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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待其困弊、流亡、餓殍,然後賑之也/아사 행려병자 거지 떠돌이가 생긴 후에 구휼하지 아니하였다.

solpee 2019. 4. 26. 20:28

唐紀42宗 建中 元 庚申, 780

 

 20.형남절도사 유준은 양염의 비위에 맞게 주문을 올려 '충주자사 유안이 주차와 더불어 편지를 하며, 구원해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말씨가 대부분 조정을 원망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 주문을 올려 충주의 병사를 모으면서 조정의 명령을 거절하려 하였다고 하니, 양염이 이를 조작하여 완성시켰는데, 덕종은 몰래 중사를 파견하여 유안을 목매달아 살해하고, 조서를 내려 사사하였다. 천하가 억울하다 하였다.

 20. 辛巳,荊南節度使庾准希楊炎指,奏忠州刺史劉晏與硃泚書求營救,辭多怨望,又奏召補州兵,欲拒朝命,炎證成之。上密遣中使就忠州縊殺之,己丑,乃下詔賜死。天下冤之。

 

 애초에 안·사의 난이 일어나고 몇 해 동안 천하의 호구는 열에 여덟아홉이 없어졌고, 주현은 대부분 번진에 점거되어 공물과 부세가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조정의 부고는 고갈되었고, 중원에 변고가 많아지자 융이 매년 침범하니 주둔군이 많은 곳에서는 나라에 군비를 요청하자 소요비용은 헤아릴 수 없었지만, 모두 유안에게 기대어 처리하였다.

 初,安、史之亂,數年間,天下戶口什亡八九,州縣多為籓鎮所據,貢賦不入,朝廷府庫耗竭,中國多故,戎狄每歲犯邊,所在宿重兵,仰給縣官,所費不貲,皆倚辦於晏。

 

 유안은 애초에 전운사가 되어 홀로 섬동의 여러 도를 관장하였고, 섬서의 모든 탁지를 그가 다스렸는데, 말년에는 겸하여 관장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파직되엇다.

 晏初為轉運使,獨領陝東諸道,陝西皆度支領之,末年兼領,未幾而罷。

 

 유안은 정력이 왕성하고, 많은 기지가 있었으며, 있고 없는 것을 변통하고 굽혀가며 그것의 오묘함을 다하였다. 항상 후한 값을 주고 잘 걷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번갈아서 서로 연락하게 하며, 사방의 물가를 조사하여 보고토록 하니, 비록 먼 지방이라도 며칠이 지나지 않아 모두 보고되게 하였으며, 식량과 재화를 가볍게 하거나 무겁게 하는 권한을 모두 손에 쥐고 다스렸는데, 국가가 이득을 남겼어도 천하에서 매우 비싸지거나 매우 싸지는 걱정이 없도록 항상 관리하였다.

 晏有精力,多機智,變通有無,曲盡其妙。常以厚直募善走者,置遞相望,覘報四方物價,雖遠方,不數日皆達使司,食貨輕重之權,悉制在掌握,國家獲利,而天下無甚貴甚賤之憂。常以為: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고 모으는 것은 적절한 사람을 얻는 것에 있으니, 그러므로 반드시 사물에 통달하여 민첩하고, 날래고 굳세며, 청렴하고 신중한 선비를 가려 뽑아서 그를 채용해야 하고, 장부를 맡아서 조사하도록 하는 일이나, 금전과 양곡을 받거나 내보내는 일은 반드시 사류에게 맏겨야 하니, 관리들은 비록 오로지 부첩이나 쓰면서 가볍게 한 마디라도 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辦集眾務,在於得人,故必擇通敏、精悍、廉勤之士而用之;至於句檢簿書、出納錢谷,事雖至細,必委之士類;吏惟書符牒,不得輕出一言。」

 

 늘 말하였다.

 "선비가 뇌물에 빠지면 곧바로 숨는다. 명예는 이보다 중한 것이니, 이러한 까닭으로 선비들은 대부분이 깨끗하려고 애쓰지만, 깨끗하고 청렴하여도 아무도 알아주지도 드러나지 않으니, 이를 명예보다 중하게 여기며, 이런 까닭으로 욕심이 많아지니 더러운 관리가 된다."

 常言:「士陷贓賄,則淪棄於時,名重於利,故士多清修;吏雖潔廉,終無顯榮,利重於名,故吏多貪污。」

 

 그러나 유안만이 이를 시행할 수가 있었고, 다른 사람으로 이를 본받은 사람은 따라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然惟晏能行之,它人效者終莫能逮。

 

 그의 속관이 비록 수천 리 밖에 있어도 교령을 받드는 것을 마치 눈 앞에 있는 것처럼 하였고 행동거지와 말을 감히 속이거나 게을리 하는 것이 없었다. 당시 권력이 있고 귀한 사람이 혹은 친척이나 친구를 그에게 맡기면 유안은 역시 이에 호응하였는데, 봉급을 얼마간 받도록 하며 자리를 옮기는 순서를 천천히 하거나 빠르게 하여 모두 그들의 뜻과 같이 하였는데, 그러나 직무의 일을 가까이 할 수는 없었다.

 其屬官雖居數千里外,奉教令如在目前,起居語言,無敢欺紿。當時權貴,或以親故屬之者,晏亦應之,使俸給多少,遷次緩速,皆如其志,然無得親職事。

 

 장과 원에서 중요하고 바쁜 지위에 있었던 관리들은 반드시 모두 한 시대에서 가려 뽑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유안이 사망한 뒤에 재화와 부세를 다스려 명성을 얻었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유안의 옛날 속리들이었다.

 其場院要劇之官,必盡一時之選。故晏沒之後,掌財賦有聲者,多晏之故吏也。

 

 유안은 또한 호구가 많이 늘어나면 부세는 많아진다고 생각하니, 그러므로 그가 재화를 다스리는 것은 백성을 아끼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晏又以為戶口滋多,則賦稅自廣,故其理財常以養民為先。

 

 여러 도에 가가 지원관을 설치하고 매 순월에는 모든 주현의 비와 눈, 그리고 풍작과 흉작의 상황을 사사에 보고토록 하여 풍작이면 곧바로 비싸게 쌀을 사들이고, 흉작이면 곧바로 값이 싸게 쌀을 팔게 하였으며, 혹은 양곡으로 여러 재화와 바꾸어 관에서 쓰는 것에 공급하였으며, 풍년이 든 곳에서 이것들을 팔기에 이르렀다.

 諸道各置知院官,每旬月,具州縣雨雪豐歉之狀白使司,豐則貴糴,歉則賤糶,或以谷易雜貨供官用,及於豐處賣之。

 

 지원관은 곡식이 여물지 않을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면 먼저 품신하니, 어떤 달에는 반드시 약간의 조세를 면하여 덜어주고, 어떤 달에는 반드시 얼마간 구원하여 도움을 주는데, 그 시기에 이르게 되면 유안은 주현이 신청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주문을 올려서 시행하도록 하여 백성들의 위급함에 대응하여 때를 놓친 적이 없었고, 그들이 곤궁하여 피폐하게 되는 것과 떠돌며 흘러다니는 것과 굶어죽어 송장이 생기는 것을 기다리고 나서야 구휼하지 아니하였다.

 知院官始見不稔之端,先申,至某月須如干蠲免,某月須如干救助,及期,晏不俟州縣申請,即奏行之,應民之急,未嘗失時,不待其困弊、流亡、餓殍,然後賑之也。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편안히 머물며 그들의 일을 할 수 있었고, 호구가 늘어나 퍼진 것이다. 유안이 처음으로 전운사가 되었는데, 그때에 천하의 호구는 2백만에 불과하였으나, 그의 말년에는 마침내 3백여만이 되었으며, 유안이 다스리고 있으면 늘어났고 유안이 떠나면 늘지 않았다.

 由是民得安其居業,戶口蕃息。晏始為轉運使,時天下見戶不過二百萬,其季年乃三百餘萬;在晏所統則增,非晏所統則不增也。

 

 그 애초에 재부로 매년 들어오는 것이 4백만 민에 불과하였으나, 말년에는 1천만 민이었다.

 其初財賦歲入不過四百萬緡,季年乃千餘萬緡。

 

 유안은 오로지 가염법을 채용하여 군국의 비용으로 충당하였다. 당시에 허주·여주·정주·등주의 서쪽에서부터는 모두 하동의 지염을 먹엇고, 탁지가 주관하였으며, 변주·활주·당주·채주의 동쪽은 모두 해염을 먹었는데, 유안이 이를 주관 하였다. 유안은 관리가 많으면 곧 백성들을 괴롭힌다고 여겼으니, 그러므로 다만 소금이 나는 향리에만 염관을 두고, 염호에서 구운 소금을 거두어들여 옮겨서 상인에게 팔도록 하여, 그들이 가고 싶은 곳에 가도록 맡기니 나머지의 주현에는 다시 관리를 두지 않았다.

 晏專用榷鹽法充軍國之用。時自許、汝、鄭、鄧之西,皆食河東池鹽,度支主之;汴、滑、唐、蔡之東,皆食海鹽,晏主之。晏以為官多則民擾,故但於出鹽之鄉置鹽官,收鹽戶所煮之鹽轉鬻於商人,任其所之,自餘州縣不復置官。

 

 그중에 강·령 사이에서 염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곳은 관염을 옮겨 그곳에 쌓아 두도록 하였다. 혹은 상인이 끊겨져서 소금이 귀해지면 값을 내려서 이를 팔도록 하였는데 이를 상평염이라 하였으며, 관부에서는 그 이익을 얻었고 백성들에게는 소금이 결핍되지 않았다.

 其江嶺間去鹽鄉遠者,轉官鹽於彼貯之。或商絕鹽貴,則減價鬻之,謂之常平鹽,官獲其利而民不乏鹽。

 

 그 애초에는 강·회의 소금으로부터 얻는 이익이 40만 민에 지나지 아니하였는데, 말년에는 또한 6백여만 민이 되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나라에서 쓰는 비용은 충족되었고 백성들은 곤궁하여 피폐함이 없었다. 그 가운데 하동에서 소금으로부터 얻는 이익은 80만 민에 불과하였으나, 가격은 해염보다 비쌌다.

 其始江、淮鹽利不過四十萬緡,季年乃六百餘萬緡,由是國用充足而民不困弊。其河東鹽利,不過八十萬緡,而價復貴於海鹽。

 

 이보다 먼저 관동의 곡식을 운반하여 장안으로 들여오는 사람은 하의 흐름이 빠르고 사나워서 대략 1곡을 이끌고 와서 8두가 도착할 수 있게 되면 힘든 일을 이룬 것으로 여겨 두터운 상을 받았다.

 先是,運關東谷入長安者,以河流湍悍,率一斛得八斗至者,則為成勞,受優賞。

 

 유안은 강·변·하·위는 물결의 힘이 다르다고 여겨서 각기 편의에 따라 나르는 배를 만들고 조졸들을 가르치게 하여, 강의 선박은 양주로 이르게 하고. 변의 선박은 하음에 이르게 하고, 황하의 선박은 위구에 이르게 하고, 위 선박은 태창에 이르도록 하면서, 그 사이에 물가에 창고를 설치하여 서로 옮기며 주고받도록 하였다.

 晏以為江、汴、河、渭,水力不同,各隨便宜,造運船,教漕卒,江船達揚州,汴船達河陰,河船達渭口,渭船達太倉,其間緣水置倉,轉相受給。

 

 이로부터 매년 나르는 곡식이 어떤 때는 백여 만 곡에 이르렀지만, 한 말 한 되도 배가 뒤집혀 가라앉은 것이 없었다. 선박 10소를 1강으로 하여 군대로 하여금 이를 다스리도록 하며, 열 번을 날랐는데 잘못된 것이 없으면 두텁게 위로하며 그 사람에게 벼슬을 내렸다. 여러 차례 운반한 뒤에 머리카락이 반백이 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自是每歲運谷或至百餘萬斛,無斗升沉覆者。船十艘為一綱,使軍將領之,十運無失,授優勞,官其人。數運之後,無不斑白者。

 

 유안이 양자강에 선박을 만드는 열 곳을 세우고, 매 소마다 전 1천민을 주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드는 비용이 실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오니, 헛되이 쓰는 비용이 너무 많습니다."

 유안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큰일을 꾀하는 사람은 적은 비용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무릇 일이란 반드시 멀리 생각해야 한다. 지금 처음으로 선박을 만드는 장소를 설치하였는데, 일을 맡고 있는 사람이 매우 많으미, 마땅히 먼저 그들로 하여금 사사롭게 쓰는 것을 궁색함이 없도록 해야 관에서 쓰는 물건이 굳고 튼튼해진다. 만약 급작스럽게 그들과 더불어 자잘하게 치수를 고치고 헤아리면, 어찌 오랫동안 배가 다닐 수 있겠는가! 다른 날 반드시 내가 지급한 것이 많은 것을 걱정하여 이를 줄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절반으로 줄이면 그래도 배가 다니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을 지나치면 배로 나를 수가 없다."

 晏於揚子置十場造船,每艘給錢千緡。或言「所用實不及半,虛費太多。」晏曰:「不然,論大計者固不可惜小費,凡事必為永久之慮。今始置船場,執事者至多,當先使之私用無窘,則官物堅牢矣。若遽與之屑屑校計錙銖,安能久行乎!異日必有患吾所給多而減之者;減半以下猶可也,過此則不能運矣。」

 

 그 뒤 50년 뒤에 유사가 과연 그것을 반으로 줄엿다. 함통 연간에 이르러서 유사가 비용을 헤아려 지급하니, 다시는 나머지읭 여분이 없게 되었고, 선박이 더욱 무르고 얇아져 쉽게 부셔졌으므로 조운은 마침내 그치게 되었다.

 其後五十年,有司果減其半。及鹹通中,有司計費而給之,無復羨餘,船益脆薄易壞,漕運遂廢矣。

 

 유안은 사람됨이 부지런히 힘쓰며 일을 하면서 한가하고 번거로움이 없엇고 반드시 하루 안에 결정을 하고 남겨서 묵히지 않도록 하엿는데, 뒷날에 재화와 이득을 말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그에 미칠 수가 없었다.

 晏為人勤力,事無閒劇,必於一日中決之,不使留宿,後來言財利者皆莫能及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