰고, 구휼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今國無一年之蓄,〈《禮記‧王制》:國無六年之蓄曰急,無三年之蓄曰國非其國也。況無一年之蓄乎!〉民有離散之怨,國有露根之漸,〈以木爲喻也。木之所以能生殖者,以有根本也,根漸露,則其本將撥。〉而官吏務爲苛急,莫之或恤。
대제(손권) 시절에 후궁이 늘어서 있는 여인들과 옷을 짓는 사람의 수는 백 명을 다 채우지 아니하였는데, 경제 이후에는 마침내 1천 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이는 재물을 소비하는 것이 심하게 된 것입니다.
大帝時,後宮列女及諸織絡數不滿百,景帝以來,乃有千數,此耗財之甚也。
또한 황제의 주변에 있는 신하는 대체적으로 자리에 걸맞지 않는 사람이고, 여러 사람들이 서로 도와서 충성스러운 사람을 해치고 똑똑한 사람을 숨어들게 하니 이들은 모두 정치를 좀먹고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又左右之臣,率非其人,羣黨相扶,害忠隱賢,此皆蠹政病民者也。
신이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수많은 역역을 줄이고 쉬게 하시며 가혹하고 소란스러운 일을 철폐하시고 궁중의 여인들을 헤아려서 내보내시고 많은 관리를 깨끗하게 선발하신다면 하늘은 기뻐할 것이고 백성들은 불어서 국가는 영원히 편안할 것입니다."
臣願陛下省息百役,罷去苛擾,料出宮女,〈去,羌呂翻。料,音聊。〉清選百官,則天悅民附,國家永安矣。」
오의 홍제는 비록 기뻐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오랫동안 인망이 있었던 사람이었으므로 특별히 이를 우대하여 용납하였다.
吳主雖不悅,以其宿望,特優容之。〈《考異》曰:陳壽曰:「予連從荊、揚來者,得凱所諫晧二十事,博問吳人,多云不聞凱有此表。又按其文殊甚切直,恐非晧之所能容忍也。或以爲凱藏之篋笥,未敢宣行,病困,晧遣董朝省問欲言,因以付之。虛實難明,故不著于篇;然愛其指擿晧事,足爲後戒,故鈔列于《凱傳》左。」今不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