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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4일 오후 05:32

solpee 2018. 4. 4. 17:42

 

耶律楚材劝阻我们的英雄[成吉思汗]杀光汉族人
生卒:1189年-1243年
籍贯:契丹族. 契丹源於鲜卑族,为宇文部的一支.

姓耶律,名楚材,是契丹族后代,辽皇族的子孙。其父耶律履,金朝官员,60岁得子。当时金朝已开始没落,耶律履感慨地对人说:“吾六十而得此子,吾家千里驹也,他日必成伟器,且当为异国用。”他借用《左传》中楚国虽有人才,但被晋国所用的典故,为其子取名耶律楚材。《左传》襄公二十六年有之: “虽楚有材,晋实用之。”言楚大夫屡出奔晋,为晋所用,所以虽以楚之强,终不能独霸.

契丹族人,字晋卿,号湛然居士,又号玉泉老人,元代著名政治家,宰相,三朝重臣。 博学能文,生于燕京,为辽东丹王突欲的八世孙。蒙古军破燕京后,成吉思汗于漠北召见, 甚为赞赏,为左右员外郎,太宗时,拜中书令。次年即随军西征。勇略过人,正直廉洁, 在朝廷内外威信很高。生前要求葬在瓮山泊畔,乃颐和园的昆明湖。 元太袓定燕,召为相,历事两朝,凡蒙古陋风,悉为改革,元立国规模多出其手定, 著有湛然居士集。博览群书,旁通天文、地理、律历、医卜及释道之学,并善诗文。

 

 移木之信興一利 不若除一害

 

 상앙은 진나라에서 관리로 등용되자 먼저 조정과 백성과의 의사소통이 없는 나라는 강국이 될 수 없다며 정부가 백성들에게 먼저 원칙을 지키는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法治를 실현하고자 하루는 궁궐 앞 저자거리에 판자 하나를 세워 놓고“ 이 판자를 남문에서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겐 십금을 주리라.”고 했으나 관료들에게 수탈만 당해온 백성들은 코웃음을 치며 아무도 옮기려는 사람이 없었다.

상앙은 민심의 추이를 깨닫고 “만일 옮기는 자가 있다면 오십금을 주겠다.”라고 하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없었으나 그중 한사람이‘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서 판자를 북문으로 옮기자 상앙은 즉시 오십금의 상금을 포상했다. 그 뒤부터 조정의 약속을 신뢰한 백성들이 법을 존중했고 거리에 금붙이가 떨어져도 자기 것이 아니면 줍지 않을 정도로 진나라에는 법치주의가 제자리를 잡았다. 이런 나라가 천하의 패자가 되지 않을 턱이 없었다.

 

원나라 시조인 징기스칸과 2대 황제인 오고타이칸을 도와 원나라를 반석위에 올린 인물은 耶律楚材(이하 야율)라는 사람이었는데 본디 遼나라 출신(鮮卑族)이지만 요나라가 망하자 포로로 잡혀왔다. 포로 중에 야율초재가 있다는 보고를 받은 징기스칸은 직접 궁 밖으로 나가 그의 결박을 직접 풀어주고 환대하자 황제의 인격과 약속을 확인한 야율은 원나라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오고타이가 등극하자 야율은 즉시 국정운영에 관한 정책을 表로 올렸다. “ 폐하, 한 가지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한 가지 해로운 일을 제거하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또한 한 가지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은 한 가지 일을 줄이는 것만 같지 못하나이다. 가장 효과적인 정치란 백성의 삶을 고달프게 하는 일들을 자주 벌이지 말고 편하게 해주는 것이 정치의 가장 위에 두어야 할 爲政이옵니다.”라고 간언했다.

 

야율초재를 성심껏 지도한 萬松老人이 야율초재의 선수행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야율초재는 27세부터 나 만송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법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모두 잊었으며 세간의 명리에 움직이지 않고 슬픔과 기쁨에도 젖지 않았다. 그는 마음의 도리를 크게 구하여 밤낮없이 참구하기를 삼년만에 도를 얻었다. 이에 나 만송은 그에게 게송을 내리고 湛然居士 從源이라는 법호를 주었다."

 

야율초재가 징키스칸의 부름을 받아 中書令에 임명되면서 부터 '유교로써 나라에 봉사하고 불교로써 마음을 다스린다[以儒治國 以佛治心].'며 유교와 불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밝힌다.


 

"우주의 도리를 탐구하고 성품을 닦는 일에는 불교의 가르침보다 더한 것이 없고, 세간을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에는 공자의 가르침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쓰는 일에는 마땅이 공자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며, 나를 버리는 일에는 기꺼이 불교의 진여를 따르겠다." 

原文은 元 史記 耶律楚材傳에 나오는 ‘興一利 不若除一害’라는 말로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다면 백성들이 신뢰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사업이나 정책은 즉시 중단해야 하며 새로운 일을 자주 입안하는 것보다 원래 있는 법과 정책 가운데서 해로운 것을 골라내 없애는 것이 오히려 백성의 삶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것” 이라는 뜻이다.

 

元史 耶律楚材 열전 中
壬辰春,帝南征,將涉河,詔逃難之民,來降者免死。或曰:「此輩急則降,緩則走,徒以資敵,不可宥。」楚材請制旗數百,以給降民,使歸田裡,全活甚眾。舊制,凡攻城邑,敵以矢石相加者,即為拒命,既克,必殺之。汴梁將下,大將速不台遣使來言:「金人抗拒持久,師多死傷,城下之日,宜屠之。」楚材馳入奏曰:「將士暴露數十年,所欲者土地人民耳。 得地無民,將焉用之!」帝猶豫未決,楚材曰:「奇巧之工,厚藏之家,皆萃於此,若盡殺之,將無所獲。」帝然之,詔罪止完顏氏,餘皆勿問。時避兵居汴者得百四十七萬人。
壬辰/1232년 봄에, 帝/窩闊台가 南征하였는데, 장차 涉河/황하를 건너고, 詔하여 逃難/피난의 백성으로, 來降하는 者는 免死하게 하였다. 혹자가 말하길「이 무리는 다급하면 곧 항복하고, 느슨하게 하면 곧 도주하는데, 도주하여 이로써 적을 도우니, 宥/용서가 不可하다.」
楚材가 학살을 금하는 制旗/금하는 깃발 數百을 請하여, 이로써 降民/항복한 백성에게 공급하였고, 이로 하여금 田裡/고향로 돌아가게 하니, 全活/목숨을 살림이 심히 많았다.
 舊制에, 무릇 城邑을 공격하여, 敵이 矢石으로써 相加/상대에게 하면, 拒命하였다 하여, 이윽고 함락하게 되면, 반드시 죽였다. 汴梁/개봉성이 장차 함락되자, 大將 速不台가 遣使/사신을 보내 내언하였는데,「金人이 오랫동안 대항하여, 군사의 死傷이 많았으니, 城이 함락되는 날에, 마땅히 도륙해야 합니다.」야율초재가 馳入/빠르게 들어와서 아뢰어 말하길「將士가 暴露/비바람을 맞은지 數十年이니, 所欲하는 것은 土地와 人民 뿐이옵니다. 得地하여도 無民한다면, 장차 어찌 쓰겠나이까!」제가 未決하고 猶豫하자, 楚材가 말하길
「奇巧의 인공과, 厚藏의 가문이,  모두 이에 (개봉성에) 모였으니,
   만약 盡殺한다면, 장차 所獲함이 없을 것이옵니다.」
帝가 그러하다고 여기고, 詔하여 完顏氏을 罪주는데 그치고, 나머지는 모두 勿問하였다. 이때 (몽고군을) 避兵하여 汴에 거주하던 者 147만 명을 得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