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無君德,臣安有臣節!/ 임금이 임금으로서 덕망이 없는데 신하가 무슨 절개?
《後晉紀3 高祖 天福 4年》 (己亥, 939)
27.애초에, 민의 혜종(왕연균)은 태조(왕심지)를 좇았던 사람으로 공신·공학도로 삼앗는데, 강종(왕계붕)이 서게 되자 다시 장사 2천을 모집하여 심복으로 삼아 신위도라고 부르고 봉록을 내려 준 것이 모두 이도(拱宸·控鶴都)보다 후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도에 속한 사람이 원망하여 장차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자, 민주는 장과 천 두 주에 나누어 예속시키려고 하였고, 이도의 사람들은 더욱 화가 났다. ···중략···
27.初,閩惠宗以太祖元從為拱宸、按鶴都,及康宗立,更募壯士二千人為腹心,號宸衛都,祿賜皆厚於二都;或言二都怨望,將作亂,閩主欲分隸漳、泉二州,二都益怒。
민혜종은 누차 종실사람들을 시기하고 화를 내며 죽였으므로 숙부인 좌복야·동평장사 왕연희가 겉으로 미치고 어리석은 체하여서 화를 피하니, 혜종은 도사복을 내려 주고 무이산 속에 두었고, 얼마 안 있어 다시 불러서 돌아오게 하여 사제에 유폐시켰다.···중략···
屢以猜怒誅宗室,叔父左僕射、同平章事延羲陽為狂愚以避禍,閩主賜以道士服,置武夷山中;尋復召還,幽於私第。
혜종이 자주 공신·공학군사인 영태 사람 주문진과 광산 사람 연중우를 모욕하자, 두 사람은 이를 원망하였다.
閩主數侮拱宸、控鶴軍使永泰硃文進、光山連重遇,二人怨之。
또 연중우가 불을 놓으려고 하던 모의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 의심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내학사 진담이 사사롭게 연중우에게 알렸다.
又疑重遇知縱火之謀,欲誅之;內學士陳郯私告重遇。
신사일(12) 밤에 연중우는 들어가서 숙직을 서다가 이도를 인솔하고 장춘궁을 불태우고서 혜종을 공격하고 사람을 시켜서 조약돌과 기왓장 속에서 왕연희를 영접하여 만세를 부르도록 하였으며,
辛巳夜,重遇入直,帥二都兵焚長春宮以攻閩主,使人迎延羲於瓦礫中,呼萬歲;
다시 밖에 있는 군영의 군사를 불러 혜종을 함께 공격하게 하였는데 오직 신위도만이 맞으며 싸우니 헤종은 마침내 이후와 더불어 신위도로 갔다.…중략…
復召外營兵共攻閩主;獨宸衛都拒戰,閩主乃與李后如宸衛都。
얼마 안 있어 추격하던 군사가 구름처럼 모이자 혜종은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활을 던지며 왕계업에게 말하였다.
"경은 신하로서의 절개가 어디 있는가!"
왕계업이 말하였다.
"임금이 임금으로서 덕망이 없는데 신하게게 어찌 신하의 절개가 있겠습니까! 새로운 임금은 숙부이고 옛날의 임금은 형제이니 누가 가깝고 누가 멀겠습니까?"
혜종은 다시 말하지 않았다.
俄而追兵雲集,閩主知不免,投弓謂繼業曰:「卿臣節安在!」繼業曰:「君無君德,臣安有臣節!新君,叔父也,舊君,昆弟也,孰親孰疏?」閩主不復言。
왕계업은 그와 더불어 돌아오다가 타장에 이르러 술을 마셨고 취하자 목을 매달았고 이후와 여러 아들·왕계공을 나란히 하여 모두 죽였다. 신위도에 남아 있는 무리는 오월로 도망하였다.
繼業與之俱還,至陀莊,飲以酒,醉而縊之,並李后及諸子、王繼恭皆死。宸衛餘眾奔吳越。
왕연희는 위무절도사·민국왕이라고 스스로 호칭하고 이름을 고쳐 왕희라 하고 연호를 고쳐 영륭이라 하였으며 갇혀있는 죄수를 사면하고 물품을 안팎에 나누어 주었다.…중략…
延羲自稱威武節度使、閩國王,更名曦,改元永隆,赦系囚,頒賚中外。
연중우가 강종을 공격할 때 진수원은 궁궐 안에 있엇는데 옷을 바꾸어 입고 장차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군사가 그를 죽였다. 연중우는 채수몽을 붙잡아서 관직을 팔았던 죄를 하나 하나 헤아리고서 그의 목을 베었다. 민왕 왕희가 이미서고 나자 사자를 파견하여 임흥을 처누에서 죽이게 하였다.
連重遇之攻康宗也,陳守元在宮中,易服將逃,兵人殺之。重遇執蔡守蒙,數以賣官之罪而斬之。閩王曦既立,遣使誅林興於泉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