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不能欺,而為政寬簡/사람들은 속이지 않았고 정치는 관대하고 간결하였다.
《唐紀73 僖宗 光啟 三年》 (丁未, 887)
18. 손유가 이미 하양을 떠나고 나자, 이한지가 택주에서 장전의를 불러서 그와 더불어 남아있는 무리를 거두어 합쳤다. 이한지는 하양을 점거하고 장전의는 동도를 점거하여 함께 하동에 구원해주기를 요청하였는데, 이극용은 그의 장수인 안금준을 택주자사로 삼고 기병을 거느리고 그를 돕고서 표문을 올려서 이한지를 하양절도사로 삼게 하고, 장전의를 하남윤으로 삼게 하였다.
18.六月,孫儒既去河陽,李罕之召張全義於澤州,與之收合餘眾。罕之據河陽,全義據東都,共求援於河東。李克用以其將安金俊為澤州刺史,將騎助之,表罕之為河陽節度使,全義為河南尹。
애초에, 동도에서는 황소의 난을 겪고서 남겨진 백성들이 모여서 3성(하남, 낙양, 중단)을 만들어 서로가 지켜질 수 있었지만 이어서 진종권과 손유의 잔인하고 포악함으로 겨우 무너진 담장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初東都經黃巢之亂,遺民聚為三城以相保,繼以秦宗權、孫儒殘暴,僅存壞垣而已。
장전의가 처음 이르렀는데, 흰 뼈가 땅을 덮었고 가시밭은 넓게 바라다 보였고, 살고 있는 백성도 100호를 넘지 못하였으며, 장전의의 휘하에는 겨우 100여 명뿐이었고 서로 함께 중주성을 지켰지만 사방의 들판에도 모두 밭을 가는 사람은 없었다.
全義初至,白骨蔽地,荊棘彌望,居民不滿百戶,全義麾下才百餘人,相與保中州城,四野俱無耕者。
장전의는 이에 휘하에서 18명의 쓸모 있어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을 뽑아서 사람마다 1기와 1망을 주고서 그들을 둔장이라 하면서 18개 현의 옛 터전으로 가게 하여 깃발을 세우고 공문서를 펼쳐놓고 떠나고 흩어진 백성을 불러 위로하고 나무와 곡식을 심어 가꾸도록 권하게 하였다.
全義乃於麾下選十八人材器可任者,人給一旗一榜,謂之屯將,使詣十八縣故墟落中,植旗張榜,招懷流散,勸之樹藝。
오직 살인자만 죽이고 나머지는 단지 곤장을 쳤을 뿐이고 엄격한 형벌은 없애고 조세도 없애니 백성 가운데 그곳으로 돌아온 사람은 저자와 같았다. 또 장정을 선발하여 그들에게 전투와 진치는 방법을 가르쳐서 노략질하는 도둑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惟殺人者死,餘但笞杖而已,無嚴刑,無租稅,民歸之者如市。又選壯者教之戰陳,以禦寇盜。
몇 년 후에 도성에 있는 마을들은 점차로 옛날의 제도를 회복하였고, 여러 현의 호구도 거의 모두 돌아와 회복되고 뽕과 삼도 울창하여 들판에 노는 땅이 없었다.
數年之後,都城坊曲,漸復舊制,諸縣戶口,率皆歸復,桑麻蔚然,野無曠土。
그 중에 뛰어난 병사는 큰 현에는 7천 명에 이르게 되었으며 작은 현에는 2천 명 남짓이니 이에 현령과 보좌를 두어 다스리도록 주문을 올렸다.
장전의가 밝게 살피니 사람들이 속일 수 없었고 정치하는 것은 관대하고 간결하였다.
其勝兵者,大縣至七千人,小縣不減二千人,乃奏置令佐以治之。全義明察,人不能欺,而為政寬簡。
나가서 밭둑의 아름다운 것을 보면 번번이 말에서 내려 관료 및 보좌들과 함께 둘러보고 밭주인을 불러 술과 음식으로 노고를 치하하였는데, 누에치기와 보리농사를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혹은 몸소 그 집에 가서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모두 불러 나오게 하여 차와 채색비단으로 된 의복 등을 상으로 주었다.
出,見田疇美者,輒下馬,與僚佐共觀之,召田主,勞以酒食;有蠶麥善收者,或親至其家,悉呼出老幼,賜以茶絲采衣物。
백성들 사이에 말이 있었다.
"장공께서는 음악이나 기녀를 좋아하지 않아 그런 것을 보아도 일찍이 웃지 않고 유독 좋은 보리와 훌륭한 누에고치를 보아야만 웃을 뿐이다."
民間言:「張公不喜聲伎,見之未嘗笑,獨見佳麥良繭則笑耳。」
밭이 있는데도 곡식을 심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에게 곤장을 쳤는데, 혹 일할 사람과 소가 부족하다고 호소하면 이에 그 이웃 사람을 불러 그들을 나무라며 말하였다.
"저 사람이 진실로 일할 사람과 소가 부족하다는데, 어찌 도와주지 않는가!"
有田荒穢者,則集眾杖之;或訴以乏人牛,乃召其鄰里責之曰:「彼誠乏人牛,何不助之!」
무리들이 모두 사죄하면 이에 그들을 풀어주었다. 이로 말미암아서 이웃 마을 사이에 잇고 없고 간에 서로 도와주니, 그러므로 모든 호구에는 저축한 것이 있어서 흉년에도 굶지 않고 드디어 부유함을 이루었다.
眾皆謝,乃釋之。由是鄰里有相助,故比戶皆有蓄積,凶年不饑,遂成富庶焉。
34. 양행밀이 광릉을 포위한 것이 반년이 되고 진언과 필사탁이 크고 작게 수십 번 싸웠는데 대부분이 승리하지 못하였으며, 성 안에 식량이 없어서 쌀 한 말 값이 50민이 되고 풀뿌리나 나무열매도 모두 없어져 흙으로 떡을 만들어 먹었지만 굶어 죽은 사람이 절반 이상이었다.
34.冬,十月,楊行密圍廣陵且半年,秦彥、畢師鐸大小數十戰,多不利。城中無食,米斗直錢五十緡,草根木實皆盡,以堇泥為餅食之,餓死者太半。
선군은 사람을 잡아 가서 이를 팔았고, 채찍질하고 묶고 잘라 죽이는 것이 마치 양이나 돼지 같았는데, 끝내 한마디 소리도 내지 못하였으며 쌓인 해골과 흐르는 피가 저자거리에 가득하였다.
진언과 필사탁도 그와 같은 일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눈살을 찌푸릴뿐이었다.
宣軍掠人詣肆賣之,驅縛屠割如羊豕,訖無一聲,積骸流血,滿於坊市。彥、師鐸無如之何,嚬蹙而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