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唐紀 莊宗 同光 元年》 (癸未, 923)
20. 애초에, 양의 섬주절도사인 소왕 주우희는 태조 주전충의 형 주전충의 아들인데 성품이 빼어나고 깨었으므로 인심이 대부분 그에게 향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가 금군을 꾀어내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말하자 양황이 불러 돌아오게 하여 그의 형인 주우량·주우능과 함께별제에 유폐하였다.
20.冬,十月,初,梁陝州節度使邵王友誨,全昱之子也,性穎悟,人心多向之。或言其誘致禁軍欲為亂,梁主召還,與其兄友諒、友能並幽於別第。
당군이 곧 도착하게 되자 양주는 여러 형제들이 위기를 타고 반란을 모의한 것을 의심하여 동생인 하왕 주우옹·건왕 주우휘와 나란히 그들을 다 죽였다.
及唐師將至,梁主疑諸兄弟乘危謀亂,並皇弟賀王友雍、建王友徽盡殺之。
양황제가 건국루에 올라가서 가까이하고 신임하던 사람들을 마주하여 선택하여 그들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야복을 입게하고 납조를 싸가지고 가서 단응의 군사들에게 재촉하게 하였는데, 이미 인사를 하고나서는 모두 도망하여서 숨었다.
梁主登建國樓,面擇親信厚賜之,使衣野服,繼蠟詔,促段凝軍,既辭,皆亡匿。
어떤 사람은 낙양으로 행차하여 여러 군대를 모아서 당에 대항할 것을 요청하면서 당이 비록 도성을 얻었다 하더라도 형세는 오래 머무를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단응의 군대가 있는 곳으로 행차할 것을 요청하니, 공학도지휘사 황보린이 말하였다.
或請幸洛陽,收集諸軍以拒唐,唐雖得都城,勢不能久留。或請幸段凝軍,控鶴都指揮使皇甫麟曰:
"단응은 본래 장수의 재목이 아니고, 관직은 총애로 말미암아 승진하였으니, 지금 위태롭고 궁색할 때에 그가 기회를 만나서 제압하고 승리하며 패배를 돌려서 공로를 세우기를 바라기는 어렵습니다. 또 단응은 왕언장이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담력이 이미 깨졌으므로 어찌 끝까지 폐하를 위하여 절개를 다한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凝本非將材,官由幸進,今危窘之際,望其臨機制勝,轉敗為功,難矣。且凝聞彥章軍敗,其膽已破,安知能終為陛下盡節乎!」
조암이 말하였다.
"일의 형세가 이와 같으니 한 번 이 누각에서 내려가면 누구의 마음인들 보장할 수가 있겠습니까?"
양황제는 마침내 중지하였다.
趙巖曰:「事勢如此,一下此樓,誰心可保!」梁主乃止。
다시 재상을 불러 이를 모의하니 정각이 스스로 전국보를 품고 거짓으로 항복하여 나라의 어려움을 풀어볼 것을 요청하자, 양황이 말하였다.
"오늘 진실로 감히 보물을 막지는 않겠으나, 다만 경의 이러한 책략과 같이 한다면 끝내 할 수 있겠는가?"
정각이 고개를 숙이고 오래 있다가 말하였다.
"다만 아직 끝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復召宰相謀之,鄭玨請自懷傳國寶詐降以紓國難,梁主曰:「今日固不敢愛寶,但如卿此策,竟可了否?」玨俯首久之,曰:「但恐未了。」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움츠리며 웃었다. 양황은 밤낮으로 울면서 해야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전국보를 침실에 두었다가 홀연히 그것을 잃었는데, 이미 좌우의 사람들이 그것을 훔쳐서 당의 군대를 영접하게 되었다.
左右皆縮頸而笑。梁主日夜涕泣,不知所為;置傳國寶於臥內,忽失之,已為左右竊之迎唐軍矣。
무인일(8)에 어떤 사람이 당의 군대가 이미 조주를 지났으므로 흙먼지가 하늘을 가렸다고 보고하자, 조암이 좇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온 허주를 대우함이 두터웠으니, 반드시 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디디어 허주로 도망갔다.
戊寅,或告唐軍已過曹州,塵埃漲天,趙巖謂從者曰:「吾待溫許州厚,必不負我。」遂奔許州。
양황이 황보린에게 말하였다.
"이씨는 대대로 우리의 원수이니, 이치상으로 머리를 내리기가 어렵고 저들의 칼과 톱을 기다릴 수도 없다. 나는 스스로 자를 수 밖에 없으니 경은 나의 목을 자를 수 있겠다."
황보린이 울면서 말하였다.
"신이 폐하를 위하여 검을 휘둘러 당의 군사를 죽이라고 하면 하겠지만, 감히 이 조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양황이 말하였다.
"경이 나를 팔아먹고자 하는 것인가?"
梁主謂皇甫麟曰:「李氏吾世仇,理難降首,不可俟彼刀鋸。吾不能自裁,卿可斷吾首。」麟泣曰:「臣為陛下揮劍死唐軍則可矣,不敢奉此詔。」梁主曰:「卿欲賣我邪?」
황보린이 스스로 목을 베려고 하자 양황이 그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경과 더불어 죽겠다."
황보린이 드디어 황제를 시해하고 자살하였다.
양황제는 사람됨이 온순하고 공손하며 절약하여 주색에 빠지는 실수가 없었는데, 다만 조엄과 장한길을 총애하고 신뢰하여 위엄과 복을 멋대로 하게하고 경상과 이진의 옛 신하를 소외시키고 버려서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멸망하기에 이르렀다.(후량은 당 천우 4년, 후량 개평 원년―907―에 당의 선양을 받았는데, 3황 17년 만에 멸망)
麟欲自剄,梁主持之曰:「與卿俱死!」麟遂弒梁主,因自殺。梁主為人溫恭儉約,無荒淫之失;但寵信趙、張,使擅威福,疏棄敬、李舊臣,不用其言,以至於亡。
기묘일(9) 아침에 이사원의 군대가 대량에 도착하여 봉구문을 공격하니 왕진이 문을 열고 나와서 항복하자, 이사원이 성에 들어가 군민들을 어루만지며 안정시켰다. 이날에 당황제가 양문으로 들어오자 백관들이 말 머리에서 영접하고 알현하며 엎드려 절하며 죄 받기를 요청하니 황제가 그들을 위로하고 각기 그들의 직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己卯旦,李嗣源軍至大梁,攻封丘門,王瓚開門出降,嗣源入城,撫安軍民。是日,帝入自梁門,百官迎謁於馬首,拜伏請罪,帝慰勞之,使各復其位。
이사원이 영접하며 축하하자 당황은 기쁨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여 손으로 이사원의 옷을 끌어 당겨 머리를 만지며 말하였다.
"우리가 천하를 소유한 것은 경의 부자의 공로이며, 천하는 그대와 더불어 이를 함께 할 것이오."
당황이 양황제를 찾으라고 명령하니, 얼마 안 되어 어떤 사람이 그의 수급을 바쳤다.
李嗣源迎賀,帝喜不自勝,手引嗣源衣,以頭觸之曰:「吾有天下,卿父子之功也,天下與爾共之。」帝命訪求梁主,頃之,或以其首獻。